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기를 포기하라(3)

2024. 11. 1. 22:35성인들 가르침/슈리 푼자

 

질문자 : 선(禪) 수행 중에 저는 고요해 집니다. 하지만 그때 저의 안과 제 주위에 진행되고 있는 모든 것을 더욱 의식하게 되어 머리와 가슴에서 고통스러운 압박감을 느낍니다.

 

슈리 푼자 : 하지만 선수행 중 관찰자는 어떠한가?

관찰자를 관찰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관찰자를 관찰해야만 한다.

이제 관찰자를 관찰하라고 말하니 이것을 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가?

노력한다면, 보상과 결과들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 그대의 얼굴을 내면으로 향해 관찰자를 대상이 되게 하라.

그리고 지고의 의식이 이 관찰자를 보게 하라.

이해하려 애쓴다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대상을 지운다면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모든 가르침의 방법에서는 항상 대상을 다루게 한다.

이것은 그대에게 어떤 열매도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고요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고요가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다.

단지 생각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에서 오고 있으며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보라. 그대는 목격자로 남는다. 단순히 목격자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목격자가 되어라.

좋거나 나쁜 상황은 오고 간다. 상황은 머물러 있지 않다.

그저 관찰하라! 좋은 상황은 오고 머물다 간다.

오고 감이 없는 것이 목격자이다!

이것을 잘 하면, 그때 이 목격자는 어떤 다른 존재 앞에서 오고 갈 것이다!

목격자가 아무런 이름 없는 것 앞에서 오고 갈 것이다!

목격자가 아무런 이름없는 것 앞에서 춤추도록 하라.

그 위치를 보는 방법은?

관찰자를 관찰하는 방법은?

목격자를 목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질문자 : 그냥 의식으로 있는 것입니다.

 

슈리 푼자 : 그렇다. 그것이다. 성자 까비르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까비르가 자신의 흙집에서 막 나오자마자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경찰이 와서 그들을 체포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그가 나를 공격했어요"

다른 사람도 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둘 다 법정으로 불려갔다.

그러나 법정은 증인없이는 심판할 수 없었다.

그때 경찰이 말했다. "까비르만이 이 사람이 상대방의 손을 칼로 치는 것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

그래서 까비르는 법정에 불려갔고 그가 나타나자 치안판사가 물었다.

"그대가 거기 있었는가?" "예,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무엇을 보았는가? 누가 먼저 공격했는가?"판사가 물었다.

"본 사람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판사는 당황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눈은 보았으나 눈은 말할 수 없다.

혀는 말하나, 혀는 볼 수가 없다. (웃음)

그러므로 눈은 목격자로서 말할 수 없다.

혀는 말하고 있으나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혀는 믿을 수 없다.

판사는 매우 당황하여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그대는 목격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대는 말할 수 없다.

 

질문자 : (웃으며) 저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슈리 푼자 : 그렇다. 볼 때 그대는 목격자가 된다. 이건 그대가 하는 농담이야!

 

질문자 : 저는 장벽을 없애고 싶고, 참나에 복종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아 때문에 참나에 복종할 만큼 겸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빛으로 이 초에 불을 붙여 주십시오.

 

슈리 푼자 : 그대는 자아를 말하기 시작했으며 자아를 부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아를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그대는 자아를 없애려 열심히 애써 왔지만, 이것은 오히려 자아를 부추기게 된다.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그저 자아를 마사지하고 팽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해지는 일이 아니다. 행복해지려면 그대의 평화를 위협하는 어떤 것을 없애야만 한다.그래서, 나는 매일 사람들에게 생각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지 찾아내라고 한다.

"이 물건이나 이 사람을 얻으면 나는 행복할 거야" 하는 것은 자아의 속임수이다.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대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대에게 행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고요해야 한다. 어떤 관계도 그대에게 행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조차 그대에게 행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대의 피를 빤다. 피가 다 없어지면 그들은 그대를 떠날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하지만 이 삶에서 그대가 의식으로 있을 수 있다면 그대에게 자유의 기회가 있다.

이 목적 때문에 그대는 여기로 왔다.

마침내 삿상에 올 수 있는 행운을 지닌 지적 인간으로서 그대는 여기에 왔다.

그대는 모든 좋은 점들을 지녔다. 그러나 분명히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그대의 자아가 머리를 들 때, 그 뿌리를 쳐서 고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 그것을 쫓고 있으므로, 그대는 그렇게 될 것이다. 낙심하지 말라. 무엇이 일어나는지 지켜 보기만 하라.

그리고 누가 영원히 그대 편에 서서 도망치지 않을 것인지 식별하라. 모든 사람은 도망갈 것이다.

 

질문자 : 파파지, 저는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무런 시간이 없었으며, 서늘하고 고요한 희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간 제 모습을 본 후 저는 너무나 큰 심적 고통, 너무나 많은 '나'에 대한 생각과 너무나 큰 무가치함 속에 있습니다.

 

슈리 푼자 : 이 마음의 지껄임이 그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대는 알아야만 한다.

이 무가치함이 그대를 돕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라.

일어나는 어떤 생각도 그대를 돕지 못하리라.

그냥 이것을 계속하라. 왜 그대는 시간 없음을 말하면서 '있었다'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있었다'는 시간 안에 있다! '있었다'는 과거다. 이것은 좋은 경험이다.

왜 그대는 그것을 내다 버렸는가? 왜 그것을 과거에 두었는가?

왜 그대는 그것을 강에 내다버렸는가? 이제 그것은 떠내려 갔으니 그대는 찾을 수 없다 !

인도의 비하르 지방에 파드마 라는 강이 있다. 사람들은 루비를 캐러 그곳에 간다.

그들은 파낼 수 있는 10평방 피트의 공간을 얻으려고 정부에 로열티를 지불한다.

어쩌면 10피트 밑에서 루비를 찾을 수도 있고, 50피트 혹은 더 깊은 곳에서 찾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한다. 어떤 사람이 로얄티를 지불하고 강바닥으로 들어가던 중 발가락에 돌 하나가 채였다. 그는 그 돌을 보고 강에다 던져 버렸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춤을 추면서

'나는 부자다, 부자야! 아내도, 궁전도 얻을 수 있다. 내가 루비를 찾았다!" 라고 외치는 것을 그가 보았다. 이 남자의 루비를 보고 자기가 강에 버린 것이 그 루비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험을 하고서 어떻게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이것이 그대가 온 목적이 아니었던가 !

그대는 이미 이번 생을 살 수 있는 로열티를 지불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산티, 즉 평화를 그리고 그대 자신의 사랑을 찾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있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무엇을 잃겠는가?

 

질문자 : 그렇다면 그것은 현존입니다.

 

슈리 푼자 : 어떻게 그대가 현존을 잃을 수 있는가?

마음은 항상 그대를 속이려 들 것이다.

이 몸-마음은 내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때 그대는 마음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아니라 마음이 성공했다. 마음은 생각을 의미하고, 생각은 '나'를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대가 '나'를 그냥 보기만 하면 그때 '나'는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 이해 되는가?

그것이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그저 '나'를 보기만 하라.

그대가 '나'를 보지 않으면 '나'가 그대를 공격할 것이다.

 

질문자 : 제 마음은 없었는데 - - -

 

슈리 푼자 : 아주 형편없는 문법이군! 왜 '없었다'라는 과거 시제의 단어를 쓰는가?

마음은 과거를 뜻한다. 왜 이중으로 과거 시제 '없었다'를 쓰는가?

마음을 말할 때 그것은 과거를 말한다. 1초면 충분하다. 이 1초는 시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60초 중의 하나가 아니다. 이 1초는 시간을 벗어난 한 순간이다. 시간을 보지 말라.

'없었다'도 쓰지 말고 '있다'조차 쓰지 말라. 현재의 '있다'조차 쓰지 말라.

이해하겠는가? '있다'조차도! 그대가 '있다'를 쓰지 않으면, 그대는 누가 누구인지를 찾아낼 것이다.

 

                                                                            -슈리 푼자 법문집 <그대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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