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무엇인가?
그대는 누구인가? 이 육신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대가 깊히 잠들었을 때 뱀이 이 육신 위를 기어가도 모르는가?
그때 그대가 이 육신일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이 육신이 아닌 어떤 것임에 틀림없다.
가끔 그대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꾼다.
그때 그대는 (꿈속의) 어떤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대가 그 사람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잠에서 깨어 날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대는 그가 아니다.
더욱이 그대는 자신을 그와 동일시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분명히 그대는 꿈속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대는 그와 별개로 존재하는 자이다.
꿈없는 잠의 상태를 상기해 보라.
그때 그대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이 그대의 참된 성품일 수 있는가?
확실히 그대는 이러한 믿음이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그대가 있는 상태를 알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지의 어둠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 할정도로 그대가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인식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주위의 모든 사물과 구별되는데,
어떻게 그대 자신을 무지나 공백상태와 같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것이 어떻게 진실로 그대의 참된 성품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대가 "이 상태는 그 자신을 모르는 짙은 어둠의 상태이다." 라는 것을
'아는 자'로 남아 있는데,
어떻게 (주체인) 그대가 (대상으로) 경험했고 그렇게 치부한 그것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는 깊은 잠의 어두운 무지도 아니다.
그대는 그것 아닌 어떤 것이다.
이 거친 몸조차 그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대로 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어떤 것인들 그대일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이 거친 몸이 아닌 것 과 마찬가지로,
그대는 이 몸을 넘어선 그 어떤 대상도 아니고,
이 몸 안에서 꿈으로 보이는 그 몸(미세한 몸,마음,지성,)도 아니며,
깊은 잠이라고 불리는 무지의 형상도 아니다.
그대는 이 세가지 형상(육체,미세체,원인체 또는 생시,꿈,깊은 잠) 및 이 세계와는 별개인 것이다.
이 세가지 형상은 두가지 형상, 즉 다른 것을 대상으로 아는 상태와 자기 자신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귀착될 수 있다.
전자는 생시와 꿈의 상태를 포괄하는데, 이때 그대는 대상들의 인식자로써 존재한다.
반면에 후자는 깊은 잠을 나타내는데, 이때 그대는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없어 그대 자신조차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대의 모든 경험들은 이 두가지 상태 안에 포함된다.
그 둘 다 그대와는 낯선(다른) 것이다.
그대는 이 두가지 상태와는 별개인 어떤 성품의 존재이다.
만약 그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뚜리아, 즉 네번째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명칭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대가 경험하는 생시, 꿈, 깊은 잠의 세가지 상태는 그대에게 낯설며,
그대의 참된 상태는 이 셋과는 전혀 다른 네번째 상태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생시,꿈, 깊은 잠의 세가지 상태가 하나의 긴꿈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
네번째 상태는 이꿈에서 깨어난 것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것은 깊은 잠보다 더 안으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생시의 상태보다 더 깨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참된 상태는 생시, 꿈, 깊은 잠과 구별되는 네번째 상태인 것이다.
그대는 오직 그것 뿐이다.
이 네번째 상태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도 특정화 되지 않은 앎(知)이다.
그것은 또한 자각자체인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지도 않다.
다시 말해서 네번째 상태는, 어떤 대상도 의식하지 않지만 스스로를 완전한 자각으로 흡수하므로 앎의 찌꺼기가 밖으로 남아있지 않는 순수한 앎인 것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는다.
그대는 오직 그것일 뿐이다.
네번째 상태를 얻은 사람 앞에는 어떤 일이 놓여 있는가?
그 상태 안에, 즉 (대상에 대한) 아무런 특정한 앎(知)이 없는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무른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번째 상태를 깨달은 사람은 나중에 이 세계 안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세계가 전과 같지 않다.
그는 자신이 네번째 상태라고 하는 단일성으로써 깨달은 것이 "이 모든 것"으로 빛나는 것을 본다.
그는 이 세계(존재)를 그 단일한 (존재)앎과 별개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내면에서 본 것을 이제 다른 형태로 바깥에서 보는 것이다.
예전의 (생시상태로 지각한) 차별상 대신에 그는 어디서나 (본질적으로) 차별없음을 지각한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다.
그 자신과 별개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눈을 감고 있든, 뜨고 있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에게는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부라만 상태이다.
그대가 바로 그 참된 상태이다.
이 상태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으로'와 '밖으로'라는 말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모두가 하나다.
그의 몸과 말과 마음은 이기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들의 작용은 모두의 이익을 위한 은총의 작용이 될 것이다.
단편적인 '나'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의 에고는 결코 되살아 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여기서 해탈했다고 말해진다.
그는 몸이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이 죽는 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원하다.
그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신은 누구인가?
그는 은총이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단편적인 에고가 없는 자각(自覺)이다.
그러한 상태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깨달아야 만 한다.
베다에서는 그런 사람을 신을 깨달은 자로,
그리고 신과 하나가 된 자로 칭송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베풀 수 있는 (참된) 선은 이 차별상 없음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사실 이 외에는 어떻한 상태도 없다.
그 상태들은 무지의 상태 안에서 나타난다.
아는 자에게는 단 한 가지 상태가 있을 뿐이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 Ellam ondre(모두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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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말하길,
생시,꿈,깊은 잠의 상태를 주시하는 앎을 뚜리아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최종 깨달음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뚜리아 상태는 "내가 있다"는 앎일 뿐이다.
제 4의 상태인 뚜리아를 넘어서야 절대본체인 파라부라만에 도달한다.
뚜리아의 주시자 마저 그자체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