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4. 22:39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경험에 대한 이야기
하늘은 순수하고 고요하며 겉모습이 없다고 묘사됩니다.
하늘은 모든 곳에 펼쳐져 있는 넓은 공간을 의미합니다.
먼저 공간이 있고, 그 다음에 물체가 옵니다.
체험으로 보는 것은 올바르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체험이 없다면, 어떤 것도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브라흐만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아트만,大我)는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람의 비유를 사용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역자註 : 여기서 자아(自我)는 대아(大我,아트만)를 말합니다. 베단타에서는 자아(自我)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 자아인 진아(眞我)는 최고 자아인 파라브라흐만,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 같은 의미이며,
두번째 자아는 대아(大我)로써 아뜨만 또는 시바(Shiva)라고 하며, 우주적 의식 또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우주적 자아를 말합니다.
세번째의 자아는 찌바(jiva), 즉 개인의 육체의식, 우리가 말하는 개아(個我) 또는 소아(小我), 즉 육체적 개인 자아를 말합니다.
따라서 베단타 책의 영어번역 문장에서 <Self>는 그 문장의 앞뒤 단락의 내용에 따라서 <진아>일수도 있고, <대아>일수도 있고 <개아> 또는 <자아>일수도 있는데, 한국 번역문에는 <진아>와 <자아> 또는 <대아> <개아> 구분없이 거의 진아로써 번역될 수도 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그래서 여기서는 <진아>와 <대아>그리고 <개아>, 또 일반적으로 공통적으로 쓰이는 <자아>가 있다는 것을 참고적으로 알려드립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하면 <진아>가 아니고 <개아>라고 알고 있는데, 베단타에서는 영어번역문 <Self>가 거의 <진아>로 번역되고 소문자인 <self>가 <자아>나 <개아>로 번역되어야 하겠지만, 그런 구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점 읽는 분들이 헤아려서 분별 잘 하시기 바랍니다.>
항아리 속의 공간은 브라흐만으로 비유되며,
항아리 속에 있는 물 위에 사물이 반사된 것은 자아(大我)로써 비유됩니다.
이것을 공곰히 생각해 보면 그 둘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 끝났습니다.
움직임이란 이렇게 오고 간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무지(無知)는 장뇌처럼 불활성이고, 자아(大我)는 불처럼 움직입니다.
장뇌와 불은 모두 소진되면 사라집니다.
브라흐만은 하늘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아(大我)는 바람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사해보면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거치른 불활성 물체들은 많지만, 자아(大我)는 하나입니다.
이것은 대아(大我)와 비대아(非大我)를 분별함으로서 알려여집니다.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이는 "우주의 제왕(신)'(Jagadisha)이라고 불립니다.
대아(大我)는 거치른 불활성 물체의 움직임에 불을 붙입니다.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것은 대아(大我)입니다.
모든 것과 함께 하는 대아는 움직임의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파라브라흐만(眞我)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 안에는 눈에 보이는 환상이 없습니다.
그 순수한 브라흐만은 환상이 없이 있는 그대로 입니다.
첫번째는 대아(大我)와 대아 아닌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본질(진아)과 비본질적인 것(비진아)에 대해서 탐구해야 합니다.
탐구와 함께 깊은 반추(反芻)를 통해서 현상계가 해체됩니다.
반추(反芻)와 함께 현상계는 해체됩니다.
눈에 보이는 존재들은 거기에서 사라집니다.
내적 자아(大我)는 영성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속성없는 그것(진아) 속으로 합일됩니다.
<* 註: 반추(反芻)하다: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생각하거나 음미함>
만약 마음의 주의가 미묘한 내면 자아를 향한다면,
자아(自我)는 미묘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마음의 촛점이 거친 물질적 세계를 향해서 하향한다면
자아(自我)는 세속적인 것이 되고 세속적인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자아(自我)는 어떤 의미나 혹은 의미가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과 같이 되고, 그것이 지시된 대로 갑니다.
추측과 상상을 갖게 되면 사람은 의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심에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면, 자아는 의심이 없게 되고,
의심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면 자아는 의심이 많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연사(演士)의 강연이 뜻깊고 가치있어 보인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은 그 말의 의미와 하나가 됩니다. 만약 연설이 경박하면 그 연사의 모든 것이 경박해 보입니다.
그것은 환경에 따라 색갈이 변하는 카멜레온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관찰해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한 다음 그대로 유지합니다.
만약 최고급의 음식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면 마음은 그 음식의 형태를 취합니다.
만약 여자의 아름다움을 계속 이야기하면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앉게 됩니다.
사물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올바른 내적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보고 듣는 것이 무엇이든 그 이미지는 마음에 단단히 고정됩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익하지 않은지를 검토하고 스스로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일한 하나님(신,진아)을 찾으십시오.
그래야만 '본질적인 것'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됩니다.
신(하나님)은 여러 가지 즐거운 것을 창조하셨지만,
그 즐거움들에만 집중하다가 사람들은 신을 잊어버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많은 슬픔에 시달리고 항상 괴로워합니다.
마음 속에는 행복에 대한 열망이 있지만, 행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무지한 자들은 행복의 근원이신 유일한 하나님을 그리워 합니다.
외부적으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다가, 그들은 삶의 슬픔에 시달리다가 죽습니다.
현자들은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주 현상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神,진아)을 찾음으로써 진실한 행복을 알려주는 일을 합니다.
사람이 유일한 하나님(진아)에 도달할 때,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로운 분별력의 활용을 포기합니다.
분별과 지혜의 열매는 행복인 반면에 무지의 열매는 슬픔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함으로서, 자신을 위해 유익한 것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누가 행위자인지 이해하십시오.
이것을 명상이라고 부릅니다.
분별력의 활용을 포기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제 이 주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행위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십시오.
현명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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