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수련(정신수행)의 수립에 대하여

2024. 2. 3. 20:31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영적 실천(정신수행)의 수립

 

만약 우리가 실재(實在)라는 것을 생각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의 본질이 어떤 상상이나 개념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파라브라만은 어떤 상(相)도 없습니다.

 

상상을 하려고 계속 노력을 할지라도 상상력으로는 알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 속에서 찾을 수도 없고, 찾을려고 애쓰면 더욱 더 혼란스러워질 뿐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거나 마음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도 않고 마음에 나타나지도 않는 것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것을 보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형태가 없고, 마음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무(無)를 상상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낍니다.

 

상상 속에서 수행자는 그것을 검은 색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검은 색도, 노란 색도, 빨간 색도, 흰색도, 파란 색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색(無色)입니다.

 

어떤 색깔도 없고, 모양도 없고,

형태도 없는 것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그것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인식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보려고 해야 합니까?

그런 노력에 지쳐버릴 뿐입니다.

 

궁극의 절대 존재는 속성이 없으며 모든 속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생각의 능력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초월해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습니까?

속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눈으로 보여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마음에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속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것에도 붙지 않는 것에 어떻게 붙이겠습니까?

지지할 토대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유지해 나가겠습니까?

말 할수 없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생각의 대상이 아닌 그것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쓰거나,

상상할 수 없는 그것을 상상하려고 애쓰거나,

비이원성을 명상하려고 애쓸 때에,

그러한 노력에서 일어나는 것은 다만 이원성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조용히 정신을 모아서 명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실재(實在)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중단해버리면,

사람은 큰 의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만일 이원성에 빠지기 때문에 두려워서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실재(實在)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결코 깨달음에 대한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습관이 생기게 되면 그 습관이 강해집니다.

실재(實在)에 대한 명상습관을 길러서,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참구하다 보면,

결국은 사람이 성취감을 얻게 됩니다.

 

실재(實在)에 대하여 생각할 때는 이원성이 생기는데,

단순히 생각을 포기해 버리면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분별력(viveka)을 적절히 사용하지 않고서는 무(無)에 대한 의심에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분별력을 적절히 활용해야 합니다.

진아지(眞我知 :지혜)를 통해서,

(물에 젖지 않고 물 속에 있듯이) 속세의 삶에서 물들지 않고, 벗어나 초연하게 있었야 하며,

결코 쉽게 버려지지 않는 개별적인 '나'라는 느낌을 제거해야 합니다.

 

절대 실재(實在)인 파라브라만은 비원성입니다.

그것을 상상하려고 애쓰면 이원성이 생깁니다.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설명을 하려고 한다거나,

현상세계에서 취해온 다양한 직유(直喩)나 예시를 활용하여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적용되는 것이 없습니다.

 

파라브라만이란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잊으므로써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이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만나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것을 만납니다.

만일 그것을 만나려고 애쓰면, 분리감의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침묵으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고,

그것을 벗어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볼려고 노력하면, 그것은 마치 거기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 모든 곳에서 그대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어떤 수단도 방해가 되며,

어떤 수단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성취가 된다면,

어떻게 실제적인 체험없이 알려지고 이해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해되지 않음에 의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의 특정 자세가 없으면 마음의 태도나 변성이 없는 '그것'에서 안정되게 자리 잡습니다.

 

명상 속에서는 그것을 붙들 수가 없고,

생각으로도 그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절대 실재(實在)는 마음에 담겨질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물에 비유하려고 한다면,

그것(브라흐만)이 순수하고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물의 직유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은 아닙니다.

전체 우주세계가 물에 잠기드라도,

그것은 마른 상태로 그대로 유지됩니다.

.

그것은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어떤 것과 같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브라흐만은 언제나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아는 빛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람의 주의를 그것에 고정시킬 수 있을까요?

 

만약 사람이 보려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에 대한 느낌은 얻지 못하고, 마음이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보려고 할 때,

실재(實在)는 보이지 않아서 거짓된다는 생각이 있으며,

갈곳도 없고 쉴 곳도 없게 됩니다.

따라서 개인이 실재한다고 취급되고, 자기의 진실한 성품이라고 믿게 됩니다.

 

만약 이 거짓된 믿음이 진실하다고 말한다면,

베다와 사스트라스(신의 기원에 대하여 쓰여진 경전)는 허위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현인 비야사와 그외의 다른 현인들의 글과 가르침은 틀리지 않습니다.

[譯註 : 비야샤는 베다 경전과 푸라나스의 편집자이며, 성인이자, 작가입니다. 비야샤는 베단타 철학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재(實在)가 (보여질 수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진아 깨달음을 얻은 많은 현인들이 거짓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설명들을 해왔습니다.

 

"비이원성에 대한 지혜"의 가르침은 구루 기타에서 시바경에 의해서 파르바티에게 주었습니다.

다타드레아에 의해서 편집된 아라드후타 기타에서는 지혜의 길(Jnana)을 고략샤낫에게 주었습니다.

백조 왕(라이 한사)이 된 비슈누 경은 브라흐마에게 지혜의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 책은 '우주의 제왕'그 자신이 직접 전해준 한사기타라고 부릅니다.

 

브라흐마는 현자 나라다에게 4연시(聯詩,바가바탐)로 된 크리슈나 경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현자 비야샤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현자 바시슈타는 요가 바시슈타(마하라마나야)에서 라마 경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했고.

크리슈나 경은 바가바트 기타에서 아르쥬나에게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이와 같은 예를 얼마나 더 많이 보여주어야 합니까?

많은 현자들이 이 '비이원성 지혜'가 진리라고 거듭 가르침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진인들 설명의 강력한 힘에 기초해서 진아지(眞我知)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착각(오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비이원적인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성을 표현하는 세샤의 능력은 지쳐버렸고,

우파니샤드는 지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아 모습을 설명하려고 애쓰다가 그만 침묵상태로 빠져버렸습니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거짓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이해하려면 참스승(사드구루)의 가르침을 굳게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이 참이라고 취급하고, 참이 거짓이라고 취급 될 때에

마음은 의심의 바다에 빠져 버립니다.

 

마음은 상상하는 습관이 있지만, 마음이 상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나'의 상상력에 대한 자부심의 결과로 의심은 통제할 수 없는 길로 흘러 갑니다.

 

그러므로 의심의 길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수행자는 절대 진아인 파라마트마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성인과 현자를 친견하는 영성수행단체에 가입해서 친견과 수행을 유지함으로서 의심의 근원이 끊어지게 됩니다.

 

따로 떨어진 '나'라는 느낌은 무기로도 짜를 수 없고, 부셔버릴 수도 없으며,

어떤 행위을 한다고 해서 포기되지도 않습니다.

 

'나'라는 개인적 자부심의 느낌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실재(實在)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느낌이 온전히 있으면, 헌신은 줄어들고,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분별하는 힘도 약해집니다.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속세적 삶은 성공하지 못하고, 영적인 삶도 잃어버립니다.

'나'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성공, 명성, 능력 등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우정도 깨지고 애정도 사라집니다.

'나'에 대한 자존심에 의해서 이기심이 내면속에서 거품처럼 부풀어져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마음 속에 의심이 생겨서 분쟁이 일어나며,

전체와 하나라는 감미로운 지복감이 사라집니다.

 

'나' 속에 들어있는 개인의 자만감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데,어떻게 신이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나'와 '내것'이라는 이 자만심을 버리는 사람만이 진실로 성취합니다.

 

듣고 있던 제자가 "어떻게 '나'와 '내것'에 대한 자만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브라흐만의 체험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취감에 도달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라는 느낌 속의 자만감을 버리십시오.

브라흐만이 되면 그것을 체험합니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성취감에 도달합니다.

 

덧붙여서, '나'라는 어떤 개인적 느낌없이 정신수행에 임한다면 성취감을 얻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진실로 성취로 인한 축복을 받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 지금 내가 브라흐만이 되어 있는데, 무슨 정신수행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마음 속에서 이러한 개념을 떠올린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더 많은 개념만을 낳게 될 뿐입니다.

 

브라흐만에게는 그러한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어떤 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개념에 그대로 집착하고 유지하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그런 개념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려서, 그 개념을 보자마자 바로 내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현자인 것입니다.

 

분명히 어떤 개념도 없는 '그것'을 떠올려야 하지만,

'나'에 대한 어떤 개념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나'라는 따로 떨어진 개인이라는 느낌을 버려야 합니다.

 

브라흐만의 지혜 안에 이렇게 있지만,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초롱초롱 깨어서 지족(知足)해 있는 사람만이 이것을 이해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 따라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런 개념도 없는 "그것'을 명상할 때, 개념화 그 자체가 사라집니다.

 

브라흐만의 지혜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면 영적인 실천(sadhana)이 유일한 치료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은 개인성에 대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왕이 자기 왕좌에 앉아 있으면 행정부의 모든 업무가 유연하게 운용됩니다.

마찬가지로 브라흐만의 지혜를 얻었을 때도 영적 실천수행을 힘들이지 않게 계속 해나갑니다.

 

정신수행은 육체를 위한 과제입니다.

자신의 진아는 결코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위자(無爲者)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다가 옵니다.

 

자신이 육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에만, 정신수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육체가 아니라면, 정신수행을 포기한다는 문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신수행도 없고 육체도 없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브라흐만이 육체 속에 깃들어 있긴 하지만, 몸이 없이 있습니다.

 

정신수행을 계속 하지 않고,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만을 가질 때,

육체에 대한 애착과 게으름이 브라흐만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합니다.

 

영성(靈性)이라는 이름으로 이기심에 빠지기도 하고,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실재(實在) 속에 잠드는 것으로 선전하며,

해탈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할 수 없는 악행과 방종으로 가득찬 행동을 합니다.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이 일어나고,

대화라는 이름으로 논쟁이 일어나며,

자기 이름에다 부제(副題,지위,계급등))를 덧붙여서 스스로 자만심을 크게 키읍니다.

 

마찬가지로, 브라흐만 지혜의 이름으로 내면에 게으름이 들어가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무슨 정신수행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미친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며, 무엇을 떠나야 합니까? 공간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나의 진아로 가득차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만을 그대로 들여다 보자면, 마치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때리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치유는 해를 끼치게 되고,

정신수행의 실천을 게을리 함으로써 자신에게 최선의 관심사는 고통을 주게 됩니다.

모든 정신수행을 포기하게 되면 자유라는 이름에게 속박됩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수행을 실천하면, 자신이 스스로 성취한 영적인 단계의 지위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런 사람은 어떤 규칙적인 정신수행의 실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정신수행을 하는 사람은 단지 초기 열망자일 뿐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며,

이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는 브라흐마와 다른 신들도 정신수행을 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제 그런 무지(無知)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겠습니다.

깨달음은 규칙적인 탐구와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공부를 함으로써, 우리는 원초적이고 완전한 브라흐만을 깨달을 수가 있게 됩니다.

 

듣고 있던 제자가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공부해야 합니까? 자신의 신성한 자성을 깨닫는 정신수행의 실천요령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요청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람이 절대진리를 깨닫기 위한 정신수행의 세부 실천 방법에 대해서,

다음 절(節)에서부터 자세히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