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11. 21:14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속성이 있는 신'에 대한 숭배
듣고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깨달음의 지혜(Jnana)로 보이는 것은 거짓인데, 어째서 속성있는 신을 숭배하도록 해야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만약 깨달은 지혜보다 더 우월한 것이 없다면, 어째서 숭배가 필요한 것입니까?
사람들은 숭배를 통해서 무엇을 얻게 됩니까?
본질은 속성이 없는 것인데(nirguna), 거기서는 속성이 있는 것은 보여질 수가 없습니다.
속성이 있는 신을 숭배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파괴될 수 있는데, 파괴될 수 있는 것을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실재적인 것을 숭배함으로서, 누가 실재를 포기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진리를 체험했는데, 왜 예배의 규율을 따라가야 합니까?
왜 실제를 포기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까?
검증된 깨달음의 체험은 속성없는 니르구나 안에서만 해탈에 도달합니다.
속성있는 신에게 무엇을 바쳐야 하겠습니까?
존경하는 스승님이시여, 부디 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승님은 우리들에게 속성있는 신은 파괴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또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속성있는 신에게 참배하고 찬양 노래를 불러야 합니까?
스승님에 대한 존경심으로 저는 이 질문을 하기가 다소 망설여지지만,
이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고,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성취할 것을 얻었다면, 어째서 영적인 수행을 더 이상 해야 합니까? "
이에 스승이 대답하기를,
"듣는 사람이 혼동해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답변을 들어 보십시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영적인 사람의 주요한 방향입니다.
가르침을 거스르게 되면 반드시 곤경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속성이 있는 신에 대한 숭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듣고 있던 사람이 질문합니다.
"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예배의 의무에 대한 이유로 무엇을 고려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일로 인해서 신이 누군가의 운명을 파괴시켰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변화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사람은 어떤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명확하므로 따라야 하겠죠.
그가 권위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의 이점은 무엇입니까? 부디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스승이 물었습니다.
"깊히 생각해 보고, 깨달음의 지혜에 대한 징표가 무엇인지 나에게 한번 말해 보시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대는 여전히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하며,
똥과 오줌을 몸 밖으로 흘려 내보내는 생리작용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그대와 가까운 사람들이 만족해야 한다고 계속 느끼고,
가까운 사람과 닟선 사람들을 계속 알아봅니다.
그대는 이 모든 일들을 하지만,
그대는 신에 대한 숭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어떤 유형의 지식입니까?
분별력으로부터 태어난 지혜(깨달음)를 가지면, 모든 것이 거짓인 것으로 알려지지만,
모든 활동이 포기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신에 대한 숭배만 포기하고 싶습니까?
말해 보시오.
그대는 겸손한 척하면서 상사에게 굽실거려도 신은 믿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지식입니까?
비슈누,시바,브라마 등도 모든 신에게 순종하는데,
단순한 인간존재인 그대가 그를 숭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라마 경은 우리의 혈통입니다.
라마 경은 궁극의 진리입니다.
그는 권력자 중 가장 강력해서, 신들도 해방시켰습니다.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우리는 그를 섬김으로써 깨달음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에 대한 어떤 헌신적인 감정이 없다면 반드시 몰락할 것입니다.
스승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을 어떻게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생각의 중요성을 어떻게 그대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현명한 사람만이 이해합니다.
깨달은 위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부정하는 자들은,
마치 왕국과 왕좌를 쥐고 있다가 운없이 내쫏긴 자처럼
큰 재산을 잃었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마음 속에 "나는 위대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브라만의 지혜"가 없습니다.
그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자기 육체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있음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자기가 깨달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재(實在)를 숭배하지 않고,
또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내면 속에 육체 동일시에 대한 믿음이 숨겨져서 아직도 남아 있음을 이해하십시오.
만일 숭배심이 없으면, 깨달음에 대한 지혜(Jnana)도 없습니다.
자기 몸에 대한 자부심(육체 동일시)을 불필요하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라마 경을 숭배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브라만의 지혜를 말할 수 있습니다.
속성을 가진 신은 교만하고 악의적인 사람들을 멸망시키고,
헌신적인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기적이 실제로 체험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라마 신의 축복으로 그대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소원이 무엇이든지 성취되고.
모든 장애물이 완전히 파괴되는 체험이 오게 됩니다.
깨달음의 지혜는 라마 신을 숭배함으로써 얻어지고,
라마신을 숭배하게 되면 그 사람의 위대함이 더욱 증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성이 있는 신에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사실이고, 검증된 경험이지만,
그대들은 이것을 진실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검증해서, 실제 자기 체험으로 실감해야 합니다.
라마 신을 기억하면서 모든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즉시 성공합니다.
라마가 실제적인 행위자임을 마음 속에 간직하십시오.
"행위자는 나 자신이 아니라 라마 신이다. 나는 없다"
이와 같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속성을 지닌 신에게 완전히 바치게 되면,
속성이 있는 신과 자신이 하나로 동일시 되며,
그런데 실제로는 속성없는 절대진아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譯註 : 라마 신이라든가 기타 현실에서 숭배하는 거의 모든 신들, 속성이 있는 신들은 그 이름과 상징표시가 각기 다르고 다양하긴 하지만. 한 가지 통합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 즉 이원화 현상세계의 뿌리 의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단일하고 평등한 존재의식이 다양한 이름과 성품으로 고대부터 사람들이 상상하여 그려진 것이 '속성이 있는 신'인데, 여기서 예를 들어 라마 신을 속성이 있는 신으로 대표적으로 선정하여 소개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목표는 이원적인 의식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처음부터 절대 본체를 목표로 수행할 수 없으니깐, 우선 이원화 세계의 뿌리인 "내가 있다" 존재의식을 목표로 수행을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식을 벗어나서 보편적 존재의식의 뿌리로 들어 가는 순서로 수행을 합니다. 일단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되는 과정에서, 계속 꾸준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다 보면 수행자체가 사라지는 경지가 오는데, 중간단계인 존재의식상태를 넘어가는 고개에 가까이 온 상태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윽고 속성없는 절대 본체의 삼매상태에 다다르게 됩니다.
말하자면 '속성있는 신'과 일체가 되면 '나'라는 느낌의 개인 에고에서 벗어나서, '속성 없는 신'인 진아영역에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는 열망자들에게 끈질기게 일단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되라고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최종목표가 아니라. 초보자들이 설정할 일종의 첫번째 가상 목표 라고 할 수 있수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일종의 가상 목표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정도 수준 까지민 와도 온갖 어려운 경전의 법문이 잘 풀려서 언설(言說)도인으로 중간에서 정체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이 "내가 있다"로 가는 길에서 가장 쉬운 방편이 라마,크리슈나,붓다 등"속성있는 신"을 숭배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불교의 각종 염불수행(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옴마니반메홈, 나무관세음보살 등) 등이 이런 "속성이 있는 신"에 대한 예배수행방식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처음부터 절대진아상태를 흉내내면서 침묵수행하는 묵조선이나 지혜수행인 간화선, 위파사나, 등 , 신이 아닌 의식의 지(止)나 관(觀)에 연관된 여러가지 개념적인 수행을 하더라도 절대 진아에 바로 들어갈 수는 없고, 일단 수행행위의 뿌리단계(이원화와 비이원화의 중간점)인 "내가 있다" 뿌리단계를 거쳐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속성이 있는 신"을 숭배하라고 권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속성 있는 신"이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상징한 것으로 개인 에고가 나온 뿌리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속성 있는 신"을 숭배하는 수행을 통해서 신과 일체가 되어, '나'라는 에고 느낌을 완전히 벗어나야 합니다. 수행은 이 "속성있는 신"마저 사라졌을 때에 에고가 완전히 사라지고, 이어서 속성 없는 신인 진아영역에 접근하게 됩니다.]
만일 그대가 행위자라고 말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가 진정한 비이원적인 체험을 하고 싶다면,
지금 즉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내가 행위하는 자다"라고 말한다면, 피곤할 뿐입니다.
라마 신이 행위자라고 말함으로써 성공과 명성, 능력을 얻게 됩니다.
만약 "내가 행위하는 자다"라는 느낌이 든다면,
신과는 단절된 느낌이 있습니다.
신이 행위자라는 느낌이 있을 때에는
사람은 축복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하지만,
신의 존재는 오랜 시간입니다.
우리는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신은 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에 모두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라마를 숭배하는 사람을 존중합니다.
브라흐마와 가장 탁월하게 존경받는 사람들조차도 라마를 열성적으로 찬양합니다.
만약 헌신자인 우리들이 우리들의 지식 때문에 속성을 지닌 신들을 숭배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진아에 대한 신념이 결핍되어 결국은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자만심 때문에 신의 위대함을 무시한다면, 손해를 입는 것은 바로 그 사람 자신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들은 위대한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신을 숭배하게 되면, 육체의 자기 동일시가 줄어들게 되고,
분별력에 의해서, '나'라는 에고 느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이 덕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라마 신의 숭배를 통해서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알려집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의 모습은 깨달은 이(Jnanis)의 관점에서 보면 꿈과 같습니다.
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성자들과 현자들은 이 현상셰계가 거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듣고 있던 사람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만약 현상세계가 거짓이라면, 왜 그것이 여전히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됩니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 절(節)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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