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마라.

무한진인 2010. 3. 3. 20:18

 

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듬이라 하는가.

生死心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듬이다.

그 道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경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범부의 행동도 아니고 성현의 행동도 아닌 이것이 보살행이다"

지금 하는 일상생활과 인연따라 중생을 이끌어 주는 이 모든 것이 道이니,

도가 바로 법계(法界)이며, 나아가서는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알수)만큼의 오묘한 작용까지도 이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때문에 심지법문을 말하며,

무엇때문에 다함없는 법등(法燈)을 말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법은 모두가 마음법이며,

일체의 명칭은 모두가 마음의 명칭이다.

만법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왔으니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서도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에 통달하였으므로 사문(沙門)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 本源자리에서는 명칭도 평등하고, 의미도 평등하며,일체법이 다 평등하고 순수하여 잡스러움이 없다.

 

만일 교문(敎門)에서 시절따라 자유롭게 法界를 건립해 내면 모조리 法界이고,

진여(眞如)를 세우면 모조리 진여이며,

이치(理)를 세우면 모조리 이치이고,

현상(事)을 세우면 일체법이 현상이 된다.

하나를 들면 모두 따라와 이사(理事)가 다름이 없이 그대로 오묘한 작용이며,

더 이상 다른 이치가 없다.

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다.

 

비유하면 달그림자에는 차이가 있으나 달자체는 차이가 없고,

여러갈래 물결파도는 차이가 있으나 그 물의 본체는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삼라만상은 차이가 있으나 허공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도리를 설명하는데는 차이가 있으나  걸림없는 지혜는 차이가 없듯이,

갖가지로 세운 법이 모두 한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워도 되고 싹 쓸어버려도 된다.

 

모조리 오묘한 작용이며

그대로 자기이니,

참(眞)을 떠나서 세울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운 그자리가 바로 참(眞) 자리이며,

모두 자기(自己) 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냐.

 

일체법이 불법이고, 모든 법이 바로 해탈인데, 해탈이 바로 진여이니,

모든 법은 진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이 모두 불가사의한 작용으로써 시절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경에서도 "곳곳마다 부처님 계신 곳"이라 하였다.

 

부처님(깨달은 이)은 매우 자비로우며,지혜가 있어,

선한 본성으로 일체 중생의 얽힌 의심을 부수어 유무(有無) 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망정(妄精)이 다하고,

인(人,보는 주체)과 법(法,대상세계)이 함께 空하여 비할 바 없는 법륜을 굴리고

모든 테두리(數量)을 벗어났다.

그리하여 일마다 걸림이 없고,

현상과 이치 양쪽이 다 통하니,

마치 하늘에 구름이 일어 났다가 어느덧 없어지듯이 머문자취를 남기지 않으며,

물에다 그림을 그리듯 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대적멸(大寂滅)이다.

 

번뇌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청정법신(淸靜法身)>이라 이름한다.

법신은 무궁하여 그 자체는 늘고 줄음이 없다.

커졌다 작아졌다 모나고 둥굴기도 하면서 대상에 따라 형체를 나타내니

물에 비친 달처럼 잔잔하게 흔들거리며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유위(有爲)를 다 하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지도 않으니,

有爲는 無爲의 작용이며, 無爲는 有爲의 의지처다.

의지처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할 것 없는 허공과 같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심생멸(心生滅)과 심진여(心眞如)라는 뜻에서 보자.

심진여(心眞如)라 하는 것은 밝은 거울이 물상을 비추는 것과도 같은데,

거울은 마음에 비유되고 물상은 모든 법에 비유된다.

여기에서 마음으로 법을 취한다면 바깥인연에 끄달리게 되니 그것이 심생멸의(心生滅義)이며,

모든 법을 취하지 않으면 심진여의(心眞如義)가 된다.

 

성문은 말을 들으므로써 불성을 보고,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보니,

그것들이 둘 아님이 아는 것을 평등한 성품이라고 한다.

이 성품은 차이가 없으나 작용은 같지 않아서

미혹에 있으면 식(識)이 되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智)가 되며,

이치(理)에 따르면 깨달음이 되고, 현상(事)을 따르면 미혹이 된다.

 

그러나 미혹해도 자기 본심에 미혹하는 것이며,

깨달아도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한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다시는 미혹되지 않으니,

마치 해가 뜸과 동시에 어둠이 없어지듯,

밝은 지혜가 나오면 어두운 번뇌는 공존할 수 없다.

 

마음(心)과 경계(境)를 (하나로)깨치면 망상이 발생하지 않으며,

망상이 나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무생법인은 본래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어서

도를 닦고 좌선할 필요가 없으니,

닦을 것도 없고, 좌선할 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다.

 

이제 이 이치를 알았다면 진정코 모든 業(억지 수행)을 짓지말고,

本分따라 일생을 지내도록 하라.

가사한벌 누더기 한벌로 앉으나 서나 끊임없이 계행(戒行)을 더욱 훈습하고

정업(淨業)을 더욱 쌓도록 하라.

이렇게만 할 수있다면 깨닫지 못할까 무얼 근심하랴.

듣는라고 수고하엿다. 몸 조심들 하라.

 

                                                                          -마조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