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달마대사의 절관론(絶觀論)-1

무한진인 2010. 3. 18. 19:47

 

무릇 대도(大道)는 텅 비었되 꽉 찼으며, 깊고 높으며 적막하여 마음으로는 알수 없고, 말로는 나타낼 수 없다.

이제 두 사람을 임시로 내세워서 유일한 진리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해 보겠다.

스승의 이름은 입리(入理)이고, 제자의 이름은 연문(緣門)이다.

 

입리선생이 묵묵하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연문이 갑자기 선생에게 물었다.

" 심(心-마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안심(安心-평안한 마음)하는 것입니까?

 

입리선생이 답하였다.

"너는 마음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되, 또한 억지로 마음을 편안하게 쉬려고 해서도 안된다"

(*역주- 마음을 세움(立心); 마음이 흔들림없고 맑은 거울처럼 깨어있는 상태.)

 

(제자) :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도를 배웁니까?

(스승) : 도란 마음으로 알수 없는데, 어떻게 (도가) 마음에서 생길 수 있겠는가?

 

문 : 만약 마음으로 알수없다면 어떻게 해야 알수 있다는 것입니까?

답 : 아는 것이 있다면 곧 마음이 있음(有心)이고, 마음이 있다면 곧 道에 어긋난다. 아는 것이 없으면 곧 무심(無心)이고, 그대로가 참된 도(眞道)이다.

 

문 : 모든 중생에게 실제로 마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답 : 모든 중생에게는 실제로 마음이 없다.

단지 무심(無心) 안에서 억지로 사물 가운데에 마음을 일으켜서 망상이 생긴 것 뿐이다.

 

문 : 무심(無心)이란 어떠한 물건입니까?

답 : 무심(無心)은 곧 무물(無物-아무것도 아님)이며, 즉 비법(非法-비현상적인 것)이고, 진도(眞道-참된 도)이다.

 

문 ; 중생의 망상을 어떻게 해야 멸(滅)할 수 있읍니까?

답 : 망상이 실제로 있다고 보거나 망상을 없앨 수 있다고 본다면,

모두 망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 역주-망상은 원래부터 생겨나지도 않았고 그래서 없앨 것도 없다는 뜻,無生法忍)

 

문 : 부도(不道)한 行을 하는 것은 도리에 맞는 일입니까,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까?

답 : 만약 합당하다거나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면,

이 또한 망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문 : 적절한 때가 되면 망상을 떠나게 됩니까?

답 : 조금도 때가 되어 그렇게 될 수가 없다.

(* 역주- 깨달음은 시간의 경과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뜻)

 

문 : 무릇 성인(聖人)이란 마땅히 어떻한 법을 끊고, 어떻한 법을 얻어야 성인이라 하는 것입니까?

답 : 일체법(一切法)도 끊음이 없고,

일체법이 영원한 것으로 보지도 않으며,

일체법을 얻는 바도 없나니, 이를 성인이라 하느니라.

 

문 : 만약 (일체법을) 끊음도 없고, (일체법을) 영원한 것으로 보지도 않으며,

(일체법을) 얻는 바도 없는 자라면 범부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답 : 같지 않다. 모든 범부는 망상하고 있기에,

(일체법을) 끊을 바가 있다고 망상하고,

(일체법을) 얻은 바가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다.

 

문 : 지금 범부는 (일체법을) 얻는 바가 있는데,

그렇다면 얻는 바 있음과 얻는 바 없음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답 : 범부들은 얻은 바 있으니 곧 허망한 것이요.(*이원화 결과는 허망한 꿈)

성인은 얻은 바 없으니 곧 허망하지 않은 것이다.(*일원화이므로 새지 않음-無漏)

허망한 이(범부)는 말로 같다거나 다르다고 하지만,

허망하지 않은 이(깨달은 성인)는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거나 하는 것도 없느니라.

 

문 : 만약 다름이 없다면, 성(聖)이란 이름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읍니까?

답 : 범(凡)과 성(聖)은 둘다 이름이라, 이 가운데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니 곧 차별이 없다.

이를테면 "거북의 털" 또는 "토끼 뿔"이라는 말과 같다.

(*역주- 거북의 털,토끼뿔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의 이름으로만 있는 것임.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들간에 아무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空임. 범부가 분별망상하는 모든 법도 또한 이와같이 실체가 없이 이름 뿐이므로 空하다는 뜻.)

 

문 : 만약 성인(聖人)이 거북의 털과 같다면, 곧 (성인도) 당연하게 없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지금 이사람(今人)이 무엇을 배우겠읍니까?

답 : 나는 거북에게 털이 없다고 말했지, 거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문 : 털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비유한 것이고, 거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비유한 것입니까?

답 : 거북은 도(道)에 비유한 것이고, 털은 나(我-개인에고)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聖人은 무아(無我)를 깨달아 道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문 : 만약 이와 같다면, '道'는 마땅히 있다 할 것이고, '나'는 마땅히 없다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有와 無가 있는 것이라면 어찌 無의 이견(二見-두가지 견해)이 없을 수 있겠읍니까?

답 : '도'는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없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거북(道)은 이전에 없었다가 지금 있게 된 것이 아니니 있다고 할 수 없고,

털(我,에고)은 이전에 있다가 지금 없게된 것이 아닌 까닭에 없다 할 수 없다.

도(道)와 나(我)의 있고 없음도 이 비유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문 : 무릇 도란 1인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사람이 얻을 수 잇는 것입니까? 각자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모두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수행을 성취해야 얻어지는 것입니까?

답 : 모두 네가 한 말과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1인 만이 얻는 것이라면, 道는 두루 어디에나 있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여러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道란 다함이 있을 것이다.

만약 각자 따로따로 얻는 것이라면 道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것이다.

만약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가르침은 쓸모없는 것일 것이다.

만약 본래 있는 것이라면 만행(萬行-여러가지수행방편)은 쓸모없이 시설된 것이다.

만약 수행을 성취해야 얻어지는 것이라면 조작된 행위가 되니 참된 것(眞)이 아니게 된다.

 

문 : 구경(究竟)이란 어떻한 것입니까?

답 : 일체의 한량(限量-헤아림)과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문 : 범부에게는 몸이 있어서 또한 견문각지(見聞覺知)함이 있고,

성인도 몸이 있어서 역시 견문각지 함이 있는데, 이 양자가 어떻게 다릅니까?

답 : 범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의(意-의식)로 안(知)다.

성인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意)로 아(知)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한량(限量- 분별의식)을 떠난 까닭이다.

(*역주- 육근(六根)에 의한 감각의식은 주관과 객관대상으로 나누어진 상태이며, 의식에 의한 분별의식임. 중생의 개별적인 견문각지는 아는 자와 아는 대상의 이원화로 분리되어 허망한 인식상태이지만, 성인의 견문각지는 전체가 하나라는 일원적인 관점에서 펼쳐지므로 경계의 헤아림과 분별을 벗어나 있는 覺智상태.)

 

문 : 무슨 까닭에 경 가운데서 반복하여 설하기를,

'성인은 견문각지(見聞覺知)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 : 성인에게는 범부(주객 이원화)의 견문각지함이 없는 것이지,

성경계(聖境界-비이원적인 비춤)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계는) 분별을 떠난 것이다.

(*역주-聖境界; 절대본체의 자연적인 비춤의 경지)

 

문 : 범부의 경계가 있는 것입니까?

답 : 본래 실제로는 없으나, 다만 허망하게 분별하고 집착하여 전도(轉倒-거꾸로 봄) 되었을 뿐이다.

 

문 : 성인이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 아는 것은 생각(意)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까?

답 : 법체(법체-절대본체)는 보기 어려우나 만물은 알수가 있다.

저 현광(玄光- 절대본체에서 직접 비추는 순수의식)이 사물을 비추되 비추는 자의 비춤이 없고, 음양(밝음과 그림자)로 사물을 감지하되 감지하는 자의 생각(意)이 없는 것과 같다.

 

문 : 도는 구경(究竟)의 어디에 속해 있는 것입니까?

답 : 구경에는 속하는 곳이 없다. 허공이 의지하는 곳 없는 것과 같다.

道가 속해 있는 곳이 있다면 막힘이 있고 장애가 잇을 것이며, 주인이 있고,

의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문 : 무엇이 도의 근본이며, 무엇이 법(法)의 쓰임새(用)입니까?

답 : 허공이 도의 근본이고, 삼라만상이 법(法)의 쓰임새(用)이다.

 

문 : 이 가운데 누가 조화(造化-마음대로 부림)하는 것입니까?

답 : 이 가운데 실로 조화(造化)하는 자가 없다. 법계(法界)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다.

(*역주- 이 우주의 운행은 어떤 특정한 주재자의 신이 없으며, 모든 것은 그 자체의 움직임에 의하여 저절로 흐르는 것임. 즉 무위자연의 "있는 그대로" 흐름임) ----> 다음회 계속.

 

                                                             -달마대사(?)의 絶觀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