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수행(6)

2024. 12. 9. 22:18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ㅇ. 보이는 대상들의 진리

 

[본문]

'봄'에서 필수 불가결한 '보는 자'가 곧 자기 성품의 실재임을 보지 못하면서 세계를 실재한다고 보면, 그가 보는 세계 자체가 그 '보는 자'를 조롱하고 수모를 안겨주며, 속으로 비웃는다네.

[사두 옴 해설]

세계가 그것을 실재한다고 보는 자를 속으로 비웃고 조롱한다고 선언하는 이 연은 독특한 묘미가 있다. 우리는 지각력 없는 사물인 '세계'가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것이 이 연의 묘미이다.

우리는 이 연이 본 저작의 제74연에서 가르친 관념을 염두고 있다고 이해야야 한다.

정숙하지 않고 비천한 성품의 창녀는 자신에게 흠뻑 빠진 새 연인이 자기 친구에게 "오, 내 연인인 이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여자야"라고 자신을 높이 평가해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속으로 웃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세계도 자신을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연은 세계를 멋지게 의인화한다.

스리 바가반은 이 연에서, 세계 그 자체가 자신이 실재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세계의 비실재성을 증명할 다른 누구의 지지나 중거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이것이 연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연에는 스리 바가반이 <마하리쉬 복음> 제2권 제3장에서 베푸는 것과 같은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런데 실재한다고 그대가 말하는 그 세계는, 그대가 자신의 실재를 모르면서 세계의 실재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을 실은 조롱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쉬 복된 가르침, 85쪽>

 

[본문]

빛의 범위 안에 있는 것들 외에,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은 조금도 보이지 않듯이,

생각하기 와 잊어버리기로서 작용하는 마음(진아의 반사된 빛)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들(우주)만 존재성이 알려진다네.

[해설]

마음 빛이 없으면 세계가 나타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진아의 참된 빛 안에서는 (생각하기에 의해) 창조돠고, (계속 생각하는 것의 의해) 유지되고, (잊어버리기에 의해) 소멸되는 대상들로 이루어진 우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참으로 존재하는 물건인 진아(혹은 신)는 마음 빛의 범위를 넘어서 있으므로, 마음에게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아가 생각하기와 잊어버리기의 기능을 가진 마음의 빛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각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그리고 그것 자체가 생각할 수도 없고 잊어버릴 수도 없는, 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본문]

(어떤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떤 하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립해주는 것 말고는 , (그것과) 접촉하는 감각기관들이 현출하는 그것(그 형상)이 실재한다거나 그 자체의 참된 성품이라는 결론을 확립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라.

[해설]

우리가 아는 어떤 사물의 이름과 형상은 오관이 그 사물과 점촉함으로써만 창조된다.

이름과 형상은 마음의 상상에 불과하므로, 세계 안의 (혹은 세계로서)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의 참된 성품은 사실 진아일 뿐이다.

 

[본문]

'봄'이 향하는 어떤 것(대상)을 그대가 보지 않고 봄으로써 그 봄을 보는 그것(보는 자)을 보면, 모든 것이 그대 자신으로서만 번영할 것이고, 그런 다음 모든 대상지(知)는 미친 것임을 발견할 것이네.

 

[본문]

'보는 자'(에고)와 '보이는 것'(세계)이 별개의 실체일 뿐이라면, 보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보는 것이 가능하므로, 그 둘(보는 자와 보이는 것) 은 똑같은 하나의 실재임을 알라.

[사두 옴 해설]

지금 우리가 이 연에 나오는 관념의 눈을 통해 제366연(위에서 두번째 본문 참조) 을 보면,

거기서 마음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들만 존재성이 알려진다고 한 이유가,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은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같은 실재성의 수준에 있기 때문일 뿐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연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의 독특한 관념이다 !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다른 것들은 보기 쉽다. 그것들은 '보는 자'인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아를 보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본 연과 부합하게 면밀히 살펴 본다면, '보는 자', '보이는 것', '봄'에 대한 자연법칙은 이와는 사뭇 반대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는 진아(자기)를 아는 것이 가장 쉽다고 간접적으로, 그러나 확고하게 가르친다.

왜냐하면 '보는 자'(에고)의 존재성(sat)은 실은 진아, 즉 우리가 보거나 알고 싶어하는 단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꿈을 꾸는 것도 그 꿈 속에서 보이는 모든 대상이 그 꿈을 꾸는 사람의 존재성과 같은 (수준의) 실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점을 더 이해할 수 있다.

'아는 자', 곧 에고의 존재성 혹은 성품은 알려지는 모든 대상들(눈을 통해서 알려지는 모든 대상, 곧 눈에 보이는 대상들 뿐만 아니라, 다른 네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알려지는 모든 대상, 곧 들리고, 냄새 맡아지고, 맛보아지고, 감촉되는 대상들)의 존재성 혹은 성품과 같기 때문에, 세계라고 하는 사물이 알려지는 것도 오관을 통해서 얻어진 앎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에고는 뜨고 지기 때문에, 그것의 성품은 거짓이고, 역시 뜨고 지는 성품을 가진 이름과 형상들의 세계도 거짓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뜨고 지는 이름과 형상들을 먹고 사는 에고의 진정한 성품을 면밀히 살펴 보아(탐구하여)

그것이 진아 또는 브라만, 곧 뜨고 지는 거짓된 성품이 없는 참된 실재임을 발견하면,

세계의 존재성도 진아임이 발견될 것이다.

(여기서 바가반이 "'보이는 것'이 눈(보는 자) 과 다를 수 있는가?"라고 묻는 <실재사십송 제4연을 참조하라).

그럴 때만 절대적 진리, 즉 세계조차도 실재한다는 것, 세계는 브라만 그 자체라는 것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구도자가 '보는 자', 곧 에고의 존재성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세계도 '보는 자'와 같은 존재성을 기지고 있으므로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절대적 실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매우 바람직라기도 하다).

 

                                                                               -스리 무루가나르 지음 <진어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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