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 20:56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속박과 해탈에 대한 설명
강의를 듣고 있던 제자가 말했다.
" 생각이 없이 무심으로 존재하는 비이원적인 브라흐만에 대한 설명을 베풀어 주시니, 잠깐동안이나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서 그것과 하나됨을 직접 체험해 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그와 같이 지혜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브라흐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평범한 세속생활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상(相)도 없는 무심(無心)의 행복은 세속적인 삶의 슬픔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흐만과 하나로 남아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인 담론을 들을 때는 자연스럽게 브라흐만이 되지만,
마음의 다양한 변화 상태 때문에, 그 하나됨에서 다시 빠져 나오는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들이 수시로 들락날락 하며 변하고 있습니다.
잠시 마음은 내면으로 들어가 브라흐만 안에 합일되었다가,
이내 거기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한번 다양한 마음의 상태와 관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상태는 목적없이 몇 번이고 계속 들락 날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들락 날락하는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마치 끈에 묶여서 끊임없이 뒤쪽으로 당겨지는 곤충과 같습니다.
영적인 설명을 들을 때 브라흐만과 하나됨의 경험이 있고,
몸이 떨어져 나가고 '나','너'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담론이 진행될 때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순간, 세속적인 범부의 삶을 사는 것은 모순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브라흐만이 된 사람이 어떻게 거기에서 되돌아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이 정도입니다.
브라흐만처럼 머물지 않는 때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브라흐만이 되어야 하거나 혹은 세속생활 속에 있어야 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양쪽으로 왔다리 갔다리 해야 되겠습니까?
영적인 담론이 진행될 때는 진아지혜가 강해지지만,
여기서 벗어나게 되면 힘이 약해지고,
다시 한번 진아에 대한 열망과 분발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브라흐만을 깨달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양쪽 모두에서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의 영적인 행복과 가정생활은 둘 다 엉망진창이 됩니다.
브라흐만의 지복 속에서 행복감을 즐기는 동안,
가정생활의 즐거움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서 그를 뒤로 끌어잡아 당기고,
가정생활에 열심히 노력하는 동안에는
브라흐만에 대한 열망이 다시 한번 나에게 일어납니다.
마치 브라흐만의 지복이 세속적인 삶에 의하여 빼앗겨지고,
속세 생활이 진아지혜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한쪽 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저의 마음은 불안하고 의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강의를 듣는 제자는 자신의 진퇴양란의 고민에 대하여 말하고 나서,
강의를 하는 스승에게 "저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나의 지성은 계속해서 브라흐만의 모습과 융합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묻습니다.
이제 강의를 하는 스승이 이것에 대해서 지혜롭게 대답해 줄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차분하고 주의 깊게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강의하는 스승이 말했습니다.
"몸을 버리고 속성이 없는 브라흐만이 된 자들만이 해탈했다는 뜻입니까?
바샤나와 같은 많은 위대한 현자들과 그외의 깨달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타락했거나 실패했다는 뜻입니까? "
듣고 있던 제자가 말했습니다.
" 베다 경전에서는 현자인 슈카데브와 반데브만이 해탈했다고 말합니다.
베다 경전에 따르면, 나머지는 모두 속박 속에 있다고 합니다. 베다 경전에서는 슈카데브와 반데브만이 해탈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경전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이런 식으로 베다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듣고 있던 제자는 베다 경전에서 두 현인만이 해탈했다는 것을 권위있게 강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강의를 하는 스승은 이에 대해서
"만일 전체 창조계에서 두 사람만이 해탈했다고 말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다른 사람은 해탈할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자들, 많은 금욕자들, 성취한 사람, 요기들
그리고 진아지를 가진 사람들은 완전히 스스로 만족했습니다.
그 외에도 브라흐마, 비슈누,시바 같은 위대한 존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우주공간의 옷을 입은 다타뜨레야입니다.
슈카데브와 밤데브만이 해탈되었고,
다른 모든 사람은 실패했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은 단순히 바보 지식인들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제자는
"그렇다면 왜 베다 경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는 강의하던 스승이 대답을 했습니다.
"베다 경전은 많은 기본적인 전제들을 내세우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기본설명에서 언급한 문자내용에만 주의를 기울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나 현명한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 깨어있어서, 이러한 문자내용의 기본적 전제에만 자신을 국한 하지 않습니다.
베다 경전의 이러한 모든 기본 설명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베다경전의 힘을 불신하게 될 것입니다.
베다 경전 속에 있는 지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방이 되었습니까?
그 많은 수는 누구도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만약 베다경전이 아무 효력도 없다면, 누가 베다 경전을 돌아보겠습니까?
베다경전은 사람들을 해탈시키는 능력 때문에 매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다 경전에 담긴 지혜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산더미같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베다 경전의 효험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다 경전, 샤슈트라(영적인 과학서적), 푸라나스(영적인 의미가 상징적으로 가득찬 신화책)에 담긴 지혜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행운이 많다고 현인들이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지혜를 알고나면 사람들은 순수해집니다.
더 나아가서 단 한 소절, 반 소절, 또는 심지어 한 소절의 일부,
혹은 단 한 단어만 듣는다 하더라도 인생 길에서 많은 불운과 실수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베다와 기타 고대 경전에서는 위대한 현자 브야사(Vyasa)의 중요한 인용문뿐만 아니라,
강력한 효력을 지닌 말할 수 없이 위대하고 신비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의 위대함은 여러 곳에서 언급되어 왔으며,
그 안에 담긴 지혜를 들려줌으로써 사람의 지성이 순수해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이미 해탈을 이룬 두 사람(슈카데브와 뱀데브)외에 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경전들의 위대함에 대한 주장이 사실로 전수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믿으십시오.
이 경전의 중요성은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이해되겠지만,
그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혼란의 근원이 될 뿐입니다.
베다 경전,사스트라(영성과학서적), 프라나스(영성신화집)의 힘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포함된 지혜에 효험이 없다면,
그 두 현자 외에 누가 다른 사람을 해탈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약 통나무처럼 생명이 없는 사람이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면,
슈카 데브가 그렇게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슈카데브가 해탈되었는데, 이것은 베다에 따른 진실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브라흐만일 뿐이지, 통나무처럼 생명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슈카데프가 브라만이라는 이유 때문에 생명력이 없었다면,
영원함과 일시적인 것 간의 분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브라흐만을 깨달은 자가 통나무처럼 생기를 잃고 있다면,
슈카데프 자신이 파릭시트왕 앞에서 바가바탐의 본문을 해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에 대한 분별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실예를 들 때에,
생명체와 무생물의 우주 전체를 깊이 숙고 하고 탐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순간에는 속성없는 브라흐만이 홀로 되었다가.
또 한 순간에는 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탐색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해설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예를 많이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슈카데브 자신은 바가바탐에 대한 좋은 설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속박 속에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히 지쳐서 쓰러져서는 안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사두구루의 가르침을 통해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해탈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자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삶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육체를 지니고 있기도 하며,
그리고 육체없이 해탈한 어떤 요기도 있다고도 하지만,
그러나 해탈된다는 것은 충만감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 해탈한 이들을 지반 묵타(Jivan Mukta)라고 하고,
물리적 육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자를 비차묵타(Vidcha Mukta)라고 합니다.
이들 두 가지 유형의 해탈을 제외하고,
항상 자유로워진 이들을 '요가스와라(Yogashwara)', '요가의 왕', 또는 '마스터'라고 부릅니다.
자기의 진아성품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마음의 안정과 고요함이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과 고요함은 여전히 육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가진 체험의 중요성입니다.
다른 것은 정말 쓸모가 없습니다.
자신만의 진아체험속에서 충만감을 얻어야 합니다.
마음껏 먹고 난 사람을 배고픈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에게 배고픈 사람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아 성품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는 육체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속박과 해탈은 육체의 동일시에 의존하는 느낌일 뿐입니다.
브라흐마(Brahma) 신과 다른 신들조차도 육체와의 동일시를 붙잡고 있는 한엔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슈카데브의 해탈이라는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해탈했다는 느낌 그 자체가 속박입니다.
해탈과 속박은, 그 자체로 완전한 진아성품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일 뿐입니다.
진아성품에는 속박이나 해탈, 둘 다 적용되지 않습니다.
해탈이라는 개념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자기 복부를 돌에 묶어서 확실하게 가라앉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 동일시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진아성품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내것'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만이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개념없이 말을 하거나 벙어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개념들이 없으면 그는 진실로 해탈이 됩니다,
본질적으로 가짜(허상)인 것에 어떻게 구속될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속박과 해탈이라는 개념이 모두가 거짓이고,
세 가지 속성(구나,파동성)에만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해탈이라는 어떤 느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실재(實在)에 대한 깨달음'을 지닌 사람은 영원히 순수합니다.
그에게는 해탈과 속박같은 것이 없습니다.
해탈과 속박은 환상의 속성인 마음 속의 관념입니다.
이름과 형태가 없는 곳에 어떻게 해탈의 개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해탈과 속박 모두 잊으면, 그 잊었다는 망각(忘覺) 그 자체도 잊혀집니다.
존재하는 개인이 있다고 말할 수 조차 없는데,
누가 구속되거나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속박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느낌을 붙잡고 그것에 묶여 있다고 느낄 때만 있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속박과 해탈에 대한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에고로부터 생긴 문제로서 망상일 뿐입니다.
환상을 초월한 무심(無心)의 안식처(安息處)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속박과 해탈이라는 것은 상상력에서 생겨나온 생각일 뿐입니다.
원칙적으로 상상은 진실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환상은 신기루와 같거나 하늘에 보이는 구름과 같으며,
깨어나자마자 거짓이라고 알려지는 꿈과 같다는 직유(直喩)가 사용되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묶여 있던 사람이 해방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고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꿈 속에 있는 사람이 깨어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로 해방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진아깨달음을 가진 사람들 뿐입니다.
이 순수한 진아 깨달음의 지혜를 통해서 (꿈속의) 해방이라는 개념이 뿌리째 제거가 됩니다.
속박과 해탈이라는 개념은 상상 속에서 의심만 일으킬 뿐입니다.
현자들은 항상 의심의 여지없이,
육체 동일시를 초월해 있는 실재(實在) 속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방금 주어진 설명에서 얻은 이해를 가지고,
어떻게 수행하며 살아가야할지, 그 방법에 대해서 해설하겠습니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다음에 설명되는 내용을 주의 깊게 경청해 주기 바랍니다.
- <스승과 제자의 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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