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노자도덕경41장, 도는 내면의식과 일체됨을 이루는 것이오.

무한진인 2009. 7. 12. 21:21

 

 

 

[원문]-왕필본,백서본,곽점본

 

上士聞道 勤能行於其中

상사문도 근능행어기중

 

中士聞道 若聞若亡

중사문도 약문약망

 

下士聞道 大笑之

하사문도 대소지

 

不笑不足以爲道

불소부족이위도

 

故建言有之

고건언유지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상덕약곡     대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   

 

大方無隅  大器免成  大音希聲  天象無形

대방무우     대기면성  대음희성  천상무형

 

道褒無名

도포무명

 

夫唯道善始且(善)成

부유도선시차성

 

 

[해 석] 

 

뛰어난 근기를 지닌 사람은 道에 대해서 들으면,

그 말을 따라서 열심히 수행하려고 하오. 

 

보통 근기의 사람은 道에 대해서 들으면,

듣는 둥 마는 둥, 긴가 민가 하는 것 같소.

 

낮은 근기를 가진 사람은 道에 대해서 들으면

크게 비웃어 버리는데, 

 

그런 사람들이 비웃지 않는다면

참된 道라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한 듯 하오이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격언들이 있소.

 

밝은 道는 마치 어두워 보이는 것 같고,  

도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마치 뒤로 물러서는 것 같으며, 

평평하고 일정한 道는 마치 울퉁불퉁한 흠집이 있는 것 같소. 

 

덕이 아주 높으면 마치 깊은 골짜기처럼 낮아 보이는 것 같고, 

지극히 순수한 마음은  마치 오염되어 불순해 보이는 듯 하며. 

광대하게 넓은 德은 마치 모자른 듯이 보이는 것 같고 . 

덕을 당당하게 내세우면 마치 교활한 듯이 보이는 것 같소이다.

 

참된 바탕은 마치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것 같고, 

네모가 아주 크면 마치 모서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며,

거대한 그릇은 가득 채워지는 것이 끝날 것 같지 않고,

소리가 너무 크면  들리지 않는 것 같소.

 

하늘의 생김새는 아무런 모양도 없으며.

무한하게 펼쳐진 道에는 붙힐 이름조차 없소이다. 

 

그러므로 

오직 道는 내면과 하나됨으로 바르게 시작하는 것이며,

또한 내면과 하나 됨을 바르게 이루는 것이외다.

 

[해 설]

이번장의 주요 주제는,

도는 너무나 크고 모양과 속성이 없기 때문에 분별적인 앎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의식 내면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道에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왕필본에서는 백서본과 곽점본에 있는 한문글자와는 다른 몇글자가  잘못 바꾸어져 있는 것 같아서, 왕필본을 기본 텍스트로 하되 백서본과 다른 글자는 백서본의 글자로 바꾸어 해석을 했읍니다. 

전체적으로 평범하게 해석되는 문장들이지만,

맨 마지막 끝맺음 문장에서 <善>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전체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전달 될 수도 있을 것 같읍니다.   

 

上士聞道 勤能行於其中

上士; 뛰어난 선비, 근기가 높은 사람, 聞道 : 도에 대하여 들으면,

勤;부지런히 행하다, 能; 할수있다. 行;실행하다,於; ~에,~에서, 의지하다,따르다. 其:그것

上士聞道 ; (근기가)뛰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서 들으면,

勤能行於其中 ; 그 말을 따라서 부지런히 실천하려고 한다.

 

근기가 높은 사람 또는 뛰어난 선비란 높은 도덕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외면의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내면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구도자를 말합니다.

물질적인 욕망이나 외부 감각적인 대상을 꿈과 같은 환영이라고 여기며, 오직 내면의 참된 본성을 찾아서 진리탐구를 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진리나 내면을 깊히 탐구하는 구도자들은 도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

그 즉시 배운대로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즉 도에 대한 믿음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中士聞道 若聞若亡

中士; 보통사람, 중간수준근기의 선비, 若; 같다. 亡; 잊다,경멸하다,없다.

中士聞道; 중간정도 가는 사람은 도에 대해서 들으면,

若聞若亡; 듣는 것 같기도 하고,긴가민가하며  무시해 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수준의 근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를 들으면,

도를 긍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라는 것은 없다고 무시해 버리는 것 같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긴가 민가 하면서 의심을 가지기도 하고, 간혹 관련된 서적에 잠깐동안 관심을 갖는 척하는 사람도 있겟죠.

즉 도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이죠.

<若聞若亡>은 곽서초간본 원문이며, 백서본이나 왕필본에서는 <若存若亡>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비슷한 뜻이며, -있는등 마는 둥, 또는 믿는 둥 마는 둥-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下士聞道 大笑之

下士; 근기가 낮은 사람, 저질인간, 笑; 웃다. 之; 그것(道)

下士聞道 : 근기가 낮은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大笑之 : 도에 대하여 크게 비웃는다.

근기가 낮은 사람은  나타난 물질적 현상세계가 진실이라고 여기면서,

쾌락과 물질적인 욕망에만 관심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내면 추구나 진리탐구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물질적인 가치와 욕망만 탐하는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不笑不足以爲道 ;

(그런 하근기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참된 도라고 여기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외면에 나타난 물질적인 현상만 진실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비웃지 않고,

어떤 약간의 긍정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진실한 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도는 보이지 않고 알수 없는 것인데, 오직 보이고 나타난 것만 진리라고 여기며,물질적인 것만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비웃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알수 있고, 보여진다는 것이며,

그런 것은 보이지 않고 알수없는 참된 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아주 깊은 뜻을 암시하고 있읍니다. 

 

故建言有之 :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격언들이 있다.

建言 ; 옛날부터 내려온 격언

建言이란 아마도 옛부터 내려온 격언이나 옛선인들의 가르침 말씀을 의미하는 것 같읍니다.

 

 

明道若昧; 밝은 道는 마치 어두워 보이는 것 같고,  

원래 道는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무지의 어둠을 벗어난 밝음이지만,

무지의 입장에서 道를 바라본다면, 앎의 너머에 있기 때문에 어두운 모름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무지 속의 앎이란 육체기관에 반사된 이원화된 분별앎이지만, 道란 앎이 나온 의식의 근원을 말하므로 일원화된 순수의식경지를 말합니다.

마치 지구상에 해가 비치는 대낮에는 햇빛이 지구표면에 반사되고, 대기층에 햇빛이 반사되어 환하게 휘도가 밝지만, 환하게 밝은 대낮일지라도 지구상공 수킬로미터에 있는 대기권을 멀리 벗어난 우주공간에서는 햇빛이 비치는데도 반사된 빛이 없어서 컴컴한 허공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비유될수가 있겠읍니다.

지구표면의 밤하늘에도 그 먼 우주공간은 햇빛이 지나가겠지만,

우주공간에 뻣치고 있는 태양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밤하늘은 컴컴할 뿐이죠.

햇빛이 환하게 보인다는 것은 무언가에 반사된 빛을 지각하는 것 뿐이지,

태양에서 직접 나오는 햇빛이 반사되지 않으면 무한한 공간에 전체적으로 퍼져 흩어지므로 환하게 보이지 않고 깊고 검푸른(玄) 허공으로만 보이는 것이죠.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듣는다, 등 감각작용과 그것을 아는 의식작용은 모두가 이원화로 반사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반사되지 않은 빛이나 순수의식은 전혀 알수없는 것이죠.

따라서 이원화적인 의식상태에서는 그 의식의 근원인 道(절대진아)자체는 모름의 무지상태같이 어둡게 보이고, 반사되어 나타나는 환영의 의식빛은 감각적인 눈앞에 환하게 알려지고 보인다는 원리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항상 있는 것(절대바탕)은 지각(주시)될 수없고,

모든 지각(주시)되는 대상들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의식의 움직임들이며,

이러한 주시되는 대상들은 절대바탕인 참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상입니다.

 

進道若退 : 도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마치 물러나는 듯하다.

道, 즉 근원을 향해서 깊히 들어가는 것은 마치 점점 道로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구도자가 道를 향하기 위해서는 이원화적인 앎을 넘어가야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안다'는 분별앎 입장에서는 이원화된 상대적인 앎에서 시작하므로,

처음에는 많은 책을 공부하며 이론적인 지성으로 이해를 하지만, 수행에 들어가므로서 점점 그 지성적인 지식을 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들어가야 됩니다.

즉 이원화의 상대적인 앎이 생긴 뿌리인 무지상태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무지의 뿌리상태는 모든 이원적인 앎이 사라진 곳일 뿐 아니라, 자기자신의 존재조차 사라진 완전히 망각상태가 된 곳입니다.

상대적인 앎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모름상태가 됩니다.

구도자는 이상태를 넘어가야지 전체적인 앎의 상태가 오는데, 상대적인 앎의 상태에서 볼 때는 완전히 모름을 향해서 들어가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죠.

결국은 앎과 무지의 상대적인 입장도 벗어나게 되지만, 그 진행과정에서는 마치 어두운 무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이 보여지므로 오히려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夷道若纇; 평평하고 일정한 道는 마치 울퉁불퉁한 흠집이 있는 듯하다. 

夷; 평평하다,오랑캐, 纇;엉크러지다, 치우치다, 흠집나다.실마디

'夷道'의 의미는 道는 "평평하다", 라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균일하다"는 의미가 더 적절합니다.

모든 만물에 균일하게 하나로써 편재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편성이라고 하며, 두드러진 것이 없어서 의식이나 감각에 의해 나타나지 않읍니다.

또한 '纇'는 실이 매듭지어진 모양을 의미하므로 "불규칙하다" 또는 "울퉁불퉁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읍니다.

이것은 온갖 다양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인데,

<도는 원래 전체가 평평하게 같은 하나이지만, 보통사람의 눈에는 마치 온갖 경계가 있는 것처럼, 모든 개성있는 개체가 별도로 각기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깨달은 도인은 자기의도가 없이 "있는 그대로" 자연에 맡기는 무위적인 언행을 하므로, 마치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경계를 그대로 따라다니며 보통 속세사람의 언행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속세사람은 "산은 산이고,물은 물이다"라고 하면서 이름과 모양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읍니다.

좀 수행이 깊어진 상근기 구도자는 보편의식과 동일시되므로서"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산이나 물이라는 이름과 모양을 무시하고 오직 전체가 하나의 의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궁극의 절대까지 성취한 도인은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말하며, "있는 그대로"가 모두 제자리에서 진리 그자체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정신수준이나 처해 있는 관점에 따라서 보여지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신을 육체를 가진 한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도 자신이 생각하는 각개인으로 보며, 이세상이 실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세상이 허무한 의식의 환영이라는 것은 모릅니다.

자신은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가 동일한  보편의식이라고 여기면, 모든 사람과 사물도 동일한 의식 그자체로 여기며, 전체 세상은 자기 자신과 일체라고 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 보편적인 사랑이 나오고 자비가 나오는 것이죠.

자기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다(無)라고 여기면 모든 사람과 사물도 아무것도 아님(無)라고 여기게 됩니다.

 

上德若谷; 아주 높은 德은 마치 깊은 골짜기처럼 낮아 보이는 것 같고, 

덕이 높다는 것은 보편성,포용성, 물러남,등의 언행을 말하며, 큰 인격을 말하는 것이죠.

이렇게 큰 포용력이 있고, 넓은 자비심과 드러나지 않는 보편적인 마음은 가장 낮은 곳에 파뭍혀 있는 깊은 산골짜기처럼 드러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谷'을 텅비어 있는 것으로 해석을 했는데, <谷>이 텅 비인 것으로 해석을 하려면 앞의 '上德'이 꽉차있는 의미가 되어야 문장이 조화가 있게 되는 것이죠.

谷은 '텅 빈 것'이라기 보다는 '가장 낮아서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의미가 더 적절할 것 같읍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上德"에 대비되는 "下谷"으로써 그 반대되는 의미로 해석을 했읍니다. 

 

大白若辱; 지극히 순수한 마음은 마치 오염되어 불순해 보이는 듯 하며. 

白; 순수하다,결백하다. 辱; 욕되다.치욕,수치,불순하다.

지극히 순수한 도인은 그 마음과 행동이 경계가 없이 자유롭기 때문에,

조건화된 속세인이 볼때에는 그 넓고 순수한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잣대로 불순하게 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廣德若不足; 광대하게 넓은 德은 마치 모자란 듯이 보이는 것 같고 . 

경계없는 보편적 德은 모든 곳에 두루 펼쳐져 있지만, 이원적이며 상대적인 관점에서는 마치 뭔가 모자른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넓은 자비심이 개인의식 관점에서 볼때는 마치 무언가 모자란 바보같거나 감정이 결여된 비인간적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넓은 德 또는 넓은 자비심은 어떤 특정개인대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약간의 자비도 직접 베풀어주지 않는 것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이며,

마치 무한한 자연의 작용은 때에 따라 특정지역에 홍수나 지진등 자연재해를 주는 것 같이 여겨지지만, 결국은 인간삶의 전체적인 환경을 더욱 생기있게 변화시켜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建德若偸 ; 당하게 내세우는 德은 마치 교활한 듯이 보이는 것 같소이다.

建 ; 세우다,일으키다,당당하다. 偸; 탐내다,교활하다.훔치다,몰래숨기다.

德을 당당하게 앞에 내세운다는 것은 보편적인 도덕성의 실천을 내세운다는 것이며, 이러한 德을 드러내서 주장하는 사람은 德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마치 제 잘난척하고 교활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말입니다.

 

質眞若渝; 바탕이 참되면 마치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것 같고, 

質;바탕,본질 渝; 변하다,달라지다.

참된 바탕이란 도의 본체인 절대진아를 말합니다.

절대바탕은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이고 깨닫지 못한 속세인에게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고 알 수없는 것이므로, 마치 그것이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나 절대바탕은 알수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항상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 이므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몸과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그 결과로써 무엇인가를 획득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수행이라는 행위의 결과로서는 그 절대바탕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그것은 원래부터 항상 바탕에 변함없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생기거나,만들거나,나타나거나,없었지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바탕에 항상 원래부터 변화없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을 수십년간 한 구도자나 전혀 수행조차 하지 않은 범죄자나 똑 같이 지니고 있는 것이 이 절대바탕이지만, 두사람 다 무지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심오한 수행을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구도자가 개인자신의 마음자체가 변해서 절대참나 바뀌는 것이 아니라, 도를 닦는 구도자인 그자신의 개인성인 "나"가 사라져야만 절대참나가 바르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몸마음을 가지고 수행에 집착한다는 것은 "나라는 에고"를 더욱 강화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고금동서의 모든 스승들이 충고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도를 닦는 구도자들이 명확하게 이해해야 될 핵심문제인 것 같읍니다.

절대바탕은 항상 그 "나"라는 개인성 밑에 변함없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니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길에 수행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최종적인 절대 진아가 되려면,

기초적인 마음자세는 닦아야 되는데,

일단 이원적인 몸마음 상태에서 찌들은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되며,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고 온갖 집착으로부터 초연해 지려면,

마음의 묵은 때를 벗기고, 외부대상으로만 향하는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서 고요하게 붙잡아 둘 필요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고요해진 마음이 되어야 최종 깨달음으로 향할 수 있는 기초적인 여건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통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주객 이원화된 행위로써, 시간요소로 형성된 것이고, 의도적으로 지어낸 행위이며, 소정의 목적을 가지고 적절한 여건을 만들기 위한 사전 준비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최종 깨달음의 목표는 일원적이며, 저절로 항상 있는 것이고, 시간요소가 전혀 없고, 즉각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객 이원적인 몸마음의 수행행위와는 전적으로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방편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최종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행위는 최종 깨달음 목표와는 직접적인 인과(因果)관계가 없으므로,

수행방편을 과감하게 끊어 버려야지 최종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원적인 수행행위에 집착하여 그것만을 계속 붙들고 놓지 않으면, 일원적인 목표를 들어가는데 방해물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이래 많은 깨달은 스승들은 수행에만 매달리지 말고, 마음넘어로 즉각 넘어가라고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흔하게 나타나는 일은 아니지만,구도자의 능력이나 근기에 따라서는 ,이러한 돈오에 대한 가르침에 의해서 즉각 깨닫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즉각 깨닫지는 못해도 우리들은 그런 돈오 가르침을 항상 마음 속에 담고 준비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와같이 즉각 깨칠 날이 올것입니다. 

 

大方無隅; 네모난 것이 크면 마치 모서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方;네모, 隅; 구석,모서리,모퉁이

네군데가 각이진 네모의 넓이가 아주 광대하다면, 마치 네군데 모서리가 안 보여서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고 아는 것은 어떤 조건화된 한계에 있다는 것이죠.

무한하게 큰 것은 인간 감각기능으로는 감지가 되지 않읍니다.

그래서 무한한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는 것이죠.

무한한 것은 경계와 모양이 없으므로 "無"(없는 것) 라고 하며, 무언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알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인간 육체감각기능과 정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면, 좀 더 그 육체감각과 정신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숭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만든 "神"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조차도 그것이 어떤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려진다면, 그 상상력으로 그린 개념과 그림조차 더 넘어서는 것이 또한 있을 수 밖에 없죠.

그렇게 자꾸 새로운 개념과 상상을 끝없이 초월해서, 모든 개념과 의식이 하나로 합일될 때까지 무한하게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무한하게 전개되는 초월성 자체가 바로 절대참나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지 않아도, 지금 여기에 바로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말과 생각을 넘어서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그것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로 합일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말과 모든 개념이 사라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大器免成; 그릇이 거대하면 가득 채워지는 것이 끝나지 않으며,

免; 벗어나다.벗다,해산하다. 成;이루다,이루어지다.끝내다.

무한하게 큰 그릇에는 완전히 속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계가 없이 무한하게 전개 되는 도의 수용성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절대바탕의 무한한 수용성과 일정한 모양에서 벗어난 무형상을 표현한 것 같읍니다.

왕필본에서는 <免>자가 <晩>자로 바뀌었읍니다만, 왕필본의 <晩-늦다>자로 해석을 하면, 앞 뒤에 있는 다른 문장과 조화가 맞지 않아서 백서본의 <免>자로 수정해서 해석햇읍니다.

 

大音希聲; 소리가 너무 크면 잘 들리지 않소이다.

希;드물다,적다,바라다. 聲; 소리

큰 소리는 귀의 수용능력을 초과하므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리가 크게 강하면 귀막이 찟어 질 수도 있겟지만, 또한 진동수가 높은 초음파 소리는 사람의 귀로도 들리지가 않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일정 진동수 한계 내에서만 들을 수 있을 뿐, 아주 낮은 초저주파 음과 초고주파 음은 사람의 귀로 들리지가 않지만, 그 소리에너지는 분명히 귀로 들리는 소리보다도 더욱 강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감각기능과 의식은 일정 조건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天象無形; 하늘의 생김새는 모양이 없으며.

하늘은 모양이 없고, 그 크기도 알수 없는 무한입니다. 

이 문장도 왕필본에서는 <大象>으로 되어 있읍니다만, 백서본의 <天象>으로 바꾸었읍니다.

곽점본도 <天象>으로 되어 있읍니다.

왕필본의 <大象無形>은 위의 여러문장에서도, 큰 것은 안보이고,알수 없다는 뜻의 문장들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왕필본이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 같읍니다.

그래서 백서본과 곽점본에 공통되는 <天象>으로 해석했읍니다.

 

道褒無名; 무한하게 펼쳐진 道에는 붙힐 이름조차 없소이다. 

褒; 크다,넓다. 

道는 무한하게 넓어서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무한하게 큰 도는 보이지 않으므로 이름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고 넓어서 이름을 붙히지 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일원적인 절대無이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 부르는 순간,관념적인 도가 되어 버리며,

道라는 이원적인 개념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에 실재하는 도에는 이름을 붙힐 수가 없다는 것이죠.

왕필본에는 <道隱>- 숨어있는 도,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앞에 서술한 문장과는 조화가 맞지 않으므로, 백서본에 있는 <道褒>로 바꾸어 해석했읍니다.

곽점본에는 이 문장이 지워져 있어서 전해내려오지 않읍니다. 

 

夫唯道善始且(善)成; 그러므로 오직 道는 내면의식과 하나됨으로 바르게(善) 시작하는 것이며, 또한 내면과의 하나 됨을 바르게 이루는 것이외다.

夫唯 ; 그러므로 오직

善; 옳바르게,일체성.전체. 夫; 대저,대체로 이러하니,그러므로, 唯; 오직, 且; 또한

위의 여러문장에서 묘사했듯이 도는 무한하게 크므로 알수도 없고,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의식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결국은 하나로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善始>라는 바르게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도덕경에서 <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떤 뜻으로 썻는가를 지난 장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읍니다.

제2장에 보면 善에 대한 정의가 간단하게 나오는데, <善>이란 주객의 이원적이고 상대성의 착함이나 옳바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와 하나가 된 일체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육체 동일시를 벗어나 의식과의 동일시상태를 말합니다.

전체가 하나된 내면상태를  도덕경에서는 <善>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착한 마음"이나 "옳바른 행위"가 아니라, 완전히 내면의식과 일체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육체 동일시된 이원화 의식을 보편적 의식으로 동일화 시키라는 말과 같읍니다.

따라서 <善始>란 완전히 의식과의  동일화 상태부터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육체가 자기라고 여기는 육체마음을 버리고,마음 넘어의 "모름상태"로 바로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말입니다.

즉 내면의식 속으로 곧바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깊은 내면 속에 있는 도의 본체에 이르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왕필본에서는 <善貸>라고 되어있읍니다만,- 도를 옳바르게 빌린다-라는 말은 전혀 끝맺는 말로써는 전체내용과 어울리지가 않으므로, 백서본의 <善始>로 바꾸어서 해석했읍니다.

또한 <且(善)成>이라는 문장에 괄호안의 (善)자가 생략된 것으로 판단하여 글자를 삽입해서 해석해 보니, 완벽하게 전체 의미가 되살아났읍니다.

즉 도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육체마음의 동일시를 버리고,마음 넘어의 전혀 알수없는 내면 속에서 시작하면, 결국은 더 깊은 내면에 있는 절대바탕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 사람들이 수행한다는 것은 이원적인 몸마음의 동일시상태에서 어떤 관념이나 호흡,화두,만트라 등등의 외부의 대상에 집중하는 이원적인 수행들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 도덕경에서는 직접 처음 시작할 때부터 육체 동일시를 버리고, 마음 넘어 미지의 내면의식과 하나가 되어 수행을 하면, 또한 그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