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의식의 겁질을 벗어나라.

무한진인 2008. 7. 11. 10:58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유일한 스승인

           스리 시다라메쉬와르 마하리지의 가르침(6)

 

 

부라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형태가 없다.

그것은 4가지의 모든 몸을 벗어 날때에 마지막 남아 있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상태를 의미한다. 

그 네가지의 몸이란 것은 물질적인 육체, 미세체(생기체),

원인체,그리고 초원인체,를 말한다.

자기 존재를 아는 자를 이스와라-신이라고 부른다.

존재 또는 앎 이전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실재(實在)한다.

 

육체내에 있는 이들 네가지 구조체를 넘어가면,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형태가 없으며,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본래상태 안에서 확고하게 안정되어 있다. 

그것은 어디로 부터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파라부라만,또는 안타카라나(가장 밑바탕)이라고 한다.

 

보는자,주시자, 잠자는 자와 보고 있는 자는 "이스와라", 즉 신이다.

그는 지성을 통해서 이해된 하나의 개념이다.

그가 잠을 잘때는 조용해진다.

자각상태를 체험하는 자는 잠속에서나 무의식 상태를 경험할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

왜 우리는 잠 속의 지복상태를 표현할 수가 없는가?

마음과 지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깨어 있을 때만 자기경험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 여인이 코걸이 장식품을 깊은 물속에 떨어뜨렸다.

그 여인은 한 남자에게 그것을 찾아 달라고 부탁해서,

남자가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곧 그것을 찾았다고 그녀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 남자가 깊은 물속 바닥에서 그장식품을 발견했지만,

그러나 그가 물속에 완전히 잠겨 있는 상태에서는 그 즉시로 그녀에게 명확하게

그 장식품을 찾았다고 알려 줄 수는 없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적(相極的) 관계이므로,

그가 물속(내면진아)에 있을 때는 불의 기운(氣運, 동적의식)이 없다.

그러므로 그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만,

그녀에게 그 코걸이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잠 속에서는 어떤 것도 표현 할 수가 없는데,

깊은 잠 속에서는 표현하기 위한 필수 장치(마음)가 없는 것이다. 

마음은 어떤 것도 접수하지 않으며, 그래서 어떤 것도 말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면서, 만일 그사람이 자기가 올라가고 있는 계단이 얼마나 올라왔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안두면, 그는 자기가 몇계단이나 올라왔는지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그가 계단을 올라간 것에 대해 전체적으로 알고 있다.

 

그(자아)는 잠자는 동안, 깨어있는 동안, 삼매상태 안에서도 항시 있다.

잠자는 것과 삼매상태를 경험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홀로 있다.

만일 그가 없다면 누가 잠에 빠져 있을 수가 있겠나?

그러므로 자아는 "의식"이며, 앎의 성질이고,

그이전에 있는 것이 절대인 파라부라만이다.

 

안타라트만(가장 깊은 내면의 진아)이 바로 "나"인 것이다.

그가 신이며, 항상 변함없는 그것의 본성은 의식(앎,眞知)이다.

그것들은 짐승일 수도 있고, 새일 수도 있으며,악마,귀신,라마,크리슈나 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들의 심장 속에 존재한다.

만일 그가 없다면, 모든 대상물들은 통나무처럼 죽어 있을 것이다.

그가 사라지면, 눈,코,귀, 등은 모두 쓸모없어진다.

그가 사라지면 모든 대상물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신에 의하여 그 모든 웅장한 삼라만상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가 가버리면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린다.

정신적인 이해와 함께 전세상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신(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신의 존재함으로 인한 것이다.

 

그(자아)가 있는한에는, 신, 악마, 습성등이 있다.

그러나 그가 떠나 버리면, 사람들은 육체와 접촉할 수 없다.

육체에게 신의 지위를 주는 것이 내면의 진아다.

육체를 가진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베다를 쓴 사람 또한 내면의 진아다.

이 내면의 진아가 일상사의 자질구레한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한에는,

그는 거친 육체일 수 밖에 없다.

만일 그가앎을 얻기 시작한다면,

그는 시바(의식)가 된다.

거친 육체와 의식이 둘다 사라진다면, 남는 것이 파라부라만(절대)이다.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 같은 날품팔이꾼이다.

만일 그가 사무보는 일을 하면, 그는 한사람의 사무원이다.

만일 그가 판사로서 일을 하면, 그는 한사람의 판사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으로 부터 물러나면, 그는 파라부라만(절대)이다.

네가지 껍질을 벗어나서, 無(空 또는 無知)가 있는데,

이것은 신의 본성이다.

 

한사람이 다신(多神)을 숭배하는데, 케샤바(비슈느신의 다른 이름)같은 신에 대한 숭배는 내면의 진아에게 직접적으로 숭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케샤바신(케-는 앎이라는 의미이고,샤바는 신체라는 의미)같은 경우에는 그 이름과 주재하는 장소가 둘다 육체(앎이 없는 신체)내에 있는 앎의 형태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 공양을 신에게 보여주는 예배의식 후에,

우리들 자신 스스로가 그 음식을 먹어 버린다.

 

만일 이 내면의 자아인 신을 세속적인 우상신(神象)으로 받들어 모신다면,

그는 살아있는 기간 동안만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자아를 위해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먼저 이 내면의 진아인 신상(神象)을 목욕해 주어야 하고,

그런 후에 백단목을 붙히고 옷으로 치장등을 하고나서,

그런 다음에야 사람들이 그것에 모든 것을 기원하며 신상에게 예배를 올린다.

 

모든 거친 육체는 실질적으로 말하고 걷는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지때문에 어린아이들처럼 돌로 신앙의 집을 짓고는 허황하게 그들자신 스스로 만든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물을 퍼 마시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작은 돌을 구하기도 하고, 또 다른 돌은 밥그릇으로도 쓰는데, 어떤 돌은 신으로써 보살피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숭배한다.

 

실질적인 신은 의식, 앎이다.

바보들은 우상을 숭배한다.

바보란 무지한 사람을 말한다.

아직 진아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그들자신이 우상 그자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각개 생명체, 유정물,무정물들이 예배하는 것은 오직 내면의 진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신상(神象)에게 예배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지한 육체적 존재인 것이다.

만일 그자신이 신이라는 전체적 이해를 가지고 예배를 한다면,

그는 시바 또는 앎을 지닌 사람이 될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숭배하는데,

깨달은 자는 신의신(이것은 자기 진아이다)을 깨달아서 그것을 공경한다.

상카라차리아는 내면의 자아,네개의 몸을 "원초적 환상"이라고 불렀다.

신은 무한한 개수의 이름을 가질 수 있지만, 진리는 하나다.

예를 들어서 만일 한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아저씨"라고 부른다면,

그 남자는 "아버지 자격"을 잃어 버린 것인가?

 

신(의식)의 중개로 사람들은 절대 진아의 자연적인 본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신(의식)이 안정된다면 그는 절대상태를 알게 될 것이다.

이신(의식)은 앎이라는 일종의 에너지같은 형태인데,

그것은 움직임이고, 물질적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계속적으로 부질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만일 이 속세의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면, 그는 자신의 본래상태로 남을 것이다.

비슈누 신(의식)이 열번이나 화신으로 되었다는 것은 그가 열개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화신(化身)으로 되는 것이다.

 

그가 신이 되면, 그는 그의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파라부라만(절대)는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신은 안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이들 두가지 특성을 알기 위하여는,

불변과 변함에 대한 "분별지혜"가 필요하다.

베다를 공부하는 구도자들의 지성은 이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수수께끼 풀듯이 한다.

 

이전체 우주의 근원은 내면의 진아이지만,

실질적으로 이세상의 근원은 "지각성(知覺性)의 싹틈(發芽)"의 양상으로써,

그것은 머리도 없고,꼬리도 없다.

한측면에서는 세상이 일어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소멸한다. 

 

만일 사물의 본성이 알려진다면, 내면의 진아는 사라져 버린다.

불변의 본질은 항상 있으며, 불변하지 않는 성질은 소멸된다.

고정된 것은 변화 없음을 수용하지만,

고정되지 않은 자아(의식)는 변화 있음을 수용한다. 

 

고정되지 않은 자아는 열망, 변화,욕구, 분노, 탐욕,자만 등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러한 자아로 나(내면진아)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만심이 부풀어질 수가 있고,

만일 그러한 자아로 나(진아)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슬픔에 젖을 수가 있다.

이것은 내면진아가 변화된다는 문제를 의미한다.

불변하는 것과 변하는 것을 똑같은 것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지적으로 빈약한 가난뱅이와 같다.

그런 사람은 오원소(地水火風空)의 그물안에 붙잡혀 있는 사람이다.

육체(에고) 넘어에 오원소의 원리인 마야(존재의식)가 있다.

 

베다의 핵심은 "그대가 그 원리이다"라는 것이다.

眞我는 네가지 껍질 몸의 넘어에 있다.

베다에서는 여러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부라만과 파라부라만은 태고시대이래로 수천만번의 투쟁과 논쟁의 결과로 증명된 결과인 것이다.

 

요가라는 말은 결합 또는 방편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파라마트마 이다- 자아자신이 다섯겹의 껍질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

 

* 음식의 껍질 ; 외피(外皮)라고 부를 수도 있는 가장 외부에 덮혀있는 껍질.이것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외부 밖앝쪽을 둘러싸고 있다.

이외피는 피와 살,뼈,털 등 유기물질로 구성된 생체적 육신을 말한다.

* 생기(生氣)의 껍질 ; 진아는 5가지 생기(푸라나)의 장(場)으로 덮혀있다.

* 마음의 껍질; 사고와 개념을 가진 마음의 껍질.

* 지성의 껍질; 분별적인 개념,나라는 에고 의지,등의 지성적인 껍질.

* 지복의 껍질; 잠, 휴식, 등, 불행을 만들어 내는 모든 요소를 잊어 버린 상태와 같은 지복감으로 이루어진 껍질.

 

만일 사람이 모든 것을 잊어 버린다면, 그것이 전체적인 지복이다.

사람이 모든 슬픔을 잊어 버리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에고는 행복을 어디서 찾는가?

답은 전체적 망각(忘覺) 속에서 찾는다.

사람은 잠속에 있을 때는 모르고 있으므로 행복감을 느낀다.

 

나라다(인도신화 속의 성인이름)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는 거치른 욕계, 미묘한 색계, 인과의 무색계,라고하는 삼계전체를

두루 돌아 다닌다.

이 마음은 신을 찬양하기도 하고, 논쟁과 싸움 속으로 들어 오기도 한다.

그는 항상 그의 손에 동냥 그릇을 들고 다닌다.

동냥그릇은 그의 밥통(위장)이다.

사람이 회사에 출근 할 때나 신에게 찬송을 부르는 예배당에서나

미스터 마음이란 놈은 함께 딸린 동냥그릇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확실하다.

 

진아는 모든 상태의 넘어에 있다.

위의 다섯가지 껍질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삼백 그리고 삼천만 신들은 최정상 위에 있다.

모든 신은 육체를 구제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에고의 스물다섯가지 원리, 다섯가지 껍질, 그리고 세가지 특성(사트바,라자스,타마스)이란 것은 카시의 나라(육체) 속에서 거주하고 있는 삼백 그리고 삼천만 신들을 상징한 것이다.

 

다섯겹의 껍질을 벗어 버린 후에는,

이 육체라는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신인 비슈와나스를 만날 수가 있다.

그래서, 여기 이것 자신(육체),그것은 그대를 위한 신성한 곳이다.

미세 우주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대 우주 속에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앞으로 무한량의 논쟁을 전개해야 만 할 것이다.

거친 육체기관은 나타내 보여지거나 말로 묘사 할 수가 있는 것이며,

거친 육체를 통해서 하는 대화들은 무엇이든 간에

단순히 말의 범위 안에서만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이다.

 

신의 실재적 본성은 어떤 것이며, 비실재란 어떤 것인가?

대답은 바이렛(Virat)-오원소로 조합되어전 "큰 하나"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미묘체(바이렛)는 삼백 그리고 삼천만의 신,-부라마, 비슈누 마헤쉬,를 말한다.

이 미묘체를 히란야가르바 라고 부른다.

그리고 원인체는 아부야크루트- 비현시된 것이며,즉 원시적 프라크리티(기본 존재의식)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이전을 말한다.

이것이 존재이며, 의식적 지복,- 이것이 신의 상태로 나타난다.

 

육체적 에고는 거친 물질적 육체, 미묘체, 원인체, 그리고 초원인체,라는 이름의 네가지를 가지고 있다.

세번째 것까지는 설명될 수가 있다.

네번째의 초원인체가 성취되어야 할 목표이다.

 

땅으로부터 육체가 나왔다.

거대우주(바이렛트)- 당신은 육체가 신의 일부분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외부에 있는 대기와 육체 안에 있는 숨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공기를 그대의 것, 나의 것이라고 따로 따로 분리해서 부를 수가 있겠는가?

공기는 오직 하나다.

 

욕망과 감각들이 마음에 소란을 일으킨다.

신성(神性)은 달이다.

마음(달)은 스승(해)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것은 신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달(마음)은 해(스승)에게 배반했다고 벌을 받는데,

그것은 바로,살아가다가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에,

아예 해로부터 자아에 대한 앎(眞知)을 얻을려고 하지 않는다.

 

육체감각(에고)들은 인드라신을 이르는 것일 수도 있다.

비는 마시고 싶은 욕구를 의미한다.

신에게 헌사물을 바치는 것은 좋은 음식을 차리고 그것을 먹는 것을 말한다.

그런 다음 비가 내린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마시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은 성장하고, 사람의 감각이 드러난다.

마치 비가 오면 지면의 모든 생물이 성장하는 것과 같다.

성인 가우탐은 감각들 중에서 가장 높은 감각을 상징한 것이다.

우아한 모습의 아일라(그의 부인)은 육체를 상징한다. 

두신이 모두 같은 표현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찌바(육체)와 시바(의식)은 하나이다.

찌바(육체에고)는 부라만(우주의식)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찌바는 네가지 몸을 가지고 있고, 시바도 네가지 몸을 가지고 있다.

8가지 몸 또는 원초마야는 불변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원초적 본성이다.

파라부라만(절대)는 무엇이든 간에 말로써는 묘사할 수가 없다.

일시적인 신이 이스와라이며, 신의 헌신자 역시 일시적인 것이다.

이들 두가지는 일시적이며,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찌바(에고)와 시바(의식)는 무지(無知)라고 한다.

 

이것들을 가지고 진아를 찾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것들이며, 허황된 거짓들이다.

이것을 아는 자 또는 이것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을 아는 자는

홀로(진아로써) 다아니이며, 깨달은 진인이다.

 

                                                                     -Amrutla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