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관찰자가 대면하지 못하는 무한 공간이다.
서너사람이 부부동반으로 찾아와 우리는 모두 마루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는 직업인들이었다.
한사람이 자기는 과학자이고 나머지는 수학자와 엔지니어라고 소개했다.
강은 폭우가 오면 넘치지만, 그들은 절대 자기 선을 넘지 않는 소위 전문가 집단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대지를 기름지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넘쳐 흐르는 범람이다.
엔지니어가 물었다.
"당신은 공간에 관해 자주 말씀하시는데, 우리 모두는 그 말이 뜻하는 의미에 관심이 많읍니다.
다리는 둑과 둑, 언덕과 언덕 사이의 공간을 연결시켜 줍니다.
물로 가득찬 댐에 의해 공간이 만들어 집니다.
우리들과 드넓은 우주 사이에 공간이 있읍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공간이 있읍니다.
당신이 뜻하는 바가 이런 것입니까?"
다른 두 사람이 그 질문에 덧붙혔다.
그들은 여기 오게 전에 틀림없이 많은 대화를 했으리라.
"나는 그 질문을 보다 과학적인 용어를 써서 색다르게 표현 할 수 있지만, 어찌됐든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분리되어 있고 폐쇄된 공간이 있는가 하면 한정되지 않은 공간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은 온갖 재앙이 나오는 분리의 제한된 공간이다.
거기엔 있는 그대로의 당신과 당신자신에 관해 품은 이미지 사이에 분리가 있다.
또 당신과 아내 사이에 분리가 있다.
현재의 당신상태와 앞으로 이렇게 되어야 겠다는 관념 사이에 분리가 있다.
언덕과 언덕 사이를 갈라놓는 분리가 있다.
그리고 시간의 경계나 테두리를 갖지 않는 공간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고(思顧)와 사고 사이에 공간이 있는가?
기억 사이에 공간이 있는가?
행동 간에 공간이 있는가?
아니면 사고와 사고 사이에 공간이 전혀 없는건가?
건강과 건강치 못함- 원인은 결과를 낳고, 결과는 원인을 낳는- 사이에도 없는 걸까?
만일 사고와 사고 사이에 어떤 틈이 있다면 사고는 늘 새로운 것이지만,
그런 틈이 없기 때문에 공간이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고는 낡아있다.
당신은 사고의 지속성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사고를 묻어버린 뒤 1주일 뒤에 다시 끄집어 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 사고는 낡은 경계 안에서 계속 작용해 온 것이다.
따라서 의식과 무의식(이 좋지 못한 용어를 불가피하게 사용하지만)을 포함한 의식전체가 전통, 문화,관습,회상의 제한되고 협소한 공간 속에 있다.
당신은 기술을 통해 달에 갈수도 있고, 떨어진 두 곳에 잇는 곡선 다리를 놓을 수도 있고, 사회의 제한된 공간에 어떤 질서를 가져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시 무질서를 낳으리라.
공간은 이 방의 네벽을 넘어서 존재 할 뿐 아니라,
이 방을 만드는 공간도 역시 있다.
관찰자가 자기 둘레에 만들어 놓은 폐쇄된 공간이나 영역이 있는데,
이는 관찰자가 관찰대상(이것도 역시 자기 둘레에 어떤 영역을 만든다)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
관찰자가 밤하늘의 별을 볼 때 그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
망원경을 통해 몇만광년 떨어진 곳도 볼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이 공간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에 그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측정기준은 공간과 그 공간을 싸고 있는 시간이다.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사고가 스스로를 감싸는,
예컨데 어제,오늘,내일과 같은 심리적 차원도 있다.
관찰자가 존재하는 한 공간은 전혀 자유가 없는 협소한 감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관찰자가 없는 공간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것이나 아닌지 묻고 싶읍니다.
그것은 너무나 불가능한 것 같은데요. 당신만의 공상이 아닐까요?"
[감옥을 아무리 편안하게 꾸며 놓아도 그 안에서는 자유가 없다.
자유와의 대화는 기억,지식,경험의 영역 안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이 이 영역 속에서 몇푼 안되는 무질서한 굴종을 즐길 수 있다 해도 자유는 감옥의 벽을 부술 것을 요구한다.
자유란 상대적이지 않다. 오직 자유이냐 아니냐이다.
자유가 없다면 사람은 갈등과 슬픔,고통(여기저기 약간의 변화는 있겠지만)으로 가득 찬 좁고 제한된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란 무한한 공간이다.
공간이 부족할 땐 육식동물이나 새들이 자신들의 영역, 세력권을 주장하면서 다투는 것과 같은 폭력이 존재한다.
인간의 경우 법과 경찰의 제재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새나 육식동물과는 다르겠지만, 제한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제한된 폭력이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제한된 공간 때문에 서로에 대한 공격이 반드시 존재한다.]
"인간이 자신이 만든 영역 속에서 사는 한 자기자신과 세계와는 늘 갈등하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이제 우리는 자유의 핵심적인 문제와 마주치고 있다.
사회의 협소한 문화 안에는 자유가 없으며, 자유가 없기 때문에 무질서가 존재한다.
이 무질서 속에서 살면서 사람은 이데올로기나 어떤 이론, 혹은 이른바 神이라 하는 것 속에서 자유를 찾고 있다. 이러한 도피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 역시 인간에게서 인간을 떼어놓는 감옥이다.
이러한 제약을 스스로 초래한 사고가 자신의 구조를 깨뜨리고 끝장을 낸 뒤 그 이상으로 초월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할 수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보아야 할 점이 바로 이 사실이다.
지성은 자신과 자유 사이에 도저히 다리를 놓을 수 없다.
기억,경험,지식의 반응인 사고는 늘 낡아 있으며, 그건 지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낡은 것은 새로운 것에 다리를 놓을 수 없다.
사고는 본질적으로 편견, 공포,근심으로 차 있는 관찰자이며,
이 갖가지 상념은 자신의 고립성 때문에 자기 둘레에 어떤 영역을 만드는게 분명하다.
이와같이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엔 거리가 존재한다.
관찰자는 이 거리를 지키면서 관계성을 수립하려고 애쓴다.
그 결과 갈등과 폭력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엔 아무런 환상도 없다.
상상은 어떤 형태이든 진리를 파괴한다.
자유는 사고를 넘어서 있다.
자유는 관찰자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한한 공간이다.
이 자유와 마주치는 것이 명상이다.
침묵없는 공간이란 없으며,
사고로서의 시간은 침묵을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절대 자유를 주지 못한다.
질서는 가슴이 낱말들로 덮혀있지 않을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지두 크리스나무리티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