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죽음에 대한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무한진인 2009. 5. 30. 15:18

 

 

 

<본글은 이전에 이미 올렸던 글입니다만, 요즘-- 죽엄에 대한 슬픈 감정에 젖어있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죽엄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깨달은 스승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省察(살펴보기) 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글을 다시 올려 봅니다.>

 

 

방문자 ; 제 외아들이 며칠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읍니다,

그런데 많은 도인들의 훌륭한 가르침들이 있지만,

저는 제 아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철학적 신념에 의해서도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읍니다.

저만이 아들을 잃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고, 또한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는 있읍니다.

그러한 비극적인 곤경에 닥쳤을 때에는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그런 일상적인 방법으로 저는 마음의 위안을 구해 왔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잔인한 운명이, 한창 팔팔하게 살아야 할 젊은 저의 아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생각만 하면 다시 슬픔이 복받쳐 올라 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저는 저 자신에게 계속 되물었읍니다.

선생님, 저는 제 슬픔을 도저히 견뎌 낼 수가 없읍니다.

 

마하리지 : (잠시동안 눈을 감고 침묵하고 있다가)

(개인적인) "나 자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도 일체 없읍니다.

또한 나는 여러분들 모두에게 비춰진 나자신을 봅니다.

그대는 친척이나 친구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동정의 말을 받았을 것이므로

분명히 나를 찾아 온 것은 그런 동정의 말을 듣고 싶어서 온 것을 아닐 겁니다.

 

사람들은 일상 삶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면서 한해 한해 살아 나가지만,

한번도 진실된 관점에서 자기 삶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진실된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가 없으면 "너"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도 절대로 있을 수가 없읍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여,

이러한 이해와 더불어 삶의 용기를 가지고 자기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봐요,친구분, 그대는 이러한 용기를 가질수 있겠읍니까?

아니면 그 귀한 외동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비탄 속에서 슬픔에 몸부림만 치고 있어야  하겠읍니까?

 

방문자 : 마하리지님, 죄송합니다.

마하리지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말씀을 듣고 있으니 놀라움에 충격을 받았읍니다.

제 존재에 대한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그렇게 힘 주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을 보니,

그것이 제 삶에 있어서 귀중한 황금 열쇄인 듯이 여겨집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읍니까?

제가 지금 해야 될 일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한-다?, 하다니요? 전혀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읍니다.

오직 일시적이며 덧없는 것은 덧없는 것으로,

비실재적인 것은 비실재적인 것으로,

그리고 거짓된 것은 거짓된 것으로만 본다면,

그대의 실제적인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는 조금전에 그대의 비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는데,

그대는 그 비탄에 마주쳐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애써 보았읍니까?

 

자기가 그토록 아끼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슬픔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죽음이란 마지막 완전히 끝남이요, 소멸이기 때문에 슬픔은 어쩔 수가 없겠죠.

그러나 이 불가항력적인 슬픔조차도 그것을 지성적으로 잘 분석해 보면,

그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정확히 무엇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읍니까?

처음으로 아들을 보기 시작한 때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대와 그대의 아내가 그대들의 아들이라는 특정 육체를 하나 가지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특별한 어떤 운명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누군가와 합의 한적이 있읍니까?

그 아들을 임신한 그자체가 우연스런 한순간이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 태아가 자궁 속에서 많은 위험한 조건들을 넘기고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도 또 다른 우연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또한 그 아기가 사내아이였다는 사실도 우연한 일이 였읍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대가 그대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우연히 일어난 한 사건의 이미지 였고, 그 사건에 대해서 그대는 아무런 제어력도 가지지 못했으며, 이제 그 사건의 이미지가 종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정확히 그대는 무엇에 대해 슬퍼하고 있읍니까?

그대의 아들과 몇년동안 같이 살면서 누렸을 즐거운 경험과 수많은 고통의 추억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대 아들로 부터 받을 수 있었던 기쁨과 도움을 잃어버린 것이 아쉬워서 슬퍼하는 것입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왜곡된 관점에서 비롯된 슬픔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좀 더 깊히 들어가 볼 수 있겠읍니까?

 

방문자 : 정말로 충격적인 말씀이십니다.

마하리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라가 보겠읍니다.

이 모든 것이 왜곡된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하리지 : 아, 이제 진리로 다가오는 것 같읍니다.

그대는 한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진리라고 이해해야 하며,

그 개인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은 단순히 상상으로 만들어진 환영(幻影)일 뿐이며, 자아(自我)는 이 환상의 희생물 입니다.

'사람'이란 (환상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진리(참나) 안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읍니다.

사람이 있다는 것,사람이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자아, 의식입니다.

 

보는 관점을 바꿔보시오.

세계를 그대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보지 마십시요.

그대는 그대라고 상상하는 사람을 그대 의식 속에 나타나는 전체 현상세계, 즉 꿈의 세상 안에 있는 일부분으로 보고, 그 세상의 쇼 전체를 (마음 밖에서) 멀리 떨어져서 지켜 보아야 합니다.

그대 자신을 육체-마음과 동일시 하는 한에는 그대는 슬픔과 고통으로 상처를 입고 말 것입니다.

마음의 밖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아버지도 있을 수 없고,아들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며,

지금 여기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 접촉해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오직 육체와 마음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공간과 무시간인 참나는 어떤 경험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읍니다.

 

이 세상에 그대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거나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기만 한다면,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연극이나 스크린에 비쳐지는 영화장면들을 보듯이,

감탄하고 즐기면서 그리고 괴로워하기도 하겠지만, 

깊은 내면 바탕은 언제나 냉철하고 흔들림없이,

그것들로 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켜 보고만 있을 것입니다.

 

                                                                                - N  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