성인들 가르침/금강경

금강경의 "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에 대하여(1)

무한진인 2013. 8. 13. 20:02

 

 

 

*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10) 

 

제5분 如理實見分(여리실견분)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不也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불불야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佛告 須菩提

불고 수보리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약견제상비상 칙견여래

 

제5분 이치를 실지로 볼 수 있는 말씀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떻하냐? 가히 몸뚱이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세존님, 가히 몸뚱이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몸뚱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무릇 있는 바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형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볼 것 같으면

그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다.  

 

<해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떻하냐? 가히 몸뚱이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없습니다. 세존님, 가히 몸뚱이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몸뚱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번 4분에서는 부처님이 보살은 상(相)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했읍니다.

또 색,성,향,미 촉, 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고 가르쳐 주었읍니다.

이번 회에서는 이 색,성,향,미,촉,법을 통해 대상에 머물르지 않는 것을 이해했다면, 과연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판별해 볼 수 있겠느냐고 수보리에게 물었읍니다.  

 

여기서 '여래(如來)'란 육체와는 상관없는 절대본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편성(如)'로부터 '왔다(來)'라고 해서 "똑 같이 온것"(如來)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아, 본성, 부처,무아,본체,바탕 등 여러가지로 부르고 있죠.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다 "똑 같이(如) 나온(來)" 보편적인 바탕본성을 묘사한 말입니다.

 

단순히 육체를 가지고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물어 본 것은, 또한  부처님에게만 나타난 육체의 특별한 몸의 특징이 32상 80종호로 여래임을 증명할 수가 있느냐,하는 물음도 될 수가 있읍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의 몸에는 32상이 있어서 우리 보통사람과는 다르며, 또 80종의 보기 좋은 행동과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몇가지 들면 부처의 몸은 항상 황금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발바닥은 마당발 형태인데 발바닥에는 두개의 수레바퀴자국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발가락 손가락 사이에 무늬없는 비단같은 그믈, 즉 황금빛의 물갈퀴(오리발 같은 것)가 있다고 합니다.

또 눈동자가 검푸르며, 푸른 연꽃과 같다는 것이죠.

머리 꼭대기 한가운데 살이 솟아 올라 꼭 상투모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 눈섭사이에 흰털(白毫)이 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외 여러가지 특징이 있으며, 이러한 32종 80호라는 육체의 특징으로 여래를 판단해 볼 수 있느냐고 수보리에게 물어 본 것입니다. 

 

이에 수보리는 " 육체 형상으로는 여래라고 판단 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이죠.

부처님의 육체라 할지라도 지(地),수(水),화(火),풍(風)의 4대 물질원소가 인연에 의해 조건들이 화합하여 공(空) 원소 안에서 임시로 육체 형상으로 나타나 보인 것일 뿐, 육체자체는 앞에서 말한 색성향미촉을 통한 대상적인 의식의 그림자일 뿐이죠.

그 자체의 실체가 없이 어떤 조건에 의하여 여러가지 기본 파동성 원소가 조합되어 형성된  의식의 파동적 상(相), 항상 변하고 있는 이미지일 뿐입니다. 

의식 자체가 움직이는 파동이고, 이 파동성의 조합으로 된 육체 이미지는 그 자체가 시간적으로 항상 변하고 있는 파동성의식의 이미지로써 실체성이 없죠.

그래서 육체 모양만으로는 절대본성인 여래(如來)임을 알아 볼 수가 없다고 대답했읍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형태로 나타난 것을 실재한다고 믿고 있읍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육체와 세상을 실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보인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자가 있다는 것이고, 본다는 행위는 바로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 두개로 나누어져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며,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은 원래는 일체였는데, 무지에 의하여 이원화로 나누어진 것이죠. 따라서 보는 대상은 보는 자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체가 없이 허황하고, 보는 자 자체도 대상없이는 그 존재가 없으므로 허황한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상(相)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 주어진 전체 인연작용에 의하여 임시로 나타나 보이는 작용의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 개별적인 상(相) 자체는 실체성이 없읍니다. 

이 한문 상(相)자를 형상 상(狀)자로 쓰지 않고, 서로 상(相)자로 쓰는 이유가 바로 이 상호 인연작용으로 생긴 결과이기 때문에 서로 상(相)자를 쓴 것 같읍니다. 

 

그러므로 바로 눈 앞에 보이는 형상이 실재한다는 믿음이 무지(無知)라고 하며, 이 무지가 깨져서 모든 형상은 실재하지 않고 환상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육체라는 것은 실은 육체가 아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그럼 육체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몸뚱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의 문장에서 非身相(몸의 형상이 아닌 것)이라는 단어에 주의를 줄 필요가 있읍니다.

대부분의 해설서에서는 이 비신상(非身相)을 공(空)이라고 해설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금강경에는 공(空)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왜 <非身相(몸의 형상이 아닌 것)>이라고 일부로 번역을 했을까요?

여기에 바로 금강경의 핵심이 숨어 있읍니다.

만일 이 <非身相>을 공(空)이라는 결정적인 관념으로 이해한다면 금강경의 원래 의도를 8만리나 떨어져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전부분에서 읽는 이의 이원적 관념(상상적인 관념)을 없애주려고, 임의적인 이원화 관념으로 더욱 분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극히 절제하여 선택한 글자를 사용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해서 한문 번역을 한 문장입니다.

만일 이<非身相>을 공(空) 혹은 무(無)라고 확정된 관념으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이원적 관념을 재생산하는 것이 됨으로써,  말이 나오기 이전으로 회광반조하지 못하고 다시 이원화 관념으로 추락할 수 밖에 없읍니다.

즉 이 <非身相>은 바로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4분에서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느냐? 헤아릴 수 없읍니다.>라는 문답내용과 같이 바로 <非身相>은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그대로 주의를 두어야 합니다.

<非身相>에다 어떤 관념도 일체 붙이지 말고, 어떤 상상도 전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非身相>이 바로 제 3분에서 <이와같이 머물고, 이와같이 마음을 정복시켜야 한다>라는 문장에서 <이와같이>의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非身相>에다 다시 또, 공(空)이라든가, 무(無)라든가, 무아(無我), 무상(無相),중도(中道),절대,등등과 같은, 어떤 이원적 관념 언어를 덧붙힌다면, 결국 알수 없는 것에다가 어떤 현상이나 이미지,명칭을 덧붙혀서 이원화 개념으로 추락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非身相>은 어떤 이미지나 관념,명칭을 붙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수 없는 것>으로 둬야지 금강경을 옳바로 읽는 방법입니다.

바로 <헤아릴 수 없는 것> 또는 <알 수 없는 것, 모르는 것> 그 자체에 밀착되어 있으면, 우리를 말 이전으로 자연스럽게 데려다 줄 수 있는 문이 될 수가 있읍니다.

말하자면 꽉 막힌 은산철벽(모름)과 마주쳐야지 이 알려진 현상계 넘어, 은산철벽(생각할 수 없는 것) 넘어로 넘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넘어가서, 그렇다면 왜 불교 사찰에서는 부처님의 형상을 돌이나 쇠로 만들어 모시고 매일 같이 기도드리고 절하고 예식을 치르느냐?라고 항의하겠지요.

절에서는 왜 부처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며 신도들에게 시주를 유도하느냐? 이것은 모순아닌가?

원래는 불교의 정식 교리는 우상숭배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조각상이나 그림을 그려 놓고 거기에 절을 하고 공양을 하는 것은 아직 무지한 중생들에게 바로 부처님이나 보살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경심과 정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죠.

절에 있는 부처상이나 보살상에게 절하고 공경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 내면에 있는 부처와 보살에게 절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모든 삼라만상이 자기 내면의 진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므로 그 대표성으로 부처상에다 공경하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상에다 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몸뚱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고치면, 수보리가 대답하기를 " 여래가 말씀하신 몸뚱이는 地水火風空으로 된 물질적인 육체가 아니라, 형태도 없고 크기도 없고 속성도 없는 법신(法身)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이원적이고 형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비이원적인 절대 측면에서만 말씀하시므로 절대 참나, 즉 법신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수보리가 대답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부처님이 그 유명한 금강경의 첫번째 사구계를 말씀하시면서 명확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약견제상비상 칙견여래

무릇 있는 바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형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볼 것 같으면

그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