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한법도 구할 필요가 없다.

무한진인 2010. 7. 18. 20:26

 

[완릉록]

 

7. 모든 견해를 여윔이 무변신보살

"무변신보살(無邊身菩薩= 無限眞人)은 왜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합니까?"

"실로 볼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무변신보살이란 곧 여래이기 때문에 응당 보지 못한다.

다만 너희에게,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부처라는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중생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없다(無)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범부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나아가 성인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성인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견해만 없으면 그대로가 곧 경계없는 몸(無邊身=無限人)이니라.

그러나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 곧 외도라고 부른다.

외도란 모든 견해를 즐기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여래란 곧 모든 법에 여여(如如)하다는 뜻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미륵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성현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여여하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볼것도 들을 것도 없다.

여래의 정수리는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뚜렷이 보는 것도 없으므로,

뚜렷하다는 변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하염없으신(無限) 것이다.

숫자로써 헤아리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지만,

다만 방편으로 허공에 비유할 뿐이니라.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와서 일삼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른 경계를 억지로 끌어들여 설명하려 하지 말것이니,

설명하려 들면 벌써 식(識)이 이뤄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식의 바다에 잠겨서 나부끼는 쑥대처럼 흘러 도네'라고 하였다.

그저 말하기를,

'나는 알았으며 배워서 얻었으며,깨달았으며,해탈하였으며, 도의 이치를 얻었노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강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지만, 약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질 않는다면, 이런 견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내 너에게 말하노니,

한가하여 저절로 일 없도록 하여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라.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오직 모든 견해를 쉴지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봄(內見)과 밖으로 봄(外見)이 모두 잘못이며,

부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나쁜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잠깐 두 견해를 일으켰다가 그만 두 철위산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문수보살은 참된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방편적인 지헤의 상징이다.

방편과 참됨이 서로 서로 작용하여 끝내는 방편과 참됨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오로지 한 마음 뿐인 것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의 견해를 갖기만 하면 바로 중생의 견해를 내게 되느니라.

 

있다는 견해(有見), 없다는 견해(無見),

영원불멸하다는 견해(常見),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

이처럼 견해의 장애를 받기 때문에 역대의 조사들께서 일체 중생의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이것은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아서,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둠도 없다.

그러므로 밝음없음(無明)도 없으며,

또한 밝음없음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우리 이 선가의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갖어야 한다.

이와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 부르며,

할일없는 중이라 부르며,

또한 한몸의 삼보(一体三寶)라 하느니라.

 

대저 법을 구하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으며,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느니라."

 

8. 한 법도 얻을 수 없다.

"스님께서는 지금 법을 말씀하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승(僧)이랄 것도 없고, 법(法)이랄 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네 만약 가히 설명할 만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성으로써 부처님을 찾는 것'이 된다.

나(我)란 것이 있다는 견해를 내면 곧 처소(處所)인 것이다.

법 또한 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법이란 바로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마음의 법을 부촉할 때에

법이라 하는 법이 일찌기 무슨 법이던가.

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으면

마음,마음 하는 법을 비로소 알리라.

 

실로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도량에 앉음이라고 한다.

도량이란 오직 일체의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법이 본래 공(空)한 줄을 깨닫는 것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하는데,

본래 한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엔들 티끌과 먼지가 있겠느냐.

만약 이 소식을 안다면 유유자적하게 소요함인들 논 할바 있겠느냐.

 

9. 한 물건도 없음(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하신다면 한물건도 없음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없다고 해도 맞지 않다(無亦不是).

깨달음이란 옳은 곳도 없으며,(菩提無是處)

그렇다고 앎이 없는 것도 없다(亦無無知解)

 

                                                                  -황벽선사의 완릉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