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찾는 자가 바로 찾고자 하는 그것이다.

무한진인 2009. 1. 4. 13:33

 

 

 

질문자 : 의식이 시간에 속박되어 있다면,

"나"라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있으므로 ,

또한 영원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하리지 : 육체가 있는 한에는 이 의식이 그대에게 있겠지만,

일단 육체와 의식이 사라지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머물다가 가버린 그 밑바탕이 그대의 본래 상태입니다.

그대의 본래상태는 변함이 없고 영원합니다.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대가 "그것"이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모두들 "그것"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주체인 그대가, 그대 자신을 한 대상으로 취급하여  찾아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대는 그대가 찾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특정 자세를 취하는 순간에 두려움도 있읍니다.

구도자의 신분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구도조직의 전통적인 법식에 따라야 하는 속박과 제한에 묶일 수 밖에 없읍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모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육체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동일시가 있는 한 나의 직접적인 공격이 계속 될 겁니다.

육체마음과의 동일시를 벗어버리기만 하면, 부라만(신)이 그대의 발밑에서 엎드려 절을 하며 나타날 것입니다.

 

질문자 :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것은 갑자기 돌발적으로 일어납니까?

아니면 점진적으로 일어납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일 그대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면 점진적이겠지만,

마지막 단계는 그것이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그것이 일어날 때에 그대는 나타난 현상세계와 나타나지 않는 비현상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둘은 하나이고, 아무런 차이도 없읍니다.

 

진실한 앎(眞知)은 모든 가능한 개념들이 포기될 때에만 다가오는 것이며,

내면으로부터만 나올수가 있읍니다.

 

파라부라만(절대)에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읍니다.

그것은 영원하지만,

반면에 이 의식은 시간에 속박되어 있으므로 시작과 끝이 있읍니다.

 

마치 그대가 새벽에 잠에서 저절로 깨어나서 그대가 있다는 앎이 오는 것처럼,

똑같이 이것(깨달음)도 그렇게 일어납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깨어 났지,

만일 내가 없다면, 어떻게 내가 깨어날 수 있겠읍니까?

 

절대(파라부라만)에게 그것이 스스로 있다는 앎이 다가 오는데,

의식은 파라부라만이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도구입니다.

절대(파라부라만)은 그대의 영원한 상태이지만,

그대는 그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그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고, 그대는 그것을 알고 있읍니다.

의식이 있으면, "나"에 대한 의문은 전혀 일어나지 않읍니다.

- 그것은 그냥 있읍니다.

 

생명기운은 곡물 속에 잠재적으로 들어 있읍니다.

그 생명기운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떤 특정형태 안에 제한시켜서  조건화시키지 마십시오. 

이 존재성은 그대가 그것을 한주먹에 웅켜 붙잡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공과 같은 전체 현상계이며, 모든 것의 넘어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심오한 이야기는 정신적인 놀이에 지나지 않읍니다.

그대가 명상 속으로 좀 더 깊히 들어가게 되면,

"내가 있다"가 바로 신 또는 무한한 우주의 영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그 "내가 있다" 역시도 의식의 놀이에 지나지 않읍니다.

나의 이 모든 이야기가 개념적인 오락일 뿐입니다.     <11. 7. 1980.>

 

                                            -Prior to Consciousness, Nisrargadatta Mahar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