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산책(13)
여러가지 삼매들 간의 차이점에 관한 질문이 제기 되었다.
마하리쉬 : 감각기관이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 그것이 깊은 잠입니다.
빛 속에 잠겨 있을 때, 그것이 삼매(三昧)입니다.
마차에 탄 승객이 잠들어 있을 때는 마차가 움직이고, 멈추고, 말들의 멍에를 끄르는 것을 모르듯이, 본연삼매(本然三昧)에 들어있는 진인도 일어나는 일이나 생기, 꿈, 깊은 잠을 모릅니다.
여기서 잠은 말들의 멍에를 끄르는 것에 상응합니다.
그리고 삼매는 말들이 멈춰서는 것에 상응합니다.
왜냐하면 감각기관들이 움직일 태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말들이 멈추어 섯다가 다시 움직일 태세를 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삼매에 들면 (앉아있는 사람의) 머리가 밑으로 숙지 않읍니다.
왜냐하면 감각기관들이 -비록 움직이지 않아도-남아 있으니까요.
반면에 잠이 들면 머리가 밑으로 숙여집니다.
왜냐하면 감각기관이 어둠 속에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합일삼매(合一三昧)에서는 (생기와 마음의) 활동, 생시, 꿈, 잠이 잠겨 있기만 할 뿐 (소멸된 것이 아니므로), 삼매 아닌 상태를 회복하면 다시 일어날 태세가 되어 있읍니다.
본연삼매에서는 생기와 마음의 활동, 그리고 세가지 상태가 소멸되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들에게는 진인도 밥을 먹고 말을 하고 움직이는 등,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자신은 그런 활동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남들은 그의 활동을 의식합니다.
그의 활동들은 그의 육신에 속하지 그의 진정한 참나 곧 본래면목에 속하지 않읍니다.
진인 자신에게는 그가 (마차 안에서) 잠이 든 승객과 같읍니다.
혹은 잘자고 있다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서 음식을 먹기는 하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아이와 같읍니다.
아이는 다음날 자기가 우유를 전혀 먹지 않고 그냥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자다가 일어나 먹지 않았느냐고 해도 아이는 곧이 듣지 않읍니다.
본연삼매도 그와 같읍니다.
마하리쉬가 기독교 신앙의 참된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하리쉬 : 그리스도는 에고입니다. 십자가는 육체입니다. 에고가 십자가형을 당해 죽을 때 살아남는 것은 절대적 존재(神)인데("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를 참고), 이 영광된 살아남음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한 영국인이 예수에 대하여 질문했다.
질문 :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저의 하나님 ! 저의 하나님 !하고 외쳤읍니까?
마하리쉬 : 그것은 자신과 함께 못박힌 두 명의 도둑을 위해서 한 말일 수도 있읍니다.
또 진인은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동안 해탈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육신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떠나느냐는 중요하지 않읍니다.
어떤 진인들은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진인들은 삼매에 들어 있을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죽기 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진지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고통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만 외관상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기와 육신의 그릇된 동일시를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질문 : 그리스도가 성 바울을 깨우쳤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하리쉬 : 깨침은 절대적이며 형상들과 무관합니다. 성 바울은 진아를 의식하게 되자, 그 깨침을 그리스도 의식과 동일시했읍니다.
질문 : 그러나 바울은 당시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마하리쉬 : 사랑이냐 미움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그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그것은 라바나*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리스도 의식과 진아 깨달음은 동일합니다.
(*역주: "라마야나"에 나오는 나찰왕 라바나는 라마를 극도로 증오하여 그를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여하튼 신을 끊임없이 생각한 덕분에 그는 훗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또 삼위일체를 설명하셨다.
마하리쉬 : 성부 하나님은 이스와라를 나타냅니다.
성령 하나님은 진아(아트만)를 나타냅니다.
성자 하나님은 스승을 나타냅니다.
"이스와라, 스승, 진아라는 상이한 형상으로 나투시는, 허공처럼 편만한 몸을 가지신 다끄쉬나무르티님께 경배드립니다."(*역주 : 쌍까라짜리아의 다끄쉬나무리띠 송찬).
이것은 신이 그의 헌신자에게 스승의 형상(신의 아들)으로 나타나서, 그에게 성령(聖靈)이 내재함을 일러준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靈)이며, 이 영은 도처에 내재해 있다는 것,
그리고 진아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은 신을 깨닫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한 벵갈인 방문객이 질문했다.
질문 : 마음을 어떻게 제어합니까?
마하리쉬 : 그대는 무엇을 '마음'이라고 합니까?
질문자 : 제가 앉아서 신을 생각하면, 생각이 다른 대상들로 돌아다닙니다. 저는 이 생각들을 제어하고 싶읍니다.
마하리쉬 :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마음이 본성이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했읍니다.
그대의 생각을 신에게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오래 수행하면 마음이 제어되어 안정됩니다. 마음이 돌아다닌 다는 것은 그 에너지가 생각이라는 형태로 흩어지기 때문에 힘이 약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한 생각에 고정되도록 하면 그 에너지가 보존되고 마음이 강해집니다.
질문자 : 마음의 힘이란 무슨 뜻입니까?
마하리쉬 : 마음이 분산됨이 없이 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질문자 : 그것을 어떻게 성취합니까?
마하리쉬 : 수행을 하면 됩니다. 헌신가는 신에게 집중합니다. 지혜의 길을 따르는 탐구자는 진아를 탐구합니다. 수행이 어렵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질문자 : 설사 마음을 진아탐구로 돌린다 해도 마음은 오랜 투쟁 끝에 그 사람을 벗어나기 시작하고, 그는 시간이 좀 지날 때까지 그 장난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그렇게 되기도 하겠지요. 초기 단계에서는 마음이 긴 시간 간격을 두고 한번씩 탐구로 향합니다. 계속 수행해 나가면 그 시간 간격이 더 짧아지고, 그러다가 결국 마음이 전혀 돌아 다니지 않게 됩니다. 이때 잠재되어 있던 샥티가 나타납니다. 순수한 마음은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반면, 활동성 마음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순수성 마음은 생명흐름 속으로 녹아듭니다.
질문자 : 우리가 그 흐름을 체험하기 전에, 생각이 들끓는 상태로 마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예, 그 흐름이 먼저 존재합니다.
한 방문객이 말했다.
질문 : 어떤 사람들은, 명상은 거친 대상들(물질적 형상인 神像 따위)에 대해서만 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부단히 마음을 죽이려고 하게 되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 누구에게 재앙이 온다는 것입니까?
진아와 별개의 재앙이 있을 수 있습니까?
끊어짐이 없는 '나, 나'는 무한한 대양입니다.
에고, 즉 '나'라는 생각은 그 위의 한 물거품일 뿐이며, 개아 곧 개인적 영혼이라고 불립니다.
그 물거품도 물입니다. 그것이 터지면 대양에 섞여 버리니까요. 그것이 물거품으로 남아 있을 때도 역시 대양의 일부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고 (흰두교의) 여러 종파에서는 요가, 헌신행위등 무수한 방법을, 제각기 많은 변용을 가해 대단한 솜씨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가르치는데, 결국 구도자들을 유인하여 그들의 마음만 혼란시켜 놓고 맙니다. 다른 종교와 분파와 교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무얼 하려는 겁니까? 단지 진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들은 진아를 아는데 필요한 방편이고 수행법일 뿐입니다.
감각 기관으로 지각한 대상들이 직접지라고 이야기 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 감각기관의 도움 없어도 항상 체험되는 자기만큼 직접적일 수 있습니까?
감각지각은 간접지일 뿐, 직접지(直接知)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자각(自覺)만이 직접지이며, 그것이 각자의 그리고 모든 존재의 공통체험인 것입니다.자신의 진아를 아는데는 어떤 방편도 필요하지 않읍니다.
하나의 무한하고 끊어짐 없는 전체가 그 자신을 '나'라고 자각합니다.
이 '나'가 그것의 원래 이름입니다.
다른 모든 이름들, 예컨대 옴(OM)은 나중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해탈이란 진아를 항상 자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큰 말씀*인 '나는 부라만이다'가 그 근거입니다.
그래야만 지(知)가 밝아옵니다.
그래서 우파니샤드와 지혜로운 현인들의 가르침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역주: 깨달음의 실체를 선언하는 우파니샤드의 성스러운 구절들, '그대가 그것이다(Tat tvam asi)' '나는 부라만이다.(Aham brahmasmi)' '이 진아가 부라만이다(Ayam atma brahma)' ' 완전지가 부라만이다(Prajnanm brahma) 등 네 가지를 꼽는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