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상황 변화에 따른 영성인의 마음자세

2024. 7. 20. 20:33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종교의 현시대적 상황에 대하여

 

[* 譯註: 위의 소제목에서 <현시대>란 사마타 람다스가 생존하던 인도 대륙의 서기 1600년대를 말합니다. 이 시대는 인도가 이스람국가들에게 영토 일부를 점령 당하고 이스람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힌두교 전통 가치에 변화가 이루어지는 불안정한 종교 사회적 상황에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옷차림의 방식과 삶의 길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모든 다른 삶의 방식들 중에서 사람들이 세 가지 세게에서 휴식과 안도를 찾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가정생활입니다.

 

신, 현자, 승려,요기,금욕수행자,포기자, 조상,

그리고 모든 유형의 손님과 방문객은 모두 가정생활로부터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가정집에서 태어났지만, 비록 그들이 그러한 삶의 방식을 버렸을지라도,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이름 때문에 그 곳에서 지속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정생활의 삶은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자신의 성향을 알고 모든 삶의 방식에 대한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譯註: 여러가지 삶의 방식 :

브라마챠야아쉬람(Brahmacharashram)은 구루와 함께 수행하는 독신수행자 생활,

구루하새스람(Gruhasthashram)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家長)생활,

바나프라샤스람(Vanaprasthashram)은 가장생활에서 은퇴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생활,

산야사스람(Sanyasashram)은 세속삶을 완전히 포기한 수행생활.]

 

덕이 있는 집안에서는 8 가지 덕행을 옹호해서 사람들에 의해 따르도록 이야기되어 집니다.

[譯註: 6 가지 덕목은 영적 공부, 가르침, 제물 만들기, 다른 사람이 만드는 제물 도와주기, 자선을 베푸는 것, 기부를 받는 것, 등임]

 

덕이 있는 집안에서는 경전에 제시된 여섯가지 활동을 수련합니다.

특히 신(神)에 대해서는 헌신의 길을 따릅니다.

 

그러한 가정인(일반인)은 진언을 반복하고, 종교 서약을 지키며, 영적인 노력을 부지런히 합니다.

그에게는 우주의 제왕(神)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의 몸과 말과 생명과 호흡은 신에게 바쳐지고,

그의 마음은 신에 대한 찬양노래를 하며 즐깁니다.

 

그러한 신의 헌신자는 특히 내면적으로 초탈되어 있습니다.

신을 위해서 가정생활에 대한 집착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해방됩니다.

 

가장 큰 행운은 내면적으로 초탈되는 것이고,

세속일에 애착을 갖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왕들조차도 신을 깨닫기 위해서 왕국을 포기하고 방랑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성취때문에 유명해 졌습니다.

 

내면을 체험하고 사려깊게 성찰한 위대한 요기들은 내면의 체험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속적인 삶에서 초탈한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너머의 진아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흘끗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수단이지만,

모든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은 항상 신의 광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겉으로는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매우 깨어 있고 그의 생각은 항상 신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아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면서 신의 형상을 숭배하거나,

영적인 강연을 들으며 연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많은 덕을 쌓아야만 그런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깁니다.

 

실제 체험이 없는 지식은 상상과 추측일 뿐입니다.

그러한 지식으로 어떻게 생명 존재를 위한 영적인 실천에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직접적인 체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경험이 없으면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실제 경험이 없으면 치유가 재앙이 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게 세상 삶을 포기한다면,

그는 고통과 고난을 겪으며 죽을 것입니다.

그는 세속적인 삶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집을 떠나서 분노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다투다가 죽으면,

그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의 원천이 될 뿐입니다.

 

만약 그런 무지한 사람이 집을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기 시작한다면,

스승과 제자 모두 무지한 채로 남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부도덕한 행동을 한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곳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부도덕한 행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만약 집에 끼니 때울 것이 없어서, 비참한 기분으로 나가서 도둑질하는 삶을 살게되면,

그는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곳에서만 매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 이 세상 삶이라는 것이 비실재라는 것을 깨닫고, 집을 떠나가면,

그는 자기처럼 다른 사람도 지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좋은 친교를 유지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과 친교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타락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좋은 사람과 친교를 유지하기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분별력의 힘과 적절한 검증을 활용하지 못하는 곳에서,

어떻게 진아지(眞我知)를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집 저집으로 동냥다니면서도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어진 장소,시간,상황에 따라 올바르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만약 인품과 품행이 천한 사람이 구루가 되면,

주위 사람들의 행동도 천하게 되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베다와 경전의 지식 또는 "브라흐만을 아는 자"를 돌아보겠습니까?

 

브라흐만 지식에 대한 담론과 사색에 대한 권위는 브라흐만을 아는 자에게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브라흐만을 아는 자만이 모든 카스트들에게 진정한 구루라 할 수 있습니다. .

 

스스로를 브라민(사제)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은 순수한 지성에서 벗어나 선한 행동을 포기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 왔습니다.

그들은 구루라는 높은 지위를 포기하고 제자들의 제자가 될 뿐입니다.

 

소위 브라민(사제)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급 신(神)과 다양한 귀신을 숭배하기 시작하거나 욕망에 따라 다른 종교로 개종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칼리 유가인 현시대에 사려깊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감에 따라 앞으로는 카스트 간의 결혼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품위가 낮은 사람이 구루의 지위를 차지할 때, 그것은 그들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역활만 하게 됩니다.

그러한 비천한 사람들은 브라흐만을 깨달은 진실한 사람들에게 불명예만 주게 됩니다.

 

소위 브라민(사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참된 이해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의 경우 거짓된 자존심과 어리석음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에 무슬림 전사들이 왕국을 앗아 갔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구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세상 삶과 영적인 삶에서 모두 잃게 됩니다.

[譯註 :사마타 람다스 시대(서기 1608~1681년)에는 인도는 무슬림 국가에게서 침략당해서, 사회적 가치의 쇠퇴로 인해 종교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있었습니다].

 

정치와 시기심 때문에 진정한 브라민(브라흐만을 아는 자)의 높은 지위는 무너졌습니다.

소위 브라민(사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멀어졌고,

따라서 저주 받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우리 주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종교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다투기 때문에

브라민(사제)이라는 높은 지위가 사라진 것을 나(사마타람다스)는 큰 슬픔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브라민(사제)들이 현시대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의 상태는 그들이 먹을 음식조차 충분히 얻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것을 직접 본적이 없습니까?

 

이전에 왔던 선조님들을 탓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브라민 사제들이 겪는 불행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나는 현시대(17세기 인도)의 상황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강의를 경청하는 분들은 잠시 나의 거친 언설에 대하여 양해해주길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