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에 대하여(2)
*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8)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복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소위부주색보시 부부성향미촉법보시
須菩提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수보리 보살응여시보시 부주어상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하이고 약보살부주상보시 기복덕불가사량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가사량불? 불야 세존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불? 불야 세존
須菩提 菩薩無住相布施 福德亦復如示 不可思量
수보리 보살무주상보시 복덕역부여시 불가사량
須菩提 菩薩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단응여소교주
다음에는 이어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법(경계)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바 모양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할 것이며, 소리, 향기 ,맛, 촉감, 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같이 보시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 "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 "헤아릴 수 없읍니다. 세존"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 다음에는 이어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법(경계)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전번 3분에서는 보살이 모든 중생들을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큰 서원을 하고, "나"라는 각가지 아상을 없애야 된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는데, 이 4분에서는 이에 대해서 보살의 직접적인 실천사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법(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법(法)이란 모든 이원적인 대상, 경계를 가리킵니다.
즉 우리 감각기관에 나타난 모든 물질적,심리적 현상을 여기서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이원적인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것이죠.
경계에 머물지 말라는 말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하여 집착을 하지 말라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조금이라도 대상에 대하여 실체인양 취급하여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모든 감각대상에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꿈같은 의식의 변화 작용이므로 지나가는 꿈이나 환영처럼 허황된 것이라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미련이나 관심없이 오직 지금 현재에서 멀리 떨어져 지켜보라는 말과 같읍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런 말도 있읍니다만, 모든 것은 바로 흘러가지만, 그 흘러가는 것을 아는 모양없는 앎 자체는 드러나지도 않고 항상 움직임이 없읍니다.
보시(布施)라는 것은 인도말로 "dana"라고 하며, 영어로는 "donate"로 변화가 되었는데, 이것은 "준다, 기증한다, 헌신하다,베푼다" 등의 뜻이며, 원래는 "자기를 버리고 넓게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보시에는 크게 세 가지 보시가 있읍니다.
첫째는 재시(財施)로서 재물이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이고,
둘째는 법시(法施)로서 이것은 불법의 가르침을 펼치는것 입니다.
셋째는 무외시(無畏施)인데,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원래 보살의 행위를 보시라고 합니다.
대승보살은 자기가 깨닫기 보다는 발심하고 나서 우선 다른 중생들을 부처님 법으로 인도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법을 베푸는데 이것을 보살의 보시행이라고 하죠.
보살은 이 보시행으로 자신의 수행을 더욱 숙성시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보살이 보시할 적에 어떤 대상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보시를 하면서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죠.
좋다, 싫다, 같은 이원적 분별심을 가지고 보시를 하면, 에고인 "나"가 앞에 나설 수 밖에 없읍니다.
따라서 보시를 할 때는 보시하는 자(나), 보시를 받는 자, 보시하는 행위, 이 3요소가 하나가 되어 자기가 누구누구에게 보시한다는 마음조차도 사라진 순수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심(無心)으로 보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모양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할 것이며, 소리, 향기 ,맛, 촉감, 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같이 보시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형태,소리,향기, 맛,법, 이러한 것들은 우리 감각기관으로 나타난 물질적,정신적 감각적 모든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의 감각기관에 나타난 모든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은 이원화 물질 대상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말하자면 마음 외부 현상에 관심을 가지거나 집착한다는 것은 마음을 이원화로 나누는 것이고, 이원화된 대상이라는 것은 마치 거울 속에 나타난 영상처럼 의식이 분리되어 만든 허황된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허황된 이미지인 대상을 보는 주체인 "나"도 역시 허황된 가짜 '나'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대상에 집착하므로서 원래부터 없는 그림자인 에고 "나"를 더욱 강화시킬 뿐입니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은 원래 하나인데 서로 의존적으로 갈라져서 생겨났다가, 둘 중에 어느 하나가 없어지면 또 다른 하나도 그 존재가치가 없어져서 스스로 사라집니다.
머문바 없는 보시란, 자기가 보시한다는 어떤 자부감이나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 세상에 좋은 일을 한다는 그런 생각 자체도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워서 멀리하거나 어떤 사람은 좋아서 자주 도와준다거나,
또한 어떤 애뜻한 감정을 가지고 불쌍한 어린이를 도와 준다고 쁘듯한 기분이 된다거나, 그리고 어떤 의득을 바라는 목적성을 가지고 보시를 한다거나, 나보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 준다는 생각, 나는 보살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 나보다 못한 사람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 내가 이렇게 보시행을 열심히 하면 머지않아 깨달음이라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등등, 이런 것들이 모두 무엇인가 대상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순수하지 못한 에고가 살아있는 보시행이라는 것이죠.
여하튼 보살은 보시를 하되 모양이나 여러가지 감각 대상,관념이나 분별심 등에 집착하거나 끄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항상 모양없는 내면의 중심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이죠. 만일 보살이 어떤 감각 대상이나 관념에 머물러 있다면, 또한 "나"라는 에고도 아직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읍니다.
보살은 심지어 공(空)에도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보살의 보시 할 때 뿐만 아니라, 수행 중에도 빛이나 공, 초상현상 등 수많은 상과 체험들을 겪지만, 옳바른 구도자는 이러한 여러가지 체험과 신비현상에 머물지 않고(통과,통과~) 그런 것에 관심이 없이 오로지 수행만을 밀고 나가야 됩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복덕>이란 개인적으로 어떤 은혜를 받거나 능력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삼먁삼보리심> 전체 평등심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이원화 세계라면 개인으로써 무언가 공덕을 받는다고 하겠지만, 지금 이 보살의 보시는 머문바 없이 있는 비이원적인 절대 본체, 즉 무아상태를 지향하는 보시행위이기 때문에 결국은 딱 한가지 복덕인 절대자각의 무심상태(아뇩다랴 삼먁삼보리심, 보편적 평등심)에 들어가는 복덕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비이원적인 복덕입니다.
여기서 공덕(功德)이라고 하지 않고, 왜 복덕(福德)이라고 했을까요?
공덕(功德)이란 무언가를 노력해서 그 보상으로 받는 이원적인 보답이지만,
복덕(福德)은 원래 부터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며, 여기서는 바로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비이원적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비이원적인 것이기 때문에,생각으로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복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