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노자도덕경

노자도덕경28장, 외면을 알고,내면에 머무르면 천하의 모범이 되오.

무한진인 2008. 7. 10. 11:26
 

 

[원 문]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지기영 수기욕 위천하곡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위천하곡 상덕내족 복귀어박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지기백 수기흑 위천하식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박산칙위기 성인용지 칙위관장

故大制不割

고대제불할

 

 

[ 해 석 ]

 

밖으로 향하는 마음(外向性)을 알아차리고

안으로 향하는 마음(內向性)을 지키고 있으면,

세상의 낮은 곳에서 자유로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되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되면,

순일(純一)하고 보편적인 마음(德)이 항상 떠나지 않으므로,

간난아기처럼 순진무구함을 회복하게 되오. 

 

영화로움이 덧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욕되고 비천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세상의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골짜기처럼 되오.

 

세상의 낮은 곳에 있는 골짜기처럼 되면,

순일하고 보편적인 마음(德)이 항상 충만해 있으므로.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처럼 오염되지 않은 순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오. 

 

밝게 깨어있는 앎(意識)의 외면을 알아차리고

어두운 모름(無知)의 내면을 지키고 있으면,

세상의 기준으로써, 모범적인 法道가 되는 것이오. 

 

세상의 기준으로써,모범적인 법도가 되면,

순일하고 보편적인 마음이 항상 변하지 않으므로,

본래의 참 본성인 무극(無極)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외다.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처럼 순수하고 단일한,

보편성의 마음이 널리 퍼져서 ,

사람마다  적재적소에서 재능을 발휘한다면, 

성인은 이것을 활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데 으뜸가는 규범으로 삼을 것이오.

 

그러므로 넓게 다스리는 제도에서는

세세하게 개별화로 나눠서 규제하는 법은 없을 것이외다

 

 

[ 해 설 ]

이번 28장의 기본 내용은 밖으로 드러난 에고적인 속성을 알고,

드러나지 않은 내면에 머물러서, 순수하고 단일한 보편적인 마음이 되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내면에 머물러 있으면 절대 본체인 무극에 도달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보편적 의식에 안정되는 방편으로 세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사람이 외향성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수동적인 마음으로 내면을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알아채고, 그런 화려한 영화를 포기하고 천하고 낮은 위치를 지키는 것이며,

셋째는 외면에 밝게 드러난 현상세계가 무상한 것임을 알아차려서, 어둡게 드러나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내면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지키면 세상의 시냇물처럼 자유롭고, 가장 낮은 골짜기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며, 이세상의 기준이 되는 보편의식에서 항상 떠나지 않으므로,최종 절대본체인 무극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보편적 마음이 일반화 되어 널리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적재적소에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면,

개별적인 분별이나 차별화가 없이, 세세하게 나눠서 법과 규제를 집행할 필요도 없으며,

道의 보편성에 입각해서 자연스럽게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가 운용된다는 것입니다.

 

이장은 곽점본에는 없고 백서갑본과 을본에는 나와 있읍니다.

백서본과 왕필본의 차이는 글자 몇개가 좀 다르지만 기본적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중간에 한두문장의 배치순서가 바뀐 것이 있읍니다만, 전체적으로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읍니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知: 알다.인지하다.느끼다.깨닫다,분별하다.보다.보아서 알다.다스리다.드러내다. 其; 그것 ,

雄;수컷, 守;지키다,보호하다.爲;되다,하다. 谿;시냇물,산골짜기,텅비다.

 

知其雄; 밖으로 향하는 마음(外向性)을 알아차려서

守其雌; 안으로 향하는 마음(內向性)을 지키고 있으면,

爲天下谿;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시냇물이 된다.

 

知는 "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보아서 알다" 또는 "지켜본다" 또는 "자각한다"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雄자의 글자 뜻은 "수컷"이라는 의미이지만, 의식적인 측면에서 마음이 밖의 대상으로만 향하는 외향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숫컷은 생긴 모양이 밖으로 향해서 톡 튀어 나왔죠. 

항상 밖을 향해서 무엇인가를 쫏아다니는 외향성(外向性)의 마음을 숫컷이라는 말로 상징화 한 것입니다.

마음이 밖으로 향한다는 것은 욕망을 위한 추구, 적극적인 행동성, 대상에 대한 집착, 자만감,자기과시등의 마음이 외부 대상으로 향하는 경향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밖으로만 치달리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말이 知其雄이라고 표현했읍니다.

즉, 마음이 외부의 대상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외부에 있는 욕망대상을 향하는 외향성은 에고적 개인성의 특성이죠.

따라서 에고성인 개인적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린다는 말입니다.

수컷이라는 의미는 마음의 적극성, 능동적이며 외향적인 에고의 특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외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의 고요한 내면이죠.

마음은 외면과 내면이 있는데, 외면은 대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내면은 항상 고요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죠.

따라서 마음이 외면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 알아차리는 자는 내면의식이므로, 내면을 지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守其雌에서 '암컷을 지킨다'라는 말은 '마음의 내면에 머물러 있다'라는 뜻입니다.

암컷은 생긴 모양이 안으로 쏙 들어가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가 않읍니다.

즉 마음의 내면 깊은 속을 향하고 있는 내향성을 암컷으로 상징화한 것입니다.

또한 암컷이라는 말은 여성적인 수동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마음을 수동적으로 지키라는 것이죠.

내면의 수동성이란 행위가 아니고, 말없는 주시작용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외면을 지켜보면 내면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되는데,

마음이 항상 내면에 머물러 있으면 세상을 위하는 시냇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냇물이란 가장 낮은 곳에서 저절로 흘러갑니다.

즉 인의적인 행동이 없이 무위자연적인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억지로 어떤 의도적인 행동을 유발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시냇물이 저절로 흘러가듯이 무위로써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가장 낮은 곳,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천한 곳을 흘러다니지만,

온갖 세상에 여러가지로 도움을 저절로 준다는 의미로 '시냇물'이라고 표현한 것 같읍니다.

 

또한 좀 다른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읍니다.

知其雄,守其雌; 마음의 능동성을 알아서, 수동성을 지킨다.

즉 마음의 적극적인 활동성을 자각하고, 수동성을 지킨다, 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읍니다.

이 경우는 마음의 활동성을 잘알아서 수동적인 자세를 지키면 무위적인 도에 들어간다는 것이죠.

능동성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에고적인 마음을 자각한다는 것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은 "에고인 나"가 아닌 보편성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숫컷인 능동성은 "개인적인 에고 나"를 의미하며, 

암컷인 수동성은 "보편적인 의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구도자가 모든 면에서 수동성을 지향해야 된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사항입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무엇인가 자기의 노력으로 어떤 정신육체적인 성과를 얻을려고 남성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수행행위를 합니다.

물론 수행초기에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수행의 기본 목표는 여성적인  수동성으로 행위자가 아닌 주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남성적이라 함은 능동적인 행위자 의식으로 에고적인 특성이고,

여성적이라 함은 수동적인 주시자 의식으로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보는 자세를 말하며, 억지 노력을 한다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이며 "나라는 에고성"만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나라는 에고성"을 약화시키고, 의식의 근원인 보편의식이 되려면 우선적으로 수동적인 자세가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 수동적인 자세가 바로 위 원문에서 말하는 <守其雌>라는 "여성적인 면을 지키라" 또는 "내면을 지키라", "수동성을 지키라"라는 구절입니다.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

常;늘,변함없이, 離;떠나다,떨어지다. 復;회복하다,다시.歸: 돌아오다.

於;어조사(에),따르다,가다,있다. 嬰;간난아이,兒; 아기

 

爲天下溪; 이세상에서 가장 낮은 시냇물처럼 되면,

常德不離; 항상 순일한 보편적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復歸於嬰兒; 간난아이처럼 순진무구함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시냇물은 땅위에서도 가장 낮은 곳을 흐르면서 자유롭게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으며 모든 곳에 스며들고, 모든 생명체에게 도움을 줍니다.

시냇물 자체는 어떤 의도성도 없이 자연의 힘으로 저절로 무위적으로 흐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만 흐르지만, 항상 자연적인 작용으로서 순수성과 보편성을 벗어나지 않는 시냇물처럼, 수동성을 지키고 있으면 항상 덕인 순수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상태는 마치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아이 의식같이 순진 무구한 마음을 회복한다는 말씀입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간난아기의 마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전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과 전체성의 바탕마음 그대로 입니다.

그 바탕은 성장해서도 그대로 밑바탕에 오염되지 않고 있읍니다.

아무리 거대한 국가의 독재 통치자나 흉악한 살인강도범이라도 그사람의 간난아기시절에는 어느 누구나 할것없이 똑 같은 순수한 마음이었읍니다.

그런데 흉악범의 마음이나 거대한 국가의 독재자의 마음이나 그 내면 밑바탕에는 어른으로 성장을 한 뒤에도  간난아기 때의 그 순박한 마음바탕을 그대로 지니고 있읍니다.

다만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오염된 두터운 업습과 욕망들이 순수한 바탕의식 위에

두껍게 덮어 쒸어져 있으므로 깨끝한 바탕의식이 감추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 젖먹이 아기시절의 바탕마음이 바로 보편성인 것이며,순일(純一)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간난아이 처럼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문장은 구도자가 일상사에서 마음의 중심을 사용하는 방편을 말한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외면을 향하지 말고 내면을 향하라는 충고죠.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지기영 수기욕 위천하곡)

 英;영화,꽃피다,성하다,기세좋게 한창 일어나다, 이름이 드러나다. 융성하다. 빛나다, 즐기다. 辱;욕되다,수치스럽다.모욕당하다,거스르다,잃다.실패하다,가장자리. 谷; 골짜기.깊은 골.

 

知其榮; 영화로움이 (덧없음을) 알아차리고

守其辱; 욕되고 비천한 곳에 머물러 있게 되면

爲天下谷;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는 마음이 된다.

 

榮자는 꽃이 한창 화려하게 만발할때의 무성함을 의미하죠.

영예,명예,사회적 성공이 드날리는 한창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창 사회적인 명예와 영광스러움을 드날리는 한때(메뚜기도 한철)가 일시적이며, 한순간 지나가는 꿈과 같은 허무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知其榮이라고 묘사했읍니다.

그러한 영화로움이 잠깐동안 지나가는 꿈과 같다고 여겨서 깨어 있다면, 그 야망의 꿈 속에 빠지지 않고 그 꿈 넘어에서 지켜보며 초월해 있는 것이죠.

그 화려한 영화로움이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자각하여 ,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며 이름없고 비천한 가장 낮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천시하는 명예도 없고  비천한 낮은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어떤 차별이나 분별력 없이  너그럽게 수용하는 자연의 산골짜기와 같은 순수한 마음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귀영화나 세속적인 명예등에 대한 욕심과 야망을 전부 포기하고 가장 비천하고 낮은 곳에 머문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서본에서는 이문장이 약간 글자가 다릅니다.

백서본- 知其白 守其辱; (명예가) 빛남이 알게되면, 비천하고 낮은 곳에 머므른다.

왕필본과 다른 부분은 백서본의 <白>자가 왕필본의 <榮>자로 바뀐 것인데, 白자가 "빛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왕필본의 榮자에서 "명예로움" "빛난다"와 같은 의미가 됩니다. 

 

이 知其榮 守其辱의 문장은 왕필본에서는 세번째 순번으로 문장배치가 되어 있지만,여기서는 백서본과 같이 두번째로 배치하였읍니다.

왜냐하면 첫번째의 知其雄 守其雌,는 사람의 일상적인 기본 마음자세를 말한 것이고,

두번째의 知其榮 守其辱,은 세속적인 야망과 욕망에 대처하는 마음 자세에 대한 것이며,

세번째인 知其白 守其黑은 의식의 현상화 측면에서 현상과 비현상, 앎과 모름에대하여 말한 것으로, 첫번째와 두번째를 통틀어서 종합적으로 취합하여 강조한 중간 결론적인 문장이라고 보아야 되는 것이죠.

왕필본에서 知其榮 守其辱 문장을 세번째로 바꾼 것은 復歸於樸 과 樸散則爲器의 두문장을 樸이라는 글자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 같읍니다.

그러나 백서본에 원래 있는 순서대로 문장을 배치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것 같읍니다.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위천하곡 상덕내족 복귀어박)

乃; 이에,이와같다. 足; 넉넉하다, 충만하다,채우다, 樸;통나무,꾸밈없이 순수하다,순박하다.

 

爲天下谷; 세상에서 낮은 골짜기가 되면

常德乃足; 순일하고 보편적인 마음으로 충만해 있으므로.

復歸於樸;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같은 오염되지 않은 순박한 마음으로 되돌아 온다.

 

위에서 사회적 명예와 부귀 영화로움이 덧없음을 잘 알아서, 항상 명예와 영화로움에서 벗어난 천하고 낮은 곳에 머무르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낮은 골짜기란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며, 분별이나 차별을 하지 않는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수용성을 말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세속적인 욕심과 야망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서, 

홀가분하게 자유스러운 마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德이란 道에서 직접 비추어진 오염없고 자비로운 보편적인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집착이나 욕심이 없으면 산골짜기처럼 모든 것이 저절로 흘러드는 너그럽고 자유로운 마음이 충만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비로운 마음이 충만하면 원래 본성인 순수한 의식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간난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나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같은 순박한 마음"이나 다 같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보편적인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무위적이며 모든 것을 수용하는 보편성을 말합니다.

위의 문장은 세속적 야망과 욕심을 포기하라는 내용이죠.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지기백 수기흑 위천하식)

式;법,본받다,기준으로 삼다.

 

知其白; 밝게(白)깨어있는 앎의 외면을 알아 차리고

守其黑; 어두운(黑) 모름의 내면을 지키고 있으면,

爲天下式;세상의 모범적인 法道가 된다. 

 

여기서 <白>이라는 것은 의식이 깨어 있을 때에 생시상태의 밝은 앎을 말하는데,생시상태에서는 이세상을 알수 있고, 자기자신의 몸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신이 또렷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의식이 밝게 깨어 있는 상태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 아는자는 의식이 밝게 깨어 있기 이전에 머물러 있읍니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 밝게 깨어있는 것을 아는 자 또는 주시자는 의식이 나오기 이전에 머물러서 지켜보고 있는 자이며, 바로  깊은 내면속의 밑바탕에 있는 무지(無知)인 <黑> 입니다.

따라서 그 의식이 나온 근원인 내면(黑)에 머물러서 지키고 있는다는 것이죠.

이렇게 내면에 머물러서 지키고 있으면 이 세상 전체의 기준 또는 모범적인 법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최상의 法道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法>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이와 비슷한 뜻이라 볼 수 있읍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이세상도 함께 의식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또 저녁에 깨어있는 상태에서 깊은 잠에 들면 그사람은 의식안에 있던 세상만사도 없어지고 자기자신조차 모르는 (의식은 있지만) 마음의 부재 속에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잠이 들었을 때나 깨어 있을 때에 그 내면 바탕에는 잠이 들지도 않고 깨어 있지도 않지만, 잠보다도 더 어둡고 깊으며 , 생시의식 보다도 더 밝게 깨어있는 우리들의 본래바탕이 內在해 있읍니다.

그것은 우리가 잠드는 것을 알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저절로 압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내면 바탕이지만, 그것은 평상시 생시상태와 같이 알려지는 것은 아니죠.

앎의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앎의 스크린을 비추어주는 빛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있는 의식으로는 알수가 없읍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식 이면에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앎을 알게 해주는 근원이지, 앎 위에 나타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상에 드러나지 않지만 항상 변함없이 있는 것입니다.

이 깊은 내면상태에 머물러 안정되게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깨닫는 문이며, 도의 본체, 無極으로 들어가는 문없는 문(無門)인 것입니다.

이 無極인 절대 본체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의식의 앎을 넘어가서, 의식의 뿌리인 무지(無知)의 모름(黑) 속에서 안정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알려진 것(白)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모름(黑)에 머물러서 지키고 있으면, 그 모름을 넘어서 근본바탕(무극)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知其白 守其黑,은 첫번째 문장인 사람의 마음자세를 말한 知其雄 守其雌 와

두번째 야망의 포기를 말한 知其榮 守其辱, 을 총합해서 의식적인 측면에서 의식표면인 앎(白)과 의식의 내면인 모름(黑)으로 크게 나눠서 묘사한 것입니다.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忒; 틀리다,의심하다,변하다. 式;법,식,제도,기준으로 삼다,사용하다.

 

爲天下式 ; 세상의 기준이 되는 모범적인 법도가 되면

常德不忒 ; 순일하고 보편적인 마음에서 변화하지 않으므로

復歸於無極; 참 본성인 무극으로 되돌아 온다.

 

앎으로 드러난 현상의식(白)을 지켜보는 비현시인 내면의 모름(黑)상태에 안정되게 머물러 있으면, 이세상의 모범적인 법도가 되어, 항상 순수하고 두루 펼쳐진 보편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결국은 도의 본체인 무극상태에 이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고 들리고 아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그런 알려진 것들이 어디로부터 발생했으며,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되는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별로 없읍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깨어 있는 한계 내에서만 의식 위에서 알려진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잠을 자든가,정신을 잃었다든가, 죽었다면 이세상이 알려질 수가 없죠.

이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은 자기자신이 있다는 것이며,

자기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마음이 깨어 있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즉 나라는 느낌이 바로 의식의 한 단면인 앎의 느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이 깨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아는 앎이 어딘가로 부터 비쳐져서 나왔기 때문에 그것이 깨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 깨어있는 앎 의식이 어디로 부터 어떻게 해서 비춰지는가를 그근원으로 찾아들어가다 보면, 그 앎의 빛 자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앎 자체 속에서는 표면적인 앎의 느낌이 없읍니다.

그것을 우리는 일체를 모른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전체적인 모름마저 넘어가면 앎과 모름의 의식이 나온 근원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 의식의 근원이 바로 나라는 느낌이 나온 뿌리이며, 

그 의식의 근원을 넘어선 상태가 전체성의 眞知가 나오는  無極, 도의 본체라는 것입니다.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박산칙위기 성인용지 칙위관장)

散;흩어지다, 나누어지다. 則;곧, 본보기로 삼다,법,~할때에,~한다면,~이라면. 器;그릇,도구,재능, 적재적소에 사용하다. 官;벼술,기관,일,본받다.나라를 다스리는 일, 長;길다,어른,으뜸,처음,늘,중요함.

 

樸散則爲器;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같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마음이 널리 퍼져서 ,사람마다 적재적소에서 재능을 발휘한다면,

聖人用之; 성인은 이것을 활용하여,

則爲官長; 나라를 다스리는데 으뜸가는 규범으로 삼는다.

 

<樸>이라는 것은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 통나무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단일한 의식을 말합니다.

<散>은 퍼져서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樸散>은 순일한 보편의식이 세상전체로 펼쳐져서 사람마다 나눠져서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則爲器>는 적재적소에서 사람들이 재능을 발휘한다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칙>은 ~한다면,의 의미로 번역했읍니다.

그러므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보편의식은 그것이 퍼져서 사람마다 다 각자에게 나눠지게 되어, 사람들 마다 적재적소에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면,

성인은 이기회를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를 그 순일한 보편의식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순수의식은 바로  의식의 단일성,전체성,순수성,자비,진,선,미,德 등을 말하는 것이죠.

성인은이 단일한 보편성 의식을 나라를 다스리는데 으뜸가는 법도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연의 무위적인 작용으로써 전체가 하나이며, 모두가 평등하고 순수한 보편의식을 모범으로 삼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를 운용한다는 것이죠.

인의적인 규제가 없이, 자연법에 의해서 無爲로써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故大制不(無)割(고대제불(무)할); 그러므로 넓고 크게 다스리는 제도에서는 개별적으로 분리해서 규제하는 것은 없다.

制;절제하다,억제하다,바로잡다.법도,규정,천자의말, 割; 나누다,베다,끊어버리다.가르다.

 전체가 하나라는 보편적 입장에서 크게 다스리는 제도는 개별적인 경계로서 따로 따로 분별해서 규제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 사람이 모두가 하나의 보편성으로 보는 것이지 별도로 분리된 개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평등하고 전체적인 도의 입장에서 무위행으로 통크게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나이며, 하나가 전체(보편성)라는 것입니다.

 

백서본에서는 <故大制無割>인데,

왕필본에서는 <故大制不割>로 바꿔져 있읍니다.

<無>와 <不>은 그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여기서는 백서본의 <無>로 번역을 했읍니다.

 

이번 28장의  다른 번역서들을 보면,

한문글자의 뜻을 옥편에 있는 그대로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에(예를 들어, 암컷,숫컷,백,흑), 한글로 번역한 내용을 읽어보면,한글로 읽으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번역한 내용은 상징적인 뜻풀이까지 직접 해석문에 반영하였기 때문에 번역문장이 좀 길어지긴 하지만, 읽는 중에 상징적인 속뜻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노자도덕경 문장의 특징인 문장의 간략화가 다소 손상된 감도 없지 않아 있읍니다만,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좀 자세하게 의역(意譯)을 병행해서 풀어 놓았읍니다.

바쁜 일상 삶 속에서 홀로 진리 탐구를 열망하고 있는 분들에게 지성적으로 나마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랜시간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