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벽암록

앞도 삼삼 뒤도 삼삼(前三三後三三)

무한진인 2009. 11. 13. 20:56

 

 

[수시]

용과 뱀을 구별하고 옥과 돌을 가리며,

흰 것과 검은 것을 구별하고 의심을 결단하는 데에,

만일 이마 위에 일척안이 없거나 팔꿈치 아래 호신부(護身符)가 없으면

언제나 첫머리부터 빗나가 버린다.

그저 지금 보고 듣는 것에 어둡지 않고,

목소리가 순수하며 참다우니,

말해보라, 이는 검은 것인지 흰 것인지, 굽은 것인지 곧은 것인지를.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결판을 내야 할까?

 

[본칙]

문수가 무착(無著)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묻지 않을 수 없구나. 이러한 소식이 있었구나-

 

"남방에서 왔읍니다."

-번뇌의 굴 속에서 왔구나. 하필이면 눈썹 위에서 짐을 올려 놓느냐. 허공은 원래 방위가 없는데 어떻게 남방이 있겠느냐?-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이런 말을 입에 담다니---.-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알찬 사람이란 얻기 어렵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가?"

-당시에 한 번 소리지르고 내질러 거꾸려 드려야 했다.-

 

"삼백명 또는 오백 명 정도 입니다"

-모조리 여우의 정령들이로다. 과연 잘못을 저질렀군.-

 

무착이 도리어 문수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수행하는지요?"

-내질렀다. 창끝을 돌려대는구나.-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완전히 졌다. 정신없이 허우적 거린다.-

 

"대중이 얼마나 되는지요?"

-나에게 화두를 돌려다오. 그래도 용서해 줄 수는 없지.-

 

"앞도 삼삼(前三三), 뒤도 삼삼(後三三)이지"

-이랫다 저랬다 하는군. 말해보라. 얼마나 될까? (너무 많아) 천수대비(千手大悲)로도 셀수없다.

 

[평 창]

무착이 오대산을 유람하는 도중 황량하고 외딴 곳에 이르렀다.

문수는 하나의 절을 화현(化現)시켜 그를 맞이하여 자고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남방에서 왔읍니다"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더냐?"

"말법시대의 비구가 계율을 조금 받드는 정도입니다"

"대중은 얼마나 되는가?"
"삼백 명 또는 오백명 정도 됩니다."

무착이 도리어 문수에게 물었다.
"여기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시는지요?"

"범부와 성인이 함께 있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지"

 

(그뒤) 차를 마신 후 문수는 유리로 된 찻잔을 들고서 말하였다.

"남방에도 이런 물건이 있느냐?"

"없읍니다"

"평소 무엇으로 차를 마시느냐?"

무착이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는 하직하며 떠나려 했다.

문수는 균제동자에게 문 밖까지 전송해 주도록 하였다.

무착은 동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고 말하였는데, 얼마나 되는가?"

"대덕이여."

무착이 대답을 하자, 동자는 말하였다.

"이것"은 얼마나 됩니까?"

무착은 또 물었다.

"여기가 무슨 절인가?"

동자가 금강역사(金鋼力士)의 뒤를 가리켰다.

무착이 머릴를 돌리는 찰나에 동자와 화현으로 나타난 절까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텅빈 산골짜기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후세에 금강굴(金鋼窟)이라고 불렀다.

 

그후 어떤 스님이 풍혈스님에게 물었다.

"누가 청량산(오대산의 다른 이름)의 진짜 주인입니까?"

"무착의 질문에 한마디 대답 못하고, 지금껏 노숙하며 떠 도는 스님이다"

 

투철히 참구하여 무심하게 실제의 경지를 밝고자 한다면 무착의 언구(言句)에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펄펄 끓는 가마솥과 숫가마 화로 같은 지옥에서도 뜨겁지 않고,

차가운 어름 위에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

만일 투철히 참구해 홀로 높이 금강왕 보검처럼 준엄하려면 문수의 말에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물로 떠내려 보내지도 못하고 바람으로 날려 보내지도 못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장주의 지장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은 말을,

"요즈음 어디에 있다 왔느냐?"

"남방에서 왔읍니다"

"그곳의 불법은 어떻한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읍니다"

"내가 여기에서 밭에 씨앗을 뿌리며 주먹밥을 먹는 것만 하겠느냐?"

 

말해보라, 이는 문수가 대답했던 곳과 같을까? 다를까?

어떤 사람은 "무착의 대답은 옳지 않고, 문수의 대답에는 용도 있고,뱀도 있으며,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다"고 하나, 이와는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또한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을 분명하게 알수 있겠는가?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 편인데, 뒤에 쏜 화살은 깊숙히 박혔다.

말해보라, 얼마나 많은 것인가?

여기에서 깨칠 수 있다면 천 구절, 만 구절이 다만 한구절일 뿐이다.

이 한구절 속에서 끊어버리고 잡아 둘 수 있다면,

잠깐 사이에 이러한 경계에 이를 것이다.

 

[송]

일천 봉우리 굽이 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문수를 보았느냐?-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오.

-설령 보현 보살이라도 보지 못한다.-

 

우습구나,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

-말해보라, 무엇이 우수운가? 이미 말 이전에 있었는 걸.-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로다.

- 모쪼록 발 아래를 살피도록 하라. 물렁물렁한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떨어진 것은 주발인데 접시가 조각조각 부서졌구나.-

 

[평창]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 문수와 이야기 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는 설두스님이 거듭해서 념(拈)하는 것일 뿐, 송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어떤 스님이 법안스님에게 물은 경우와 같다.

"무엇이 조계 근원의  한 방울 물입니까?"

"이것이 조계 근원의 한 방울 물이니라"

 

또 어떤 스님이 낭야 각 스님에게 물었다.

"본래가 깨끗하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깁니까?"

"본래 깨끗하거늘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기는가?"

이것들은 결코 그저 거듭해서 념(拈)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꾸눈 명초 덕겸 스님도 그 뜻에 대해서 노래하였는데,

하늘과 땅을 덮는 기봉이 있었다.

 

사바세계 두루두루 훌륭한 가람

어디를 보아도 문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네.

그 말에서 부처의 눈을 열 줄 모르고

돌아서서 그저 푸른 산 바위만 바라보네.

 

"사바세계 두루두루 훌륭한 가람"이란 잡초더미를 절로 화현시킨 것을 가리킨 것이다.

이는 이른바 권(權), 실(實)을 모두 행하는 기용(機用)이 있다 하겠다.

"어디를 보아도 문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네. 그 말에서 부처의 눈을 열 줄 모르고, 돌아서서 그저 푸른 산 바위만 바라보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런 경우 문수,보현,관음의 경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결국은 말로만 이러니 저러니 한 것은 아니다.

설두스님은 명초스님의 것을 고쳐 쓰되 면밀한 점이 있다.

 

"일천 봉우리 굽이굽이 쪽빛처럼 푸르른데"라고 하였는데,

결코 칼끝에 손을 다치지 않고, 구절 속에 방편과 실상이 함께 있으며,

이(理)와 사(事)가 있었다 하겠다.

 

"문수와 이야기하였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는데,

하루 밤새껏 이야기하고서도 문수를 몰랐었다.

그후 무착이 오대산에 전좌(典座)로 있었는데,

문수는 늘 죽 끓이는 솥 위에 나타났다가,

무착이 휘드르는 죽을 젖는 주걱에 항상 맞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긴 꼴이다.

당시 그가 "남방에서는 불법을 어떻게 수행하느냐"고 말했을 때 바로 등줄기를 한 방망이 갈겼어야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편이었을 텐데.

"우습구나. 청량산에는 대중이 얼마나 되느냐고?" 했는데,

설두스님의 비웃음 속에서는 칼이 있다.

이 웃음을 안다면 그가 말한 "앞도 삼삼,뒤도 삼삼"이라는 뜻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碧巖綠 三十五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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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데, (무한진인도) 원오스님 흉내 좀 내보자.

 

이제 자세히 들여다 보니,

무착스님이 지어낸 꿈 이야기 같구먼.ㅎ~

무대는 중국 오대산 깊은 산골,

홀로 산속을 헤메던 무착스님이 지쳐서 산속에서 잠깐 앉아 쉬는 동안에 꾼 꿈.

그 꿈 속에서 문수보살을 만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조금 각색해서 들려준 내용인 것 같은 디~~.

하긴 오대산 깊은 산골속에서 꿈을 꾼 무착스님 그자신도 꿈 속의 사람이고, 지금 이글을 읽는 사람도 꿈 속 사람이니, 만일 꿈 꾸는 사람이 그것이 꿈이라고 알지 못한다면, 꿈이 꿈인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데 희안한 것은 깨달은 선사들이 이러한 환상같은 꿈이야기를 이용해서 진리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썻단 말야.

그것이 꿈이나 환상이라는 것은 조금도 실토하지 않고, 마치 실제속에서 일어난 일들처럼 말한단 말야.

 

마치 연못에 비쳐서 어른거리는 달 그림자를 밖으로 건져내어 보여주며,

이것이 '진짜 달이로다, 바로 보아라'라고 말씀들을 하시는 것 같단 말이야.

 

물론 무엇을 말하는지 진심은 알지만, 그렇다고 꿈이나 환상같은 픽션을 만들어서 실제 일어난 일처럼 시치미를 떼고 한 바퀴 휘~ 돌아서 진지하게 말씀들 하시는 것을 보면,

다 알면서도, 그냥 믿고 속아주는 척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옛선사들의 견해에 함께 동조(同調)해 주는 것이지.

꿈 속의 이야기들을 진리로 바꾸어 풀어서 해설해주는 설두,원오스님을 비롯한 옛 중국의 선사들 참으로  대단들 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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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는 말에,

발바닥 밑이 근질거리네.

 

이른 새벽 꿈에서 깨어나,

"지금 여기가 어딘가?" 스스로 묻노니,

 

분명한 것은

헷깔릴 수가 없는 것이지, 

꺼 럼~   

 

앞도 三三이고 뒤도 三三이면

그 中間 '지금 여기'는 몇이나 될까? 

                                              _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