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란짓트 마하리지

"내가 있다"존재의식은 가장 원초적인 환상이다.

무한진인 2008. 12. 19. 19:51

 

 

 

질문자 : 제가 진실한 본성인 "내가 있다"를 명상하고 있을 때에는 원인을 알수없는 사랑의 감정이 전체에 펼쳐지는 것 같읍니다.

이러한 느낌은 진아의 상태 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자아의 지복상태 입니다.

그대는 "내가 있다"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읍니다.

그대는 개념과 환상등 모든 것을 잊어 버리게 됩니다.

아무 조건화도 없는 순수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지복상태는 그대가 대상들을 잊어 버릴 때에 나타나는데,

그러나 그 지복감 안에서는 아직도 자아의 미세한 접촉이 약간 남아 있읍니다. 

결과적으로 그것도 아직 개념적인 상태입니다.

 

그대가 외부세계는 환상일 뿐이라고 여기며 실증을 느끼게 되면

그대는 홀로 있으려고 할 것이고,

그대의 진아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높은 상태의 체험이겠지만, 지금은 아직 마음수준에 놓여 있읍니다.

 

진아는 즐거움도 없고 불쾌감도 없읍니다.

그것은 "나"라는 느낌이 없읍니다.

환상이 완전한 망각(忘覺)된 상태는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며,

無(nothing)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침묵이며, 그대라는 실체는 전혀 없읍니다. 

이것이 깨달음 또는 지혜(眞知,반야)라는 것입니다.

자아가 없는 진아의 깨달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대를 부른다면, 그대는 "나, 여기 있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그대는 있었읍니다.

환상은 실재(實在)에게 어떤 것도 더 이상 줄수가 없읍니다.

실재는 만물의 밑바탕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바탕인 실재에게 색다른 어떤 것을 부가해 줄수는 없읍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대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대상들은

오직 실재(實在,바탕)로 인해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무지와 깨달음이란 있지도 않읍니다.

그것들은 원래 없읍니다.

 

그런데 그대가 그것에 대해서 무슨 표현을 할 수가 있겠읍니까? 

그대가  어떤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경험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대가 약간의 존재감을 느낀다면, 곧 그것은 아직 무지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대는 본래 진아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대가 사랑의 느낌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좋읍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어떤 한 상태이며,

그  어떤 상태라는 것은 항상 어떤 조건화에 한정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非조건화 상태를 무상(stateless, 無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환상이 존재하지 않는 체험상태라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미묘한 것인데, 無知든 앎이든  둘 다 남아 있지 않읍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어렵긴 하지만, 

만일 그대가 진실로 깊히 탐구하게 되면 그대는 그 조건화 되지 않은 무상(無相)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 있고, 항상 있어 왔지만,

그대는 그것을 알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본체가 없는 곳은 단 한점조차도 있을 수가 없읍니다. 

그대는 대상들을 통해서 절대본체의 존재를 체험하지만,

이 모든 대상들은 無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펼쳐져 있지만,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읍니다.

왜 볼 수가 없겠읍니까?

그대가 실재(實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대가 그대 자신을 볼수가 있겠읍니까?

그대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그대 앞에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행복이란 그대 내면에 있지, 밖에 있지 않읍니다. 

깊은 잠속에서 그대는 행복합니다.

그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세상에 대한 망각 속에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있는 그대로 있으면서 이 현상세계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파괴하지 않지만, 세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대가 이세상 속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든간에 열심히 하십시요.

그러나 이러한 진리을 명확히 이해하고 확신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초연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느끼고, 지각하고, 성취한 것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환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이라는  것을 그대의 마음이 제대로 받아 드려야만 합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無인데, 어떻게 이 아무것도 아닌 無가 그대에게 영향을 주거나, 그대를 건드릴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마음은 그대에게 영향을 주고 그대를 건드린다고 말합니다.

그럼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마음이란 앎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앎과는 별도로 다른 것이라고 구별짓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세상은 無 입니다.

이세상은 환상 입니다.

오직 실재(實在)만이 존재하는데,

그대가 환상을  환상으로 옳바르게 이해 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그환상이 그대에게 영향을 줄수가 있겠읍니까?

어떻게 여전히 그것이 그대에게 영향을 준다고 느낄 수가 있겠읍니까?

 

연꽃잎은 물을 마시며 물 속에서 살지만, 물에 젖지 않읍니다.

만일 그대가 연꽃 잎에 물을 붓더라도 잎파리는 물에 젖지 않읍니다.

그대가 無만이 남아 있다고 이해할 때에는 더 이상 사랑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느끼는 자아의 지복감은 아직 앎에 대한 기분좋은 느낌일 뿐 입니다.

 

맨처음에 그대는 그것에 대해 자각하여야 하고,

그런 다음 그대는 본체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바로 본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지만 아무런 위해도 당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를 건드리지도 않읍니다. 

 

연꽃은 물속에 머물러 있지만, 물에 대해서 어떤 걱정도 하지 않읍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대는 그대의 본성을 체험해야 합니다. 

내가 체험이라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 나오기 이전의 그곳, 空 넘어, 제로(0) 넘어를 이르는 것입니다.  

 

말로써는 이진리를 뚫을 수 없으며, 절대상태에서는 말이 끊어집니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 말을 넘어선 곳, 그곳이 나의 실재하는 상태다"

그는 왕이었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無라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그대는 모든 것이 無라는 것과

無가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無가 그대를 건드린다고 느끼고 있다면,

아직 그대는 환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초월한 곳이 철학의 최고 정점(頂点)이며,

그대는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읍니다. 

그곳은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으며, 모두가 오직 하나 일 뿐입니다. 

이원화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데, 無는 그것의 밖에 있읍니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 머물러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두 아이가 다른 한 친구에게 장난을 치며 놀려주려고 합니다. 

둘 중의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챙피를 주지만,

그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웃기만 합니다. 

세번째 아이가 언짢아 하면서 말합니다.

" 저 애가 너헌테 챙피를 주는데 어째서 가만히 웃고만 있는거냐?"

그는 놀이의 속임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웃고만 있었지만,

세번째 소년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속세에 살고 있는 깨달은 진인은,

이 모든 사람만상이 無일 뿐이며,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이든지 無이며,

지금 일어나려고 하는 일들도 모두가 無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읍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과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두려워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하고 막연한 두려움을 갖읍니다.

그들은 싸우기도하고 즐기기도 합니다.

이 모든 속박의 형태는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존재는 (현상세계의) 경계 밖에 있읍니다.

모든 것이 無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읍니다, 단순히 무지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다 속으로 깊히 잠수한 사람만이 진주를 찾아 낼 수가 있읍니다. 

수면 위에 남은 사람은 고통과 쾌락의 파도에 휩쓸립니다. 

그대는 깊히를 알수없는 심연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 심연 밑바탕이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의 경계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금자체는 장신구의 모양과는 관계없고, 장신구 자체에 있읍니다.

 

금이 개나 신의 조형물 속에 있을지 모르나, 그 모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읍니다.

이와같이 그 형태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읍니다.

그대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그대는 모든 것으로 부터 별도로 떨어져 있읍니다.

 

마음은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한 지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지금 그대의 상태는 환상입니다.

본성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에게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읍니다.  

더 이상 얻고 잃는 것이 없읍니다.

 

만일 그대가 진리를 성취할수 있을까 라고 묻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그대가 진리 그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성취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가집니까?

 

맨 처음에는 (현상세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으로 부터 벗어나서 그대의 진아 속으로 깊히 몰입하시오.

뒤로 물러서게 되면,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그것이 됩니다.

 

그대가 지금 설명한 상태는 의심할 바 없이 아주 훌륭한  상태이지만,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마음이 받아 들일 때에, 그 환상을 벗어납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진아 속에 있을 겁니다. 

육체와 마음은 환상입니다.

그대는 그것을 아는 것으로 행복해져야 합니다. 

모든 동일시를 포기 하십시요.

 

스승이 하고 있는 일이란 것은,

그대들이 별로 주의를 주지 않고 있는,

그대들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력의 실제적인 가치를 그대들에게 직접 드러내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지금까지 단순히 가치없는 돌맹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지만,

스승은 그것이 다이아몬드 같은 고귀하고 진실한 본성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스승이 그대를 가장 고귀한 돌로 만들어 줍니다.

 

"나는 우주 전체에 펼쳐져 있으며 전지 전능하다.

나는 이 모든 존재들의 창조자이다" 

그대가 모든 것의 바탕으로 있을 때에,

그대는 모든 것 속에 내재해 있읍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라 할지라도 나쁘다라고만 생각할 수가 없읍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간에 그것들은 바로 "내 탓"이라고 아십시요.

노예가 되지 말고, 주인으로써 있으십시요.

그대가 바로 이 우주전체의 주인입니다. 

                                                                                

                                                                                          -1996,6. 란짓트 마하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