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08. 7. 9. 22:41

 

얏씨는 모처럼 담배를 한대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직 초저녁이어서 하늘은 맑았는데 달은  뜨지를 않았다.

별중에 가장 커 보이는 금성이 남서쪽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얏씨는 담배에 불을 붙히기 위하여 라이터 불을 켰다.

라이터 불꽃이 환하게 얼굴주변을 밝히며 바람에 휘둘렸다.

어 ? !

얏씨는 담배에 불을 붙히려다, 다시 라이터 불을 껏다.

다시 켜 보았다.

또다시 껏다가 켯다가, 껏다가 켯다가---

여러번을 반복해 보며, 가스 라이터의 불꽃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가스 라이터가 뜨거워졌다.

"그렇지--, 그래, 바로 그거야"

얏씨는 담배 한가치를 반도 못 피고 이내 꽁초를 꺼버렸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콤퓨터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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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터 불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불꽃 자체가 빛이죠.

불꽃이 작긴 하지만 어느정도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는 있읍니다.

 

까스 라이터 불꽃을 우리들의 의식이라고 한번 비유해 보죠.

불꽃자체는 환하게 빛을 발산합니다.

불꽃의 겉표면일 수록 더 밝은 빛을 발산하죠.

그러나 불꽃 속으로 들어 갈 수록 밝은 빛은 어두워지죠.

아마도 연료인 깨스가 불꽃 표면에서는 공기중 산소와 맞 닿아 있기 때문에

연소가 더 활발해져서 밝은 빛이 나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산소와 직접 맞닿지 않는 불꽃 내면은 푸른 빛이 나네요.

온도로 보자면 아마도 불꽃 내부가 외부보다 더 높겠죠.

불꽃의 표면은 붉은 색을 띈 빛이 나오지만

표면에서 점점 속으로 들어 갈 수록 적색에서 노란색으로

노란색에서 녹색으로, 녹색에서 청색으로 변해가네요.

까스가 나오는 구멍입구는 아예 불꽃이 없어서

아무 색갈도 없이 어둡게 보입니다.

어두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불꽃 겉표면의 밝은 빛으로 인해

불꽃 속은 아무 색갈없이 투명한데도 컴컴하게 보이는 것이죠.

불꽃의 뿌리는 빛이 없는 암흑이죠.

 

우리들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에는

마치 까스라이터 불꽃 표면처럼 환하게 비친다고 생각하죠.

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모든 것을 환하게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기면서

사색하고 연구하고 말하고 싸우고, 온갖 삶을 살아 나갑니다.

이 환한 의식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죠.

 

의식측면에서는 사람의 의식이라고 해서 파리의식보다 더 진보된 것은 아니죠.

사람의식이 모든 생물체의식보다 지극히 진보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사람자신들의 생각일 뿐이죠.

의식은 파리나 개나 사람이나 다 같은 것으로 빛보다도 수만배 미세한 파동에너지입니다.

사람은 개나 파리를 보고는 "저건 개다" "저건 파리다"라고 취급하면서 해꼿이를 하지만

개자신이나 파리자신은 스스로 "내가 개다" "내가 파리다"라는 생각이 전혀 없죠.

개나 파리는 사람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고 의식적으로 상관도 안하지만,

사람이 공연히 개니 파리니하고 스스로 이름짓고 구별하며 트집을 잡는 것이죠.

사람이든 개같은 동물이든 파리든 간에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의식은 똑 같이 음식에 의해서 나타난 동일한 의식입니다.

그러나 오직 사람만은 그 음식을 원료로 만들어진 육체와 의식을 자기자신이라고 여기죠.

 

사람은 두뇌구조와 지각능력이 너무나 복잡하게 분화되어서 의식의 작용이

여러스펙트럼으로 복잡하게 펼쳐져 있어 사고작용이 혼돈스러워진 것이 문제가 되죠.

사람은 이렇게 복잡하게 펼쳐진 의식의 작용이 마치 진보된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의식은 하나이며, 그것은 파리나 개가 가지고 있는 기본의식과

같은 아주 단순한 앎 의식입니다.

불꽃이 깨스라이터 불꽃이든, 촛불이든, 전기불이던 상관없이 같은 빛이며,

불꽃에서 나오는 그 다양한 빛자체는 하나의 공간이 있어야 켜지던가 꺼질수가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다종다양한 의식이 나온 뿌리인 그 의식의 씨앗은 단 하나일 뿐이죠.

 

이제 수행자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죠.

수행자가 명상에 들어 가면

무엇인가에 집중을 하겠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읍니다.

항상 자신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겠죠.

 

이 명상자는 점점 의식이 세밀해 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들리는 여러가지 소리나 자기자신의 몸의 느낌에

신경이 산란하고, 마음속에 흐르는 잡념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명상이 본궤도로 들어가면 주위의 시크러움이나 마음의 잡념이 조용해지고

오직 한 곳으로 주의가 몰리는 것이죠.

점점 의식의 촛점이 한곳으로 좁아지고 미세해지면서

어느새 깨어있는 잠처럼 아무 생각도 없읍니다.

자기자신이 있는지 조차 잊어 버립니다.

의식을 깨스라이터 불꽃으로 비유하자면

불꽃의 중심인 심지 부근의 컴컴한 곳에 있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곳은 의식의 기본성질인 앎(빛)이 없는 무지상태와 비슷하죠.

 

바로 우리들의 마음의 근본뿌리는 컴컴한 무지(無知) 그자체이죠.

앎의 뿌리는 바로 모름입니다.

컴컴한 모름으로 부터 밝아 보이는 듯한 앎이 나온 것이죠.

그래서 모든 知識은 그 근본은 無知입니다.

 

우리들 의식의 불꽃은 의식표면은 깨어있어서 모든 감각이 열려있읍니다만

그것은 보는자와 보는 대상으로 나누어져 있읍니다.

그러나 이 이원화 의식상태에서 내면으로 깊히 들어가면

어느 한계에서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가 되는 상태가 옵니다.

이 경계가 없는 상태는 소위 말하는 空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空이 아니죠.

왜냐하면 그상태를 알고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객관화된 대상일 뿐이죠.

그대로 이원화 된 상태입니다.

보는자도 있고, 보이는 대상도 그대로 있지만,

보이는 객관대상이 경계가 없이 하나로 느끼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이런 상태를 空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공이 되었다는 것을 알거나 그렇게 느낀다면

아직도 그것은 의식안에서 마음의 상상력이 만든 空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상태는 단순히 마음이 그린 그림일 뿐이죠.

아직 완전히 주시자인 순수의식은 못 되었지만

이상태에서도 상당히 자신의 육체습을 녹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스스로 속는 일도 많읍니다.

 

이제 그 수행자가 점점 더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서 명상이 아주 깊어집니다.

대상적인 空의 경계없는 상태를 지나서

자신조차 잊어 버리는 경지로 접어 듭니다.

불꽃으로 비유하자면 바로 불꽃 가운데 심지 부근의 빛이 없는 컴컴한 부위죠.

말하자면 의식의 완전 無知상태가 됩니다.

이상태에 안주 할 수있다면

수행자는 무척 높은 경지에 있게 되는 것이죠.

 

우리들의 의식은 기본적인 특성의 비추는 앎의 빛이지만,

의식의 기본 뿌리인 순수앎 자체는 無知입니다.

이상태는 존재의식에 있지만,

완전히 의식의 씨앗은 아니죠.

의식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의식의 불꽃으로 나올 수가 있읍니다.

의식의 불꽃이 있는 한은 그것은 최종 절대상태가 될 수가 없죠.

 

까스 라이터 불꽃은

연료인 까스가 있는 한에는 불꽃이 환하게 피어 오르겠지요.

까스라이터 몸체가 사람의 육체라고 비유하면

까스 연료는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고 비유할 수가 있읍니다.

휘발유가 있어야 자동차가 움직일 수가 있듯이,

사람도 음식을 계속 공급해 주어야

의식의 불꽃을 피울 수가 있죠.

따라서 이 의식이라는 것이

바로 음식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죠.

의식자체가 음식의 기운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나는 음식도 아니고,

음식의 기운인 의식도 아니라 이거죠.

 

그러면 의식이 사라진 절대상태란

비유적으로 어떤 상태일까요?

까스 라이터 전체를 어디다 치워 없애 버리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무한한 공간자체가 남는 것이죠.

의식과 절대의 차이는

바로 가스라이타 불꽃과 공간과의 관계와 비슷하게 볼 수가 있읍니다.

 

아무것도 아닌 공간은 불꽃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죠.

절대 참나는 의식이 있든 없든 항상 그대로 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공간은 라이터자체가 있든 없든 관계가 없읍니다.

절대참나는 육체가 있든 없든 그대로 있읍니다.

 

궁극의 깨달음은 육체와 의식의 불꽃을 넘어 가야 합니다.

그러나 라이터의 불꽃이 켜 있던, 꺼져 있든 간에

항상 공간은 거기 그렇게 있읍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진아는 항상 있읍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태고시절 그 이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 있을 겁니다.

 

우리가  진아와 깨달음에 대한 온갖 가르침을 공부하고

수행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때는 마치 라이타 불꽃이 켜져 있을 때로 비유할 수가 있겠읍니다.

그래서 의식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은

바로 불꽃의 컴컴한 심지부근인 존재의식상태이죠.

이 존재의식 상태에 안주해서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최상의 명상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의식의 근본 무지상태에 오랫동안 안정되어 있으면

자연히 그 넘어 절대상태에 대한 깨달음이 다가 오는 것이죠.

이 의식의 근본무지상태를 주시하는 것은

바로 절대자 밖에는 없는 것이죠.

그 맨 마지막에 있는  깊이를 알수없는 바탕이 바로 궁극의 상태라고 하죠.

그곳이 의식을 초월한 비의식상태라고 합니다.

 

불꽃은 항상 연료를 태우면서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그리고 실바람만 살랑대도 불꽃은 부질없이 오두발광(發狂)을 떨며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마찬가지로 의식도 언제나 음식연료를 태워가면서 불꽃처럼 끊임없는 활활 타고 있을 수밖에는 없읍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바람 한점도 없는데 의식의 불꽃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펄럭거리며 오두방정을 떨며 흔들거리죠.

 

그래도 의식이 있는 한에서는 의식의 컴컴한 내면속에 안정적으로 있으면

의식의 변화에는 그렇게 많이 휘둘리지는 않겠죠.

그러나 이것도 의식이 있는 동안일 뿐입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의식을 완전히 빠져 나가서,

의식으로부터 뚝- 떨어져서 초연하게 지켜 보아야 되겠지요.

 

여기 이에 대한 가르침의 좋은 예가 있읍니다.

노자 도덕경, 제1장 [道의 本體]의 맨 마지막에 그 비밀의 가르침이 있읍니다.

 

玄之又玄하면 衆妙之門이니라.

 

미묘한 어둠의 玄(의식의 내면,무지)을 지나서

더욱 깊은 어둠의 玄속으로 들어가면,

일체의 온갖 현상계가 나오는 神妙한 門(의식의 씨앗)이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