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마땅히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에 대하여(1)
*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4)
제3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 降伏其心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 항복기심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소유일체중생지류- 액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약비유상비무상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샬은 마땅히 이와같이 하여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무리에 알로 까는 것, 태로 생겨나는 것 ,습에서 나는 것, 화하여 나는 것, 모양이 있는 것,모양이 없는 것,생각이 있는 것,생각이 없는 것,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들을 나로 하여금 모두 남김없는 열반에 들게 하여 멸하여 제도시키겠다고 서원하라.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시키더라도 실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런가?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는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3분은 앞의 2분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려면 마땅히 이와같이 머물 것이며, 이와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 것이다."라는 대답을 해 주었을 때에, 수보리가 그 말의 의미를 즉각 알아채야 되는데, 알아채지 못하고 한참있다 자세히 좀 말씀해 달라고 요청해서, 다시 부처님이 그 대답 중에서 "이와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는다"라는 부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제 2분에서 부처님의 대답에서는 "이와같이 머물고,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켜라"라고 "머무는 것"이 먼저이고, 다음에 "항복시키는 것"이 다음 순서로 나왔있는데, 제3분에서는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이 먼저 나오고, 다음 제4분에서 "마음이 머무는 것"이 나오는데, 순서가 뒤바뀐 것은, 아마도 마음을 먼저 항복시키고 나서, 그 다음에 안정되게 마음이 머무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읍니다.
따라서 제3분과 4분은 마음을 수행하는 방편에 대한 가르침이며, 금강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겟읍니다.
그 이외에 5분부터는 이 3분,4분에서 가르쳐 준 수행을 더욱 안정되고 유지하기 위한 보완,보림과정이나 금강경에 대한 신뢰와 공경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나누는 대화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3분의 제목을 대승정종분(大僧正宗分)이라고 붙힌 것은 그 내용과는 좀 적절하지가 못한 것 같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
원래 금강경 원본에는 소제목이 없었답니다. 이것을 당나라시대에 소명태자라는 분이 금강경을 각분으로 나누어 편집해서 소제목을 붙인 것인데, 다른 분은 그런대로 제목들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는데, 이 3분의 제목이 <대승의 바른 종지>라고 한 것은 그 내용이 보살의 수행과정에 대한 설명이며, 수행과정자체에서는 대승이니 소승이니 그런 구분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금강경 내용은 거의가 보살이 수행하는 요령과 보림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고 구별하는 내용이 별로 없읍니다.
또한 부처님 당시에는 대승,소승 구분이 없었죠.
대승, 소승 구분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몇백년이 흐른 후에 불교조직의 발전과정에서 불교 대중화 포교운동과 불교조직 개혁운동으로 대승불교가 나타나고, 그 대승불교가 자리를 잡은 후에 그 이전의 불교조직을 소승불교라고 비하하는 명칭을 붙인 것일 뿐입니다.
또한 수행자 입장에서는 말하자면 대승과 소승이라는 개념은 그저 한 생각의 명칭만 다를 뿐이고, 한 생각 차이 일뿐, 아무 차이가 없읍니다.
소승이 개인적인 깨달음만을 위해서 수행하고 깨달은 후에도 홀로 삼매 속에서 즐기는 도인이라면, 대승보살은 "내가 우주전체다"라는 한 생각으로 삼매 속에 들어가 전체 우주가 하나가 되어 절대본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다시 속세로 나와서 일반 대중과 함께 자기의 깨달음 공덕을 널리 보시해 주는 사회 헌신자라고 볼 수 있읍니다.
따라서 수행측면에서는 소승 수행자와 대승수행자가 구별이 없읍니다.
단 한 생각 깨치기 전에 <내가 전체 우주 그 자체다>라는 생각과 <나는 개인의 구도자이다>라는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내가 전체 우주만물과 하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깨치면 전체 우주 만물과 함께 삼매에 들어가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그후에는 자비심을 보시하는 것이고, 처음에 <나는 개인으로서 깨달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개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수행자도 깨쳐서 에고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전체 우주적 자아가 들어서므로 대승수행자와 똑 같이 우주적인 나로써 자비심이 생기고 대승 보살과 같은 대중보시를 할 수도 있는 것이죠.
굳이 대승,소승의 구도자를 구분해 보자면, 마음을 크게 잡고 나를 희생해서 남을 돕는 행을 위주로 수행하고 보시활동을 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생각과 행동이라고 한다면, 오직 자기 자신의 자아본성만을 깨치고자 혼자서 수행하며 노력하고 있는 구도자가 소승적 구도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 降伏其心
불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 항복기심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 모든 보살마하샬은 마땅히 이와같이 하여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이전의 제2분 마지막에 수보리가 부처님의 대답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고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달라고 요청해서, 부처님이 다시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키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보살 마하살>
'보살'은 인도 말로 '보디사트바'인데, '보디'는 지혜이고, '사트바'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마하샬'는 '마하 사트바'인데 "大人" 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이고,
그래서 '보살마하샬'은 '지혜로은 대보살'이라고 번역하면 되겠네요.
수행 측면에서는 최종 절대본체를 앞에 둔 최상승 근기의 구도자라고 여기며 되겠읍니다. 베단타 수행체계로 말하자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뿌리를 넘어선 절대진아의 문앞에 거의 도달한 구도자 정도 되겠지요.
<마땅히 이와같이 하여>
이 말씀은 먼저 2분에서 "이와같이 (네가 지금 일으키고 있는 그 의문상태 그대로 지키는 수행을 계속하면) "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이 "이와같이"를 다음에 이야기할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읍니다.
여기서는 수보리가 2분에서 "이와같이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라는 말에서 수보리의 현재 일으킨 의문자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으므로, 다시 "이와같이"라고 재 반복하고 나서 다음에 마음을 항복시키는 내용을 말씀하신 것 같읍니다.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즉 수보리가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 <어떻게 하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을 하며, 어떻게 하면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하는 의문(?)을 그대로 내면으로 향해서 유지하는 수행을 해서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는데, <그 마음>이라는 것은 이원화로 분리된 "내가 있다"는 근본적 존재의식을 기리킵니다.
그래서 그 움직이는 이원화 마음을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를 지금 말씀하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마음을 항복시키려면 무언가 그 이전에 어떤 행위가 시도되어야 하는데, 앞서 2분에서 <이와같이 항복시켜라>라는 말씀 밖에 하지 않은 것이죠.
따라서 2분의 부처님 대답 중에 <이와같이>라는 말에서 의미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항복시키기 위해서 <생각으로는 전혀 헤아릴 수 없고 알 수 없는> 지금 그의문의 상태에 머물러 그대로 있으라고 말씀한 의미로 해석을 했읍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하여 제4분에서 부처님이 그대로 직접 실천적인 답변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