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소요되는 시간적인 문제에 대하여
ㅇ.깨달음에 소요되는 시간적 문제에 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이치(成佛之理)에 대해 혹 어떤 사람은 한 생각(一念)에서 성취한다 말하기도 하고, 혹은 삼대아승지겁(三大阿僧祗劫)이라는 셀수 없는 긴 세월 동안 수행해야만 가능하다고 말들을 하나 잘 모르겠다. 이 둘 가운데 어떤 문장을 단정적으로 취하여 이것만이 옳다고 후학들에게 인가(印可)해 주어야 하는지를.>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해 보겠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근본이념은 시간이 길고 짧은 데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깨달음을 성취하는 수행시간의 더딤과 빠름을 말하는 가르침은 중생들의 근기에 알맞게 시행하는 방편에 속한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이 문제를 밝히기를
<신심을 내어 용맹하게 정진하는 중생을 위하여 깨달음의 성취는 일념(一念-頓悟)사이에 있다고 말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을 위하여 상대아승기겁 동안의 수행이 가득 차야만 깨달음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들 말은 가르침의 자취로 나타난 언어이므로 이 모두는 끝까지 허구적인 임시의 방편을 이룰 뿐이다.
능엄경초에서는 말하기를 <겁(劫)이란 시간에 따른 그 분야의 의미(時分義)이다. 그리하여 시간의 분야로 나눈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겁(成,住,壞,空劫) 모두가 중생들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견해를 따른 느낌일 뿐, 그 시간의 실존은 끝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란 망상을 따라 생멸(生滅)하는 눈앞의 공간적인 세계(境)를 의지하여 성립하는데 그 세계는 망상의 그림자일 뿐, 진여 일심에서는 그 실재하는 모습이란 본래 공적하기만 하다.
따라서 그것을 의지하여 성립하는 시간의 분야도 그 실체가 없기 마련인데 어찌 다시 시간적인 수량의 많고 적음을 논변하랴.
단지 일념에서 근본무명번뇌를 끊기만 한다면 어느 겨를에 다시 아승기겁의 수행을 편력하겠는가.
그러므로 수능엄경에서 말하기를 <나와 모든 세계를 허깨비처럼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여환삼매(如幻三昧)에 들어 손가락을 퉁기는 극히 짧은 순간에 번뇌가 끊어진 무학(無學)의 경지로 초월한다> 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형질과 그 감촉에서 받아들여진 느낌에 대한 인상(想相)이 오진경계(五塵境界)가 되고, 그것을 실재인 양 분별하고 집착하는 허망한 마음(識情)이 더러운 번뇌의 때가 된다.
따라서 이 둘을 함께 멀리 여의면 그대가 세계의 실재 모습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法眼)이 멀리 여읜 그 시간과 호응하면서 청정해지리라.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위 없이 보편하게 아는 깨달음(無上知覺)을 성취하지 못하랴>고 하였다>
또, 원각경(圓覺經)에선 말하기를 <나와 세계는 허깨비처럼 실재가 아님을 알고 집착에서 그 즉시 떠나면 다양한 수행방편을 조작하지 않게 되며, 허깨비 같은 허상의 집착에서 떠나면 즉시 깨달음이므로 역시 수행의 점차도 없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은 길고 짧은 시간이란 일념을 따라서 찾아 왔으며, 삼승(三乘) 수행인들이 시간적인 선후의 차이를 따르면서 깨달음의 결실로 취향해 가는 이 모두까지도 꿈 속의 일일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성취할 때의 일을 말해 본다면 이 모두는 일념의 찰나일 뿐,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
ㅇ. 깨달음의 경지는 육안으로 보지 못한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범천(梵天)이 해혜(海蕙)보살에게 질문하기를,
<선남자야, 그대는 지금 분명하게 깨달음의 법(佛法)을 보느냐>라고 질문하자,
해혜보살은 범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깨달음의 법이란 색상(色相)이 아니므로 육안으로는 보지 못하는데, 그대는 무엇때문에 깨달음의 법을 분명히 보는냐고 말하는가, 일체의 현상법에 집착하는 마음으론 깨달음의 모습을 보지 못하며, 무릇 집착을 떠나서 분명한 것이 바로 깨달음의 법이다. 그 법엔 현상과 본질의 상대적인 두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법이란 깨달음을 통해서 왔다 해도 물에 어린 달처럼 실체가 없으며, 흩어지면 마치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구름과 같다.
따라서 그것을 보는 것은 마치 꿈 속에 나타난 것과 같으며, 들리는 것은 골짜기에서 일어나는 메아리와 같이 깨달음의 법이란 깨닫는 곳에서 즉시 나타나므로 다른 방향으로부터 찾아온 것이 아니며, 미혹한 곳엔 스스로 없지만 이곳에서 떠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이 문제를 두고 말하기를 <모든 현상세계는 상호 의존관계인 연기법(緣起法)이므로, 따라서 그 자성이 성공(性空)이다. 그러므로 제법성공(諸法性空)의 이치를 보는 것을 세계의 실제 모습인 여래(如來)를 봄이라고 명칭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宗鏡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