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화두는 깨치지 못하드라도 말에는 속지 마십시오.

무한진인 2012. 10. 16. 10:05

 

 

 

간화선 창시자 대혜선사의 편지글(58)

 

39. 장사인 장원(張舍人 狀元)에게 답함

 

그대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결단코 끝까지 탐구하고자 한다면, 오직 가슴을 탁 터놓고서 그때 그때 대상사물이 다가올 때마다 즉시 응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활쏘기를 오래 배우다 보면 과녁의 한가운데를 저절로 마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읍니까. 달마스님께서는 이조(二祖)에게 "네가 밖으로는 온갖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져서 마음이 장벽같은 뒤에야 도에 들 수 있으리라"고 한 말씀을 모르십니까?

요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선, 이내 전혀 앎이 없는 곳을 향해 스스로 경직되게 막아 누름으로써 <마음이 장벽같아지길>바라고 있으니, 이때문에 육조대사는 "잘못 알았으니, 어찌 방편인 줄 알았겠는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암두(巖頭) 스님께서는 "이렇다 하면 바로 이렇지 못한 것이니, 긍정(是)의 귀절도 버리고 부정(非)의 귀절도 버려라."고 하였읍니다. 이것이야말로 밖으로 온갖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는 모습입니다.

 

설사 한꺼번에 폭발하듯이 타파할 수는 없더라도 언어에 끌려다니지는 말아야 됩니다.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은 보지 말아야 하고, 집에 돌아와선 길을 묻는 짓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아직 마음의 분별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마음의 불길은 더욱 활활 탑니다.

이러한 때에 다만 의심하는 화두,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라고 답한 내용만을 챙길 뿐입니다.

오직 화두만 챙겨 들되,

이런 생각이 와도 옳지 않고 저런 생각이 와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또 의도적인 마음으로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화두를 챙기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려 하지도 말고,

현묘(玄妙)한 것으로도 알아차리려 하지 말고,

또 유(有)다 무(無)다 라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하며,

진무(眞無)의 무(無)라고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일 없는 갑(匣) 속에 그대로 멍청히 앉아 있지도 말고,

부싯돌을 쳐서 번갯불이 번뜩이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마음 쓸 곳이 없어져서 마음 갈곳이 없을 때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이 속이 오히려 좋은 곳이니, 홀연히 늙은 쥐가 소뿔 속으로 쏜살같이 들어가다 문득 앞이 꽉 막혀 길이 끊긴 모습을 보는 곳과 같습니다. 

 

이 일대사(一大事)는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다만 지난 생에 반야의 씨앗을 깊히 심고, 일찍이 아주 먼 옛날부터 참된 선지식을 받드어 모시면서 바른 지견을 훈습해 와서 영식(靈識;8識) 속에 간직된 사람은 대상을 접촉하고 인연을 만나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마치 수많은 무덤 속에서 자기 부모의 무덤을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때는 남에게 묻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운문스님은 "말할 때는 있다가도 말하지 않을 때는 없서서는 안된다. 생각할 때는 있다가는 생각하지 않을 때는 문득 없으면 안된다."고 하셨으며, 

또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시기를 " 한번 말해 보아라, 생각하지 않을 때에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이 도리를 알지 못할까 걱정을 하여 다시 질문하길,"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하셨읍니다.

 

요즈음 들어와서 온갖 선이 생겨났읍니다. 일문일답을 하다가 맨 끝에 한 마디를 상대방보다 더 많이 이야기한 것으로 선(禪)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또 '옛 선사께서 도에 든 인연' 을 머리를 맞대고서 생각하여 " 이곳은 허(虛)이고 저 곳은 실(實)이며, 이 말은 현(玄)이고 저 말은 묘(妙)이다." 라고 한다거나,

혹은 비껴가는 대답으로 선문답을 한다거나, 혹은 똑같은 물음에 대해 답변을 달리하는 것으로 선(禪)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삼계(三界)가 유심(有心)이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는데서 알았다는 것으로 선(禪)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혹은 말이 없이 캄캄한 산 아래의 귀신 굴에 앉아서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을 위음왕(威音王) 저쪽이나 부모가 아직 나를 나지 않을 때의 소식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말없이 언제나 비춘다고 말하여 그것들로 선(禪)을 삼는 자가 있습니다.

 

이와같은 무리들은 요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 깨달음을 둘째 단계로 떨어진 것으로 여기고, 깨달음을 사람 속이는 것으로 보며, 깨달음을 만드는 것으로 잘못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습니다.

 

저는 늘 수행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간의 정교한 기예(技藝)도 깨친 곳이 없으면 오히려 그 오묘함을 얻을 수 없읍니다. 그런데 하물며 생사(生死)를 벗어나려고 하면서 다만 입으로만 고요함(靜)을 말해서 생사를 벗어나려 한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이는 마치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달리면서 서쪽에 있는 물건을 취하려는 것과 같아서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급할수록 더욱 늦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리들은 불쌍하다고 밖에 부를 수 없읍니다. 

경전의 가르침에서는 이들을 " 대반야(大般若)를 헐뜯고 부처님 반야의 빛을 끊어버린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천명의 부처가 세상에 나온다 할지라도 이들에게는 참회가 통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착한 인연을 짓더라도 악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차라리 이 몸이 티끌처럼 부숴질지언정 결코 불법을 인정과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결단코 생사를 대적코자 한다면 반드시 이 칠통을 타파해야지 비로소 가능합니다. 삿된 무리들이 살살 얼렀다고 그 헛소리에 넘어가서 실속이 없는 허망한 말로 문득 " 내가 이제 모든 것을  끝냈다" 라고 말하는 짓은 절대로 삼가하셔야 됩니다. 이같은 무리들은 벼이삭이나 갈대 잎처럼 세상에 흔하게 널려 있지만, 그대는 총명하고 식견이 있기 때문에 결코 이런 해독을 받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또한 공부하려는 마음이 간절해서 빨리 효험을 보고 싶어서 본인도 모르게 삿된 무리들의 꼬임에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기에 붓가는 대로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눈 밝은 사람이 보면 저의 허물만 늘어놓는 짓입니다. 

 

천만 번 바라건대 귀기울여 들으십시오.

오직 조주의 "무(無)" 자 하나를 일상의 인연 만나는 곳에서 붙들어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위산선사께서는 "지극한 이치를 끝까지 아는 데에는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고 하였읍니다.

가령 하늘꽃(天花)이 어지러이 떨어지도록 설법을 잘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다면, 모두가 밖으로만 내달리는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서 이 말을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대혜선사의 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