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17,18장, 최상의 도는 자연 그대로 있는 것이다.
[원문]-17장
(1) 太上 下知有之
태상 하지유지
(2) 其次 親而譽之
기차 친이예지
(3) 其次 畏之
기차 외지
(4) 其次 侮之
기차 모지
(-4)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부족언 유불신언
(-3) 猶(悠)兮 其貴言
유혜 기귀언
(-2) 功成事遂
공성사수
(-1) 百姓皆謂我自然
백성개위아자연
[원문] -18장
大道廢 有仁義
대도폐 유인의
慧智出 有大僞
혜지출 유대위
六親不和 有孝慈
육친불화 유효자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혼란 유충신
[해석]
道와 일체가 되어있던 태고시대엔
사람들이 그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소.
시간이 흘러 도에서 떨어진 후에는
그것과 친해지고자 神으로써 찬양하며 공경하였소.
그후 세월이 흘러가 道에서 더 멀어지자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소.
그후 더 긴세월이 흐르니 그것을 아예 잊어버려서
도를 업신여기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소이다.
(道를 업신여기게 됨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리고,
불신만 남아있게 되었소.
(道를 두려워 하므로서)
사람들이 요리조리 눈치만 보며 겉치레 말만 귀하게 여기게 되었소.
(道와 가까이 친해지려고 공경하고 찬양하며 기리는 것을),
사람들은 세속적인 성공과 자기사업을 이루기 위한 기복적 수단으로만 이용하게 되었소.
(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태고시절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르길 "나는 스스로 있는 그대로 일 뿐이다"라고 여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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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인 大道가 없어지니,
그대신 인간관계에서 仁義(어짐과 옳바름)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람들의 의식에서 내면의 순수한 지혜가 나가 버리니,
대부분이 거짓된 껍때기 마음만을 지니게 되었으며,
가족들간에 화목해지지 못하므로서
효성과 자애라는 도덕적 규율을 내세우게 되었고,
나라가 혼란해지므로서
충신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외다.
[해설]
이번 17장은 어려운 한자나 까다로운 문장이 별로 없어서 비교적 쉬운 문장처럼 보이지만,
노자도덕경이라는 책이 그리 만만하게 풀어지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읍니다.
노자는 이 17장의 문장에서 아주 희안한 비밀을 하나 감추어 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서,
-어디 요놈들, 어떤 넘이 그 문장을 제대로 풀 수가 있나, 보자- 이렇게 싱글거리며 쳐다 보는 것 같읍니다.
노자는 이장에서 희안한 문장구성으로 재미있는 트릭을 구사했읍니다.
말하자면 문장의 순서를 바꾼 것인데, 한마디로 문장을 가지고 노자 도인께서 지리박 4박자를 한스텝 밟고는 발자국만 남겨두고 아뭇소리 않고 사라진 것이죠.
4박자 트롯트 스텝을 밟아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첫발을 서울이라고 한다면,
서울- 대전-대구-부산, 찍고- 턴(돌아서) 부산-대구-대전-서울, 이렇게 해서 한스텝의 4박자를 돌면 출발했던 서울에 다시 원위치 되는 것이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위의 원문에 각문장 앞에다 제가 일련번호를 붙혀 놓았읍니다.
1,2,3,4의 각문장은 자세히 보면 之라는 연결조사가 맨끝에 붙어 있읍니다.
이 之의 연결조사는 뒤에 문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1,2,3,4의 각문장과 연결된 문장들은 순서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로 연결되어 있읍니다.
즉, 1과-1, 2와-2, 3,과-3, 4와-4, 이렇게 연결된 것인데,
본문의 문장 순서는 1,2,3,4,-4,-3,-2,-1 순서로 배치가 된 것이죠.
따라서 太上에서 시작한 스텝이 1,2,3,4까지 갔다가 다시-4로 돌아서,-3,-2,-1순서로 한바퀴 돌아서 다시 太上으로 돌아온 것이죠.
그래서 노자도인이 4박자 지리박 한스텝을 밟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각 문장의 앞머리만 먼저 반바퀴 돌고, 뒤돌아서서 다시 문장의 꼬리 쪽을 붙히면서 되돌아 오는 형식입니다.
문장의 위치는 다르지만1-1,2-2,3-3,4-4,가 같은 내용으로 연결된 문장인데, 문장 순서를 바꾸어 배치해 놓은 것을 노자도덕경 역사이래 왕필 주석서부터 이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읍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서 해석을 하면, -4,-3,-2,-1,의 4개문장을 순서대로 해석하면 아무리 말과 뜻을 연결하려고 해도 앞뒤가 안맞기 때문에 억지로 문장을 지어내서 해석을 해야 되는 것이죠.
그럼 왜 노자 도인께서 이러한 상식에 어긋나는 문장배치를 했을까요?
제가 추측하는 바로는, 앞장 16장에서,
天道員員 各復歸其根(하늘의 도리는 돌고 돌면서, 만물은 각자 그근원으로 되돌아 오네)
라는 문장이 있읍니다.
즉, 모든 만물은 절대본체로 되돌아 온다는 메세지입니다.
노자 도인이 이러한 돌고 돌아서 그 절대근원으로 되돌아 온다는 메세지를 문장의 배치를
돌고도는 형태로 배치하여 말없이 트릭(장난)을 한번써서 가르쳐 준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즉, 절대본체의 무위자연적인 太上시대부터 시작하여
세월이 지남에 따라 道를 잊어 버리고, 神을 숭배하는 종교성이 되었다가,
다시 더 타락하여 지성적인 인간이 되었다가,
더 타락하여 물질적인 욕망의 세계에서 헤메다가,
다시, 지성적인 인간을 거쳐,
도를 숭배하는 종교성에서,
무위자연의 최고도인 太上시대로 되돌아 온다는 내용을,
말없이 문장의 배치를 이용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현상은 절대본체를 중심으로 돌고 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17장의 내용은,道의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처음에 무위자연적인 태고시대의 "있는 그대로"인간 삶에서,
道나 神을 숭상하는 종교의 시대로,
그 다음은 지성적인 관념의 시대로,
그 아래는 물질적 타락의 시대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또 18장은 왕필본만 분장이 되어 있고
백서본이나 곽점본은 17장,18장이 하나로 되어 있으며,
18장은 17장에 대한 결론적인 문단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즉, 사람들이 도를 잃어 버림으로써,
인의적인 仁義 사상과 효성과 자애,충신 같은
관념철학과 규율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읍니다.
이제 본문을 해석해 보겠읍니다.
太上 下知有之;
도와 일체가 되어있던 태고시대엔
사람들이 道(神)가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소.
太上;
太자는 옛날에는 大자와 같은 "크다,넓다,하나"등의 뜻으로 사용했읍니다.
上은 "높다"는 뜻이죠.
그래서 太上이란 道의 관점에서는 "가장 높고 넓은 하나"인 "道의 본체인 절대진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물질적 사회 측면에서 인간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은 국가최고 권력자인 왕이라고 할 수가 있읍니다만,
노자도인이 항상 이야기하는 기본 주제는 道에 관한 것이니깐, 해석상으로 道의 관점에서 보아야 되겠지요.
관점에 따라서는 태상을 몇가지로 해석될 수도 있겠읍니다.
첫째는 大道, 즉 道의 절대본체 또는 절대진아가 된 道人을 의미할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전체내용은 道에서 부터 떨어져 나온 한 인간이 어떻게 도에 대한 자세가 단계적으로 타락해 가는가를 묘사한 내용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읍니다.
둘째는 도와 하나됨이 일반화 되던 태초의 태평시대, 즉 모든 사람이 무위적인 삶을 살던 시대로 해석 될 수가 있읍니다.
그리스도교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앎의 과일을 따먹기 이전의 태초시절 인류의 무위자연시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大道가 사라진 시절을 네단계별로 나누어서 사람들이 道에 대한 자세가 타락해 가면서 인간의식의 사회적 변화과정을 묘사한 내용으로서 해석 될 수가 있읍니다.
여기서는 이 태초의 순진무구한 道의 시대부터 세월이 흘러 道를 이루려는 열망이 퇴색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인간본성을 잃어버린 인간사회가 스스로 타락하는 과정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18장의 결론적인 문장 구성과 적절하게 조화될 것 같읍니다.
셋째는 최고의 통치자의 자질에 따라서 아래사람들이 최고 통치자를 대하는 내용으로 해석 될 수가 있읍니다.
대부분의 주석과 해석서들은 이 최고의 통치자로 해석하고 있읍니다만,
이런 해석은 풍자적인 측면 또는 비유적인 측면에서 응용적으로 해석해 볼 수는 있겠지만,
道의 관점에서는 옳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왕필본의 18장 내용이 일반사회,국가사회,가족 관계에 있어서,
무위자연적인 道가 소외된 인간사회가 인의적인 개념사회로 변천해온 것을 통합해서 결론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이17장의 내용은 18장 의 첫머리에 나오는 大道廢라는 문장으로 짐작해 보아도 기본적인 道에 관련된 의미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읍니다.
그외에도 풍자나 응용적인 측면에서 정치권력자, 어떤 회사나 조직의 최고 관리자, 또는 집안의 어른, 또는 한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 등으로 비유해서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는 있을 겁니다.
특히 정치가나 권력자에 대한 충고적 비유로써는 아주 써 먹기가 안성마춤인 문장일 수도 있겠읍니다.
여기서는 노자도인이 항상 기본적으로 말하는 태초에 도와 일체가 된 인간세상으로 부터
점점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도에서 멀어지면서 인간이 타락해 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해 나가겠읍니다.
참고로 곽점 죽간본이나 백서본은 모두 大上으로 표기했읍니다만,
太上이나 大上이나 같은 뜻을 지닌 단어 입니다.
下知有之 ;
下는 무위자연과 하나로 살던 道의 태평시대의 백성들,또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입읍니다.
또한 下는 절대본체의 바로 직전에 있는 사람 또는 절대본체인 大道의 아랫단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大道를 이룬 도인세상의 백성들이라고 볼 수도 있읍니다.
下知有之는 "내가 있음"을 아는 존재의식상태로서, 태초시대 세상사람들의 마음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최상의 道와 하나가 되어있던 태고시절 사람들은 "오직 전체로써의 하나인 道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의미라고 보아야 겠읍니다.
무위적인 존재자체로서 "있는 그대로"를 안다는 뜻입니다.
<무위 자연의 시대>또는 <전체가 하나 된 道의 시대>를 말합니다.
其次 親而譽之; 세월이 흘러 道와 떨어진 후에는 사람들이
道(神)와 가까이 친해지고자 찬양하며 공경하였소.
親;친하다,가깝다,사랑하다. 譽;기리다,찬양하다.
그 다음 시간이 더 흐른 후에 道와 더 멀어지자 사람들이 道와 친근하게 접촉하고자,
道人을 공경하고 神처럼 기리게 된다는 것이죠.
道가 신격화하게 되는 시대이며, 道를 神格化한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이죠.
자신을 전체와 따로 분리시켜서 개체화되는 과정에서 전체와 가까워지려고 신에 대한 찬양과 제례의식으로 전체(道)와 접촉하는 것입니다.
道 또는 神을 자신으로부터 객관화시켜서 자기와 별도로 떨어진 대상으로서 여기면서
신에게 기도하고 예배하는 종교시대의 단계입니다.
道가 변해서 <신이 지배하는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其次 畏之 ; 더 세월이 지나서 道와 더 멀어지자 사람들은
道(神)를 두려워하게 되었소.
畏;두려워하다,꺼리다.
그보다 더 시간이 흘러서 사람들이 道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자, 신앙마저 미약해져 믿는 것이 없으니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겁을 먹게 되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道가 자신의 내면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외부의 우주를 주재하는 큰 신이라고 여겼는데 , 그것마저 믿음이 약해져서, 도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자신이 전체에서 분리된 단순한 개인이라는 개체화 개념이 더욱 강화되는 것입니다.
신과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지성과 이념과 말이 지배하는 시대>로서 개인성이 더욱 강화 된 상태가 볼 수 있읍니다.
其次 侮之; 그후 더 세월이 지나서 道와 더 멀리 떨어지자 사람들이
道를 아예 업신여기게 되었소이다.
侮;업신여기다, 조롱하다.
세월이 더 흘러가니 실제적인 도인을 찾아 볼 수가 없고, 도에 대한 허황한 개념적 언어와 사이비 도인들만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니, 도의 실제적인 상태에 대한 믿음이 아예 사라지면서 도를 업신여기며 진지한 구도자를 향해서 비아냥거리기나 하는 사회풍조가 되어 버린 것이죠.
도라는 전체성을 환상이라고 규정하고 나타난 현실의 물질적 삶에만 최고가치를 두어서
전체성(道)의 가치관은 사라지고 극도로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개인성만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극도의 개인주의와 물질욕의 이기주에 젖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읍니다.
바로 요즘시대 인간들의 현재상황입니다.
<무력과 물질적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其次 侮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도를 업신여기며 조롱하는 것은)
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짐으로서 이에 불신만이 남게된다.
도의 본체에서 완전히 떨어져서 추락하여, 도를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상태가 되면,
도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끊어져서 불신하는 마음만 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道란 전체성을 말하며, 모두가 하나라는 사랑과 평등성 등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죠.
오직 이기적인 에고성만이 무성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가장 낮은 네번째 단계인 其次侮之에 이어져서 서술된 내용입니다.
곽점본과 백서본에는 信不足 安有不信,으로 되어 있어, 왕필본은 필사과정에서 焉(安)자의 배치가 잘못 되어진 것 같읍니다.
인류가 태곳적 도의 시대를 잊어 버리고, 대신 신을 모시는 종교의 시대를 거쳐서,
지성의 시대를 지나서, 이제 마지막 물질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는시대를 묘사한 것이 이문장입니다.
권력,재력,학력,실력,외모,권모술수등 육체적 삶에 필요한 능력만이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것이 되고,
그런것 들만 추구하다 보니, 내면적인 자기 본성에 대하여는 완전히 잃어 버린 것이죠.
이러한 외면적이고 물질적인 면만을 추구하다 보니, 내면의 도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잊어 버리고,
내면적인 가치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道라는 말만 들어도 마치 이상한 벌레를 대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바로 < 물질적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의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其次 畏之) 猶(悠)兮 其貴言 ;
(도를 두려워하는 것은) 눈치를 보면서 그말만 귀하게 여긴다.
猶; 망서리다,머뭇거리다,눈치보다. 悠; 멀다,아득하다,근심하다.
왕필본의 '멀 悠'자는 원래 곽점본과 백서본에는 '오히려 猶'자로 되어 있는 것인데,
내용이 연결이 잘 안되어 보이니깐 아마도 멀悠자로 수정한 것 같읍니다만,
여기서는 원래의 곽점본과 백서본에 있는 글자인 망서린다는 의미의 猶자로 고쳐서 해석하겠읍니다.
그래야 전체의미가 원래대로 맞추어지는 것 같읍니다.
오히려 猶자는 원숭이가 머뭇거리며 이리저리 눈치보며 망설이는 모양을 묘사한 것입니다.
세번째 道에서 타락한 단계인 其次畏之에 이어져서 서술된 문장입니다.
도를 실질적으로 수행하거나 열망하지 않지만, 눈치를 보면서 말만 귀하게 여기고 지성적인 개념만 귀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두뇌만 발달하고 가슴은 좁아진다는 말씀과 같읍니다.
지성(知性)이 발달될수록 실재 道와는 멀어지는 것이죠.
관념과 이론, 허황한 언어적 개념의 논쟁만이 난무할 뿐 실재적인 진리는 사라진 상태입니다.
무위자연적인 道가 神으로 바뀌어서 종교화되고,
다시 종교에서 만들어낸 개념이 지성적으로 변하면서 이론적이며 관념적인 학문과 문자가
발달되는 <지성과 이념의 시대>가 지배적인 시절을 말합니다.
(其次 親而譽之) 功成事遂;
(道와 가까이 친해지려고 공경하고 찬양하며 기리는 것을)
사람들이 세속적인 성공과 자기사업을 이루기 위한 기복적 수단으로만 이용하게 되었소.
道와 친근해지고 찬양을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속세의 출세와 복을 받기 위해서만 도와 친해지려하고 도를 숭상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욕망을 이루고 자기 하는 일을 성공하기 위해서만 道(神)를 숭배하는 것이죠.
道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 버리고, 道를 외부神으로서 대상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부에 있는 神으로써 공경하며 기도를 들이면서, 그 신으로부터 물질적인 복락과 세속적인 성공,그리고 사업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빌던가,전쟁에 이길 수있게 도와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죠.
이것은 첫번째로 타락한 其次 親而譽之,에 연결된 내용입니다.
이 문장은 무위자연적인 道에서 벗어나서 道를 神으로 대체해서 종교가 나타나는
<종교의 시대>또는 <神이 지배하는 시대>로 변화된 상태를 묘사한 것 같읍니다.
(太上 下知有之) 百姓皆謂我自然;
(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태고시절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르길 "나는 스스로 있는 그대로 일 뿐이다"라고 여겼소이다.
皆;모두,다, 謂;이르다, 我; 나
전체가 하나인 무위자연적인 삶을 살던 태고시절을 묘사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개인적인 욕심과 야망이 없이 전체와 하나로서 살던 시대죠.
인의적인 어떤 규제나 개념도 없이 자연 그대로 평화롭게 살던 인류태평시대에
사람들은 그자체가 전체 자연의 일부분으로써 아무런 바램과 의도없이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 그대로 일뿐이다"하는 말이죠.
바로 이러한 무위자연적인 상태가 도의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이것이 태초의 <무위자연시대>입니다.
(18장)
왕필본에서의 이18장으로 분장된 부분은 원래 곽점본이나 백서본에서 17장과 하나로 연결되어
위의 17장 전체 내용에 대한 사회, 가정,국가조직을 예를 들어 적용한 결론적인 구절인데,
왕필본에서는 둘로 나누어 버렸읍니다.
아마도 왕필본 필사자가 18장을 따로 나누어서 반유가적(反儒家)인 개념을 따로 분리하여
명확하게 구분하고자 분장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곽점본과 백서본에서는 이것이 위의 17장 마지막에 故(그러므로)로 연결이 되어 있읍니다.
(故)大道廢 有仁義;
(그러므로) 대도(大道)가 없어지니 인의(仁義)가 생겨나게 되고,
大道란 무위자연적인 道의 절대본체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무위적 도를 잊어 버리니, 사람과 사람들이 개별성들이 강해져서 인간 관계에 있어서 상호경쟁과 갈등이 일어나면서 사회전체가 혼란스럽게 되므로 인간관계에서 평화롭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의적으로 관념적인 규율과 법칙을 만들어야 했읍니다.
그래서 자애로워야 된다는 仁의 개념과 옳바름(義)이라는 정신적 자세의 도덕개념을 인의적(人依的)으로 만들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질서가 무너져서,
어쩔 수 없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 할 수 있는 仁義라는 도덕적 규율을 억지로
만들어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慧智出 有大僞 ;지혜가 나가자 큰 거짓이 생기게 되었다.
慧智는 도의 절대본체에서 나오는 순수하고 전체적인 앎이죠.
개체적인 분리감이 없는 전체적인 앎을 慧智(밝게 비추는 깨달음) 또는 智慧라고 하는데, 바로 도의 절대본체를 아는 순수한 존재의식이라고 보면 되겠읍니다.
이러한 순수한 지혜가 사라지자, 無知라는 큰 거짓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大僞라는 큰 거짓이 바로 육체가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無知상태를 말합니다.
이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육체가 자신이라고 여기므로서, 전체와 일체인 참나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따로 떨어진 개체라고 느끼면서 道로부터 분리된 것이죠.
바로 이러한 자신이 하나의 별도개체라는 관념이 無知이며,
위에서 말하는 가장 거대한 거짓, 허위라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서를 보면 -지혜가 나오니,큰 거짓이 생겨났다,-고 해석을 했는데,
出자를 내면적인 입장에서 "나갔다",라고 한 것이지, 외면적인 입장에서 '나오다"라는 뜻이 아니죠.
이 부분의 문장은 곽점 죽간본에는 없고, 백서본과 왕필본에 추가 삽입된 문장입니다.
六親不和 有孝慈 ;육친이 화목하지 못하니 효성과 자애가 있게 되었다.
六親이란 夫母兄弟妻子, 즉 6戚을 말하죠.
가족간에 화목하지 못하니깐 효성이라는 개념과 자애라는 개념을 인의적으로
만들어 그것들을 억지로라도 지킬 수 있도록 규율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죠.
전체가 하나로 여기는 무위 자연적인 道에서는 이러한 인의적인 규제와 규율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가 혼란스러우면 충신이 생겨난다.
태평스러운 국가에서는 충신이 있을 필요가 없겠지만,
국가가 위기와 혼란상태에서는 저절로 나라를 구하려는 충신이 나타나겠죠.
충신과 義人이란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저절로 나타나는 상대적인 존재죠.
이모든 인간세상에 질서를 잡기 위한 관념적 도덕규율이란 원래 있는 도의 본체로부터 벗어나서
사람이 별도로 떨어진 개체라는 기본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피상적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무위자연적이며 전체가 하나가 된 도의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저절로 조화롭게 펼쳐나가는데, 인의적인 모든 관념적 규율이나 규제가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道로 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18장의 기본 가르침입니다.
위의 17장은 본래 道의 무위자연시대에서 시간의 변천에 따라 점점 타락하는 과정을 묘사한 내용으로 해석을 했읍니다만, 또 다른 측면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읍니다.
한가지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자면 도의 측면에서 네가지 부류의 사람들로 설명할 수 있겠읍니다.
[최상승의 절대본체에 근접된 진지한 구도자 부류는 도가 있음을 알아서
"있는 그대로"의 무위자연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아래 종교적인 부류사람들은 道 또는 神을 대상으로 여기며,
예배하고 찬양하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단순히 자신들의 세속적인 성취를 위해서 예배한다.
더 그아래의 지성적인 부류는 도에 대해서 어느정도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나,
관념적인 이론과 지성적인 언어로써 도를 이해하려고 할뿐이며,
도에 대한 믿음이 없고 단순히 지성적 욕구나 학문적 명성,출세를 위해서 연구한다.
더 그아래 도와 완전히 떨어진 물질적 욕망에만 관심있는 부류의 무지한 사람들은
아예 도를 업신여기며, 道(神)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아예 없고, 오직 불신만 가지고 있다.]
이상의 네가지 부류사람들은 모든 세상사람들이 그 비율은 다르겠지만 대개는 한사람이 네가지 면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어느 면에 치중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각자 속성이 다르게 보이겠죠.
이글을 보시는 여러분들은 자신이 어떤 부류에 몇%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각자 속으로 자기자신을 판단하시면서 말없이 스스로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17장의 다른 해석서 하나를 대표적으로 선정해서 들여다 보겠읍니다.
[최상의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음을 알 뿐이고,
그다음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를 친근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다음의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그 다음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를 업신여긴다.
(통치자의) 미더움이 두려우면 (아랫사람들이) 믿지 않음이 생긴 것이다.
삼가 그말을 귀하게 여기나니,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다 되는 것을 백성들은 모두 말하기를,
내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
우선 주인공을 통치자로서 해석한 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노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도에 관한 것이지 정치나 권력통치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상부 네문장을 상문단, 하부 네문장을 하문단,으로 지정하면,
하문단의 네줄 문장을 문장차례대로 이어서 번역을 하려다 보니,
전혀 연결이 안되는 이상한 번역이 되어 있읍니다.
이는 노자도인이 문장배치를 1,2,3,4,-4,-3,-2,-1. 한바퀴 돌리는 통에 주석가나 번역자들이
이를 명확하게 알아채지 못하고, 문장이 -4,-3,-2,-1로 배치된 순서 그대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아주 이상한 번역이 된 것이죠.
이 예를 든 책 뿐만 아니라, 전체 노자도덕경 번역서들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주석 및 해석을 했는데,이는 가장 권위 있다는 중국의 왕필 주석본부터 잘못 주석했기 때문인 것 같읍니다.
한글로 번역주석된 노자도덕경 책들은 대부분 중국의 주석서를 활용하고,
그 이전에 해석한 책을 참고로 재해석을 한 것이기 때문에 세밀하게 전체 문장을 새롭게 관찰해 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읍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의 선승인 無竟禪師의 선시 한수 읊고 마치겠읍니다.
一二三四處
四三二一時
連環若鉤鎖
面目十分奇
1 2 3 4 곳에서
4 3 2 1 때에 따라
쇠살슬처럼 연결되어 돌아 가는데
생긴 모양이 참으로 기이하도다.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