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노자도덕경 70장, 그 근원은 오직 모를 뿐.

무한진인 2011. 12. 18. 19:30

 

 

[무한진인의 노자도덕경 해설 70회]

 

[원 문]

吾言甚易知也 甚易行也

오언심이지야 심이행야 

而人莫之能知也 而莫之能行也

이인막지능지야 이막지능행야

 

言有君 事有宗

언유군 사유종 

夫唯无知也 是以不我知

부유무지야 시이부아지

 

知者希 則我貴矣

지자희 칙아귀의 

是以聖人 被褐而懷玉

시이성인 피갈이회옥

 

[한글 해석]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는 쉽지만,

알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이다.

 

말은 그것을 거느리는 주인이 있고, 

일은 그것이 행해지는 근원이 있소. 

 

이것(근원)은 오직 모를 뿐이며,

그러므로 (개인적인 ) 내가 알수 있는 것이 아니오. 

 

아는 것이 적어지면,

곧 내가 고귀하게 (근원이) 되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성인은 거친 베옷을 걸치고 있지만,

가슴에 옥을 품고 있소이다.  

 

[ 해 설 ]

본장은 곽점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서는 35장, 왕필본에서는 70장에 해당합니다.

전체 문장은 비교적 쉬운 한문자로 되어 있어서 해석하기에 그다지 어려운 점은 없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출판된 다른 해석서들과는 좀 다르게 해설이 되었읍니다.

 

이장의 내용은, 노자가 말하고 있는 도는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원적인 앎에만 매달리므로 도의 일원적인 상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에는 그것을 거느리는 주인이 있고, 일에는 그것이 일어나는 근원이 있는데,

그 말의 주인과 일의 근원은 이원적인 앎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모르는 것이므로,

나라고 느끼는 개인이 알 수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아는 이원적인 앎과 지식이 적을수록, 개인적인 나는 높고 귀한 참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겉으로는 무식해보이고 거칠어 보이지만,

내면에는 스스로 빛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문장 별로 해석에 들어가 보겠읍니다. 

 

吾言甚易知也 甚易行也(오언심이지야 심이행야);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행하기가 아주 쉽소.

甚; 매우,심히,易 ;쉽다, 知; 알다,

 

<吾言>은 "나의 말"이라고 번역하지만, 실은 노자가 말하고 있는 도덕경에 나오는 말들을 의미합니다.

<吾>는 도덕경에서 깨달은 도인이 "나"라고 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계속 주장하고 있는 도와 덕이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타고난 무위적인 본성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말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누구에게나 알려진 것이고,

그 말을 실천하기 이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무위적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알기 쉽고 행하기 쉽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하던 말 또하고, 하던 말 또 하며,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이죠.  

 

而人莫之能知也 而莫之能行也(이인막지능지야 이막지능행야);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而; 연결조사, 人; 사람, 莫;없다,能; 능히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육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개인 육체를 아는 주체로 여기고, 그외의 현상은 모두 남 또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육체인 자기 외에 모든 대상들을 안다고 여기지만, 그러한 주,객 이원화의 앎은 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져 비추어진 의식의 환상, 즉 무지를 통해서 보여진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도를 안다는 것은 둘로 나누어 인식했던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 통합된 것, 즉 일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인데,이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를 주,객 이원화로 나눠서 개념적인 대상으로써만 알고 있을 뿐이며, 

비이원적인 참앎으로 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도의 바탕 자체가 직접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도인으로써 행동한다는 것은 저절로 행해지는 덕행을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무위적이며 보편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도의 덕행을 행할 수 있으려면 도를 깨쳐야 하는데,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도만 알아가지고는 무위자연의 덕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다른 해석서들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왕필본의 원문은 <天下莫能知 莫能行>이라고 변형되어 있읍니다만,

한글로 해석을 하면 비슷합니다. 

 

言有君 事有宗(언유군 사유종); 말은 그것을  거느린 군주(君主)가 있고, 일은 그것이 행해지는 근원이 있는데,

君; 임금,군주,조상,주인,부모,근원, 宗; 마루.근원,바탕.

 

<言有君>은 "말에는 그것이 나온 주인 또는 조상이 있다"라는 뜻이며, <君>은 "조상이나 군주, 또는 주인"이라는 뜻인데, 본 해석에서는 <말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이라는 뜻으로 <군주(君主)>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읍니다. 

왜냐하면 이 뒤에 나오는 <則我貴矣>"내가 귀하고 높아진다"라는 문장과 그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 <君主>라고 해석을 했읍니다. 

그러나 더 높고 귀하게 여겨지는 <임금이나 왕>이라는 말을 쓰면 오히려 별로 문장구조상으로 어울리지 않으므로 <君主>라는 단어를 선택했읍니다만, 쉽게 말하자먼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말은 그것이 나온 군주가 있다>라는 것은 "말이 나온 근원"을 말하며, < 말없는 말 넘어> <생각없는 생각 넘어> <의식없는 의식 넘어>를 의미하며, 모든 것을 지켜보는 주시자인 도의 절대바탕을 말합니다.

즉 말이라는 것은 말없는 도의 본체인 절대바탕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事有宗>은 어떤 일은 그것이 행하여지는 근본적인 바탕이 있는데, 그것도 말이 나온 근원과 똑 같은 도의 본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말이 말없는 말의 바탕에서 나오듯이, 행위도 행위없는 행위의 바탕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인데, 말이 나온 군주나 행위가 나온 근원이나 다 똑 같은 도의 본체인 절대바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절대바탕이 바로 道, 진아, 무아, 참나, 나르바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 의지대로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 줄 알고, 자기 의지대로 마음대로 행하는 줄 알고 있지만,그러한 말과 행위가 나오도록 순수한 빛과 에너지를 주는 근원은 바로 도의 본체인 참나이지만, 사람들이 잘못된 개념과 착각으로 절대본체인 참나는 잊어 버리고, 개인존재의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말과 행위를 쓰려고 함으로써 절대참나로 부터 나온 순수한 빛과 에너지를 스스로 가로막고, 잘못된 개념과 습관으로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과 행위의 근원은 이원적인 앎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안다"라고 말하는 지성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읍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일종의 이원적으로 반사된 간접 앎이며, 직접적인 순수앎(眞知)과는 다릅니다.

 

기존에 출판된 해석서들을 보면,

"무릇 말에는 핵심이 있고, 일에는 근본이 있다."로 해석했으므로, 단어들은 좀 다르지만 의미적으로는 모든 책들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왕필본은 한문원문이 좀 변경되어있읍니다.

<言有宗 事有君>이라고 바꾸어져 있는데, <宗>자와 <君>자가 서로 바뀌어져 있는데, 아마도 왕필본 필사자가 백서본 문장이 해석하기에 좀 어색해지니깐, 자기가 해석하기 좋게 글자를 서로 바꿔치기한 것 같읍니다.

그러나 글자를 서로 바꾸었어도 그 원래 의미는 별로 달라지지는 않읍니다.

왕필본 해석 예를 들어보면, "말에는 종(宗)이 있고, 일에는 머리가 있다"라고 해석한데도 있고,

또 어떤 곳은 "말에는 근간이 있고, 일에는 주재자가 있다" 라고 해석한 곳도 있네요. 

 

夫唯无知也 是以不我知(부유무지야 시이부아지); 이것들은 오직 모를 뿐이며, 그러므로 개인적인 내가 알수있는 것이 아니오. 

夫; 이것(지시 대명사), 唯; 오직~뿐이다.다만, 是以; 그러므로,그래서, 不我; 나 아닌 것. 知; 알다.

 

<夫>는 윗문장의 "말과 행동이 나온 근원(君과 宗)"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이것은>이라고 해석됩니다. 구태여 <夫>자를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로 쓴 이유는 아마도 위의 두문장<言有君 行有宗>의 말과 행위의 근원을 통틀어서 한꺼번에 지시하는 복수대명사로써 쓰려고 <夫>자를 쓴 것 같읍니다. 어떤 곳에서는 "대저"라고도 해석했는데, 그래도 틀리지는 않읍니다만, 윗 문장의 <君과 宗>을 명확하게 지칭해주지는 못합니다.

<唯>는 "오직"이라는 뜻이며, "无知"는 말 그대로 "알 수 없다"입니다.

즉 말을 거느리는 군주(君主)와 행위가 나오는 근원(根原)은 이원적 분별앎으로써는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도의 본체인 참나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더 깊히 이야기를 해 본다면, 그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참나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그 진지(眞知)라는 것은 보통 지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이원적인 앎의 형태로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에고느낌이 사라져서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참앎(眞知)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 이 문장에서는 이원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오직 모르는 것"이라고만 말하고 있지만,

그 "오직 모를 뿐인 것" 속으로 더 깊히 오랫동안 잠겨 있으면,이원화의 앎을 넘어서고, 에고의 '나"가 사라지면서, 그 암흑같은 무지 넘어에는 전체적인 밝은 광명이 있음을 스스로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통 이원적인 사람들에게는 그 근원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알려주기 위해서 "오직 모를 뿐인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으로 알려주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모든 말 넘어의 근원, 모든 사물이 나온 근본으로 들어가려면, <夫唯无知也> "이것은 오직 모를 뿐이오"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아직 이원적이며 상대적인 앎의 상태에 있는 구도자에게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만 단순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是以不我知>는 "그러므로 개인적인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我>는 "개인적인 나"를 말하는데, 여기 이 문장에서는 "노자자신" 또는  "말하는 주인공 話者자신"을 "나"라고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라고 여기는 육체 동일시하는 개인 "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즉 이원적인 지성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 "나"라는 것은 육체를 자기로 여기므로 모든 것을  주,객 이원적으로 분류해서 보므로, 그런 지성으로는 일원적인 도의 본체를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다른 백서본 해석서를 보면 "사람들은 그저 무지하니,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하네."라고 되어 있는데,이 문장에서 기존의 대부분 해석서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들을 하고 있는것 같읍니다.

왕필본 원문은 변경되지 않았지만, 기존의 왕필본 해석들도 대부분 해석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읍니다.

예를 들면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도 되어 있고,

또 " 대저 오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한다"라고 해석이 되어 있읍니다.

여기서 나(我)를 이 문장을 쓴 노자자신이 "나"라고 한 것처럼 해석을 한 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知者希 則我貴矣(지자희 칙아귀의); 아는 것이 적으면, 곧 내가 귀하게 되는 것이오.

知者; 아는 것, 希; 적다. 則; 곧, 我 ; 나, 貴; 높아진다. 귀하다.

 

따라서 "아는 것이 적으면, 곧 나는 (근원을 깨친 도인으로써) 귀하고 높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내가 근원을 깨친 도인으로서 높고 귀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개인적인 에고의 내가 보편적인 참나, 절대 본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개인적인 나인 <我>는 지금 이문장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話者)인 노자자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각자가 육체 동일시되어 나라고 느끼는 그 개인적인 "나"를 말합니다. 

이원적이고 대상적인 앎이 적게되면, 그 개인적인 "나"가 모든 것의 왕인 참나가 되어 높고 귀해진다는 것입니다. 

<知者希, 아는 것이 적어진다>라는 것은 이원적인 지성을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이원적인 지성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지를 벗어난다는 것이며,

무지를 벗어난다는 것은 도의 본체, 즉 참나가 되므로 귀하고 높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면에 안주하는 근원적인 군주로써 말을 넘어서 있고, 모든 사물의 근원에 머무른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다른 해석서를 보면, "아는 자가 드물기에 나는 오히려 귀한 존재가 되네."라고 되어 있네요.

또한 왕필본 원문은 개조가 되어 있지 않은데, 기존의 해석서들을 보면,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고, 나를 본 받는 사람이 귀하다"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나를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나를 따르는 이가 귀하다"라고 대부분이 해석을 했읍니다만,

(나)는 노자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개인 "나"라고 여기는 자기 자신을 말하는데,

기존의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노자 자신이 "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是以聖人被褐而懷玉(시이성인 피갈이회옥); 그러므로 성인은 거친 베옷을 걸치고 있지만, 옥을 품고 있소.

 被; 입다,褐; 베옷, 懷; 품다. 玉;옥.보석

그러므로 도의 본체에 안주하고 있는 성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같지만, 가슴 속에서 저절로 빛을 발하는 도의 본체, 빛나는 구슬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被褐> "거친 베옷을 걸치고 있다"는 말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무식하고 거칠어 보인다>라는 의미입니다.

<懷玉> "옥을 품고 있다"는 말은 "저절로 빛을 발하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바탕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완전히 깨달은 도인은 경전도 안보고, 도에 대해서 아는 척도 하지 않으며, 그저 다른 보통 사람과 똑같이 먹고,볼거리를 즐기는 것처럼, 도시의 거리를 혼자서 어슬렁거리며 쏘다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내면에서는 항상  저절로 빛을 발하는 자각 속에 밝게 깨어서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안보이는 축복의 빛을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70장에서 우리는 도의 본체는 <오직 모르는 것일 뿐>이라는 가르침을 배웠읍니다.

"오직 모른다는 것"은 우리들의 앎이 경계없는 무한대(無限大) 속으로 끝없이 확장하며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끝없이 전개되며 무한하게 확장되다가 드디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자기 존재감조차 사라지면서 전체와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맞읍니다.

이것은 또한 완전히 반대로 말할 수도 있는데,

<오직 모른다는 것>은 무한소(無限小) 속으로 끝없이 축소되다가 드디어 작은 한점으로 응축되어 그 점과 하나가 되는 순간에 개인 '나'가 사라지고 전체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무한대(無限大)는 공간(空間)적인 측면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무한소(無限小)는 시간(時間)적인 측면으로 묘사한 것일 뿐이며, 둘은 다 똑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의식이 무한대로 확장되든, 무한소로 축소되든 상관없이, 항상 변하지 않는 배면의 주시자는 말없이 지켜 볼 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모양과 속성이 없이 그 배면에서 항상 지켜보는 주시자가 바로 우리 본래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암흑 속에 자신을 오랫동안 안정시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무지의 어둠 넘어에서 밝은 빛의 먼동이 환하게 트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