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5. 20:50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14개의 브라흐만
청자(聽者)들은 주의를 기울여서 듣기 바랍니다.
이제 나는 해탈열망자들의 목표인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 말하겠습니다.
귀중한 보석을 얻기 위해서는 흙을 채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네 개의 브라만들에 대한 설명은 이해시킬 목적으로 제공되지만,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이 지식은 전부 내버려야 합니다.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고는 어떤 사물을 설명할 수가 없고,
비이원성에 대한 설명은 이원적인 실예를 들어야 하며,
일차적 전제에 대해서 먼저 듣지 않고서는 최종 결말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없으며,
말의 표현 능력 없이는 어떤 예시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거짓에 대한 설명이 들려줘야, 그것을 확인해서 포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자연스럽게 마음 속 깊히 새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최종 결론"을 알 수 있도록,
열네 개 브라흐만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법문을 듣는 분들은 설명하는 동안 주의를 기우려서 듣기 바랍니다.
첫 번째 브라흐만은 " 말로서의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며,
두 번째는 "옴(OM)으로서의 브라흐만"이며,
세 번째는 "하늘로서의 브라흐만" 입니다.
이 이름들은 우파니샤드에 나옵니다.
네 번째 브라흐만은 "모든 것 속에 있는 브라흐만"이며,
다섯 번째는 "생명 에너지(生氣)로서의 브라흐만"이고,
여섯 번째는 "힘(권력)이 있는 브라흐만"이며,
일곱 번째는 "주시자로서의 브라만"이 있음을 이해하십시오,
여덟 번째는 "속성이 있는 브라흐만(Saguna),이고,
아홉 번째는 "속성이 없는 브라흐만?(Nirguna),이며,
열 번째는 "언설에 의한 브라흐만"이라고 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11 번째는 "체험으로서의 브라흐만",
12 번째는 "지복으로서의 브라흐만",
13 번째는 "실재(實在)의 형상으로서의 브라흐만",
14 번째는 "형언할 수 없는 브라흐만" 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열네 개 브라흐만의 이름들입니다.
이제 이 이름들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나서,
그 다음에는 " 진리의 본래면목(Swaroopa)",
그 자체의 비의적(秘意的)인 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브라흐만은 말을 통해서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써의 브라흐만"이라는 말은 실제로 경험이 없는 망상일 뿐임을 아십시오,
마찬가지로 "옴으로서의 브라흐만"은 한 마디 단어일 뿐이며,
브라흐만은 한 마디 단어가 아닙니다.
"하늘로서의 브라흐만"라고 하는 것은 광대함의 특징을 묘사한 것이며,
"모든 것으로서의 브라흐만"은 모든 곳에 넓게 편재해 있다는 특징을 묘사한 것으로서,
지극히 미묘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은 오대 원소가 혼합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브라흐만일 뿐입니다.
"모든 것 속에 있는 브라흐만"이라는 이름은 우파니샤드의 기본적인 주체입니다.
이제, "생명 에너지인 브라흐만"이라고 불리는 브라만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생명 에너지인 브라만'은 오대 원소 형태로 환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므로
생명 에너지로서의 브라흐만이라고 부릅니다.
이 생명 에너지는 생명체가 활기있게 살아나가기 위해 약간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을 주는 것이 "힘으로서의 브라흐만"(Satta)라는 원리입니다.
이 힘과 생명 에너지를 알거나 주시(목격)하는 것을 "주시자로서의 브라흐만"이라고 합니다.
알고 관찰하는 능력 그 자체인 이 "주시자"는 속성이 존재하므로,
"속성 있는 브라흐만"(Saguna Brahman)이라고 합니다.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것을 " 속성이 없는 브라흐만(Nirguna Brahman)이라고 합니다.
이제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브라흐만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언설에 의한 브라흐만"이라고 부릅니다만,
브라흐만의 체험은 말로는 절대로 묘사할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을 말합니다.
"체험으로서의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지복(至福, 궁극의 행복)의 체험을 지니고 있는데,
그 비의적(秘意的)인 것을 여기서 밝히겠습니다.
이 "지복으로서의 브라흐만"은 연속적이며, 뚜렷한 특징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어떤 대화도 불가능한 곳입니다.
이들이 순서대로 묘사한 14개의 브라흐만입니다.
이것들을 보고 이해하게 되면, 해탈열망자(수행자)들은 환상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브라흐만은 영원하며, 환상적인 것은 모두 일시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이제 14 개의 브라만에 대한 최종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로 된 브라흐만은 어떤 체험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말일 뿐이고,
환상(헛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보면,그것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옴(OM)으로서의 브라흐만'은 한마디 소리에 불과합니다.
성찰(명상)이 '옴'을 이해할 정도로 깊어질 때에,
그것이 또한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브라흐만은 하늘과 같다고 하지만,
하늘은 '진아 깨달음'으로 파괴될 수 있는 허공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늘도 영원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타난 모든 것은 끝이 올수 밖에 없으므로,
'모든 것 속에 있는 브라흐만'도 또한 파괴 될 수 있습니다.
우주의 최후 해체는 베단타의 경전에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최종 해체가 있는 곳에 어떻게 원소의 존재가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것으로서의 브라흐만"에는 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깨달은 현자는 생명기운이 없는 것이 움직일 수 있다거나,
혹은 원래부터 속성이 없는 것이 속성이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5대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의 파멸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므로 브라흐만이 '모든 것'이라는 결론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습니까?
이제 "모든 것"으로서의 브라흐만"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써 충분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인 브라흐만"은 영원하지 않고, 파괴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보고 있는 '보는 자(주시자)'조차도 또한 끝나는데,
무엇을 보는 누가 거기에 있겠습니까?
이제,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것에 관련해서,
그 모든 것들이 본질적으로 환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모든 것에 생명을 주고,움직이게 해주는 생명 에너지도 또한 파괴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힘으로서의 브라흐만"에서, 힘(권력), 즉 사타(satta)는 어떤 것들에 대한 권력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시자로써의 브라흐만'도, 대상이 아무 것도 없으면, '주시자'의 역활 또한 거짓인 것입니다.
"속성을 가진 브라흐만"(Saguna Brahman)에서,
모든 속성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 눈에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속성을 가진 브라흐만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추가로 증거가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속성없는 브라흐만"(니르구나 브라흐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혀진 관련성이 무엇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어떤 속성을 먼저 마음 속에 떠올리지 않고서 어떻게 어떤 것을 알게 되거나,
어떤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환상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나 상상 속의 구름과 같다고 합니다.
만약 마을이 없다면 어떻게 경계라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어떤 개인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원적인 비유들이 어떻게 비이원적인 것에 대해 진실되게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힘이 없는 환상,아는자 없는 대상,
생명 에너지 없는 관성(慣性)의 상태 같은 것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힘(권력), 생명 에너지, 주시자, 등은 모두 속성이 있는 것들입니다.
속성이 없는 것이 속성이 있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까?
브라흐만에게는 속성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이름표들도 또한 영원하지 않은 이름일 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속성이 없다'는 말은 브라흐만의 이름표입니다.
그러한 많은 이름들이 붙혀지기는 하지만,
"속성 없는 브라흐만"은 말로 된 설명일 뿐이며,
말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복의 체험이란 개인적인 상태 또는 마음 상태의 느낌인 것입니다.
브라흐만의 완전성에는 개인적인 마음상태가 있을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브라흐만은 형언할 수 없는 존재여서,
어떤 정신적 태도도 그것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특정한 태도나 상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표시된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태도도 없다고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무심(無心)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인지(식별) 상태에서도 오염되지 않는 요기들의 안식처입니다.
실재(實在)는 어떤 인지(식별)상태에서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삶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그 자체로 무위적(無爲的)인 "자연 삼매"(Sahaja Samadhi)입니다.
식별(認知)의 끝 너머인 그것이 그 자체로 " 궁극의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베단타에서 확인된 진리이며, 자아의 진아체험입니다.
이와 같이 브라흐만은 환상의 흔적이 없이 영원한 존재입니다.
체험한 사람은 진아 체험의 비밀을 이해합니다.
자신의 체험에서 개념을 버림으로써
이 진아 체험에 대한 만족감을 얻습니다.
만약 어떤 것을 상상해야 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하면 상상력은 자연스럼게 파괴됩니다.
그런 다음에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차로 아무 것도 없는 '있음"만 남게 됩니다.
상상력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어떤 방향으로든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을 자기의 "진아 형상'의 방향으로 몰아 넣는다면,
그것은 변상(變相)이 없는 '그것'에 의하여 전체에 두루 펼쳐지게 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면 거기에는 상상력이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에게 변상(變相)이 없으면 상상력에 의한 존재는 거기에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소속이 없는 것'과 만나면 그 자신도 저절로 무소속(無所屬)이 됩니다.
브라흐만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며, 손으로 주거나 손 안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두 구루가 한 말씀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절(節,7-3) 이후에도, 해탈열망자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설명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순수한 브라흐만"의 체험을 자연스럽게 얻게 될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

'성인들 가르침 > 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원적인 생각(相)을 제거하기 (0) | 2024.01.30 |
---|---|
순수 브라흐만에 대한 설명 (0) | 2024.01.27 |
브라흐만에 대하여 (0) | 2024.01.23 |
상서러움(행운)의 서막 (0) | 2024.01.20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0) | 2024.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