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발췌(3)

무한진인 2010. 11. 1. 19:48

 

 

ㅇ. 청문은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도와주고,

명상(성찰)은 그 이해한 것을 더욱 명료하게 해 주며,

마지막으로 내관(일원적 삼매)은 진리 깨달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모든 지혜는 확고하지 않지만,

그 깨침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구스베리 열매만큼이나 분명하고 친숙할 때만 그 깨달음이 확고하다고 합니다.

 

ㅇ. 음식의 성질은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마음은 소화된 음식기운으로 유지됩니다.

 

ㅇ. 문 : 저는 누구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발견합니까?

답 : 그 질문을 당신 자신에게 하십시요.

육신과 감각기능등은 '나'가 아닙니다.

더 깊히 들어가면 <마음의 껍질>과 그 기능들도 나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는 ' 이 생각들이 어디서 일어나는가?'하는 질문으로 나아 갑니다.

생각들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얼핏 지나가는 것이거나 깊히 헤아리는 것일 수도 있읍니다.

그것들은 지성의 껍질 안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들의 분명한 개념, 그리고 그 작용이 그 개인에게 분명해 집니다.

그런 분석을 해 보면, 자신의 개인성이 생각들의 존재와 그 연속을 자각하는 자로서 작용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개인성이 에고, 혹은 사람들이 말하는 '나'입니다.

지성의 껍질은 '나'의 껍질일 뿐이지, '나'자체는 아닙니다.

더 깊히 탐구해 들어가면 "이'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하는 질문이 일어납니다.

'나'는 잠속에서는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했읍니다.

그것이 일어남과 동시에 잠은 꿈이나 생시로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은 꿈에 상관하지 않읍니다.

지금 생시상태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나가 잠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그때는 '나'가 무지에 덮혀 있읍니다.

그 무지한 '나'는 경전이나 현자들이 확언하는 '나(참나)'일수가 없읍니다.

'나'는 잠조차도 넘어서 있읍니다.

'나'는 지금 여기 있을수 밖에 없고, 잠과 꿈 속에서도 그런 상태들의 속성없이 내내 존재했던 '나'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세가지 상태의 저변에 있는 (지복의 껍질을 넘어서 있는) 무제약적인 바탕일 수 밖에 없읍니다.

'나'는 요컨대 다섯껍질(육체(음식껍질),생기껍질, 마음껍질, 지성의 껍질, 지복의 껍질)을 넘어서 있읍니다.

그리고 자기 아닌 모든 것을 내버린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진아,

곧 존재,의식,지복 (삿트치트아난다)입니다. 

 

ㅇ. 문 : 그 진아를 어떻게 하면 알거나 깨달을 수 있읍니까?

답 : 현재의 '상대성 차원'을 초월하십시요.

별개의 존재(眞我)가 그 자신과 별개의 어떤 것(非我)을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주체가 대상을 자각합니다.

보는 자는 주체이고 보이는 것은 대상입니다.

이 둘의 저변에는 어떤 단일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에고로써 일어납니다.

이 에고는 식(識,앎,지성)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비식(非識, 알수없는 것)이란 識의 부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저변에 있는 본질은 주체와 비슷하지 대상과 비슷하지 않읍니다.

모든 주체가 사라질 때까지 대상을 추구하면,

주체는 점점 더 미세해지다가 마침내 절대적 주체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대상 소멸이라고 합니다.

 

ㅇ. 문 : 왜 대상을 제거해야 합니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두고서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읍니까?

답 : 안되지요. 대상이 제거된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별개의 정체성들이 제거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상은 실재하지 않읍니다.

에고를 포함에서 모든 부가물들은 대상입니다.

비실재를 제거하면 실재만 남읍니다.

밧줄을 뱀으로 착각했을 때는. 뱀에 대한 착각을 제거하기만 하면 진리가 드러납니다.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진리가 다가오지 않겠지요.

 

ㅇ. 문 : 언제 그리고 어떻게, 대상세계의 소멸을 실현할 수 있읍니까?

답 : 상대적인 주체 즉 마음이 제거될 때 그것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주체와 대상의 창조자이며, 이원적인 관념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제한된 자아'라는 그릇된 관념의 원인이고, 그런 그릇된 관념의 결과로 불행의 원인인 것입니다.

 

ㅇ. 문 : 이 마음이 무엇입니까?

답 : 마음은 '생기의 나툼'(생기진동의 나타남)의 한 형태입니다.

한 토막의 나무나 하나의 미세한 기계를 마음이라고 하지 않읍니다.

생명력(생명기운)은 생기의 활동으로 나타나며, 또한 마음이라고 하는 '의식하는 현상'으로도 나타납니다.

 

ㅇ. 문 : 마음과 대상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마음은 자신과 다른 어떤 것, 즉 세계와 접촉합니까?

답 : 세계는 생시와 꿈 상태에서 감지됩니다.

곧, 지각과 생각의 대상이 되는데, 그 둘다 마음의 활동입니다. 생시와 꿈 속에서의 생각과 같은 그런 활동이 없다면 '지각'도 없을 것이고 '세계'에 대한 추론도 없을 것입니다.

깊은 잠속에서는 그런 활동이 없고,' 대상들과 세계'도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읍니다.

따라서 '세계의 실재성'은 에고가 잠에서 깨어나는 활동에 의해 그 에고가 창조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그리고 그 실재성은, 잠속에서 자신의 성품을 회복하는(진아에 합일되는) 그 영혼에 의해 삼켜지거나 사라질 수 있읍니다.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 냈다가 다시 거두어 들이는 것과 같읍니다.

여기서 거미는 생시, 꿈,잠이라는 세 가지 상태 모두의 밑바탕에 있는데, 사람 안의 그런 거미를 아뜨만이라고 합니다.

한편 이 세계와 관련해서는 그러한 거미를 부라만(우주의식)이라고 합니다.

"사람 안에 있는 자(아뜨만)과 우주 안에 있는 자(부라만)은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