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4. 22:50ㆍ성인들 가르침/기타 비이원론 가르침
우리 존재의 확실성
누가 우리에게 "당신은 존재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잠시 후 완전히 완전히 확신하며 "예, 저는 존재합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내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며 아는 그것은 무엇일까요?
'나'가 무엇이든 그것은 알려지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처럼 확신하며 단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한다고, '내가 있다'고 확신하며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즉 현존은 알려지고 경험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참된 자기라고 아는 이 '나'는 우리의 참된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알려지지 않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나'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있음을 친밀하게 아는 이 '나'는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앎입니다.
우리가 '나'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 자신의 '존재'를 아는 이 앎은 우리가 아는 가장 단순하고 분명하며 평범하고 친밀한 경험입니다.
이 '나'는 현존하며 알므로 '앎'이라고 합니다.
바로 지금 나는 내가 안다는 것을 압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안다는 것을 아는 '나'는 스스로 압니다.
그러니 앎을 아는 것은 앎입니다.
"나는 아는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앎을 아는 앎의 경험으로 갑니다.
앎을 아는 것은 앎입니다.
앎은 외부의 어떤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알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몸이나 마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앎은 직접, 친밀하게, 스스로, 자신을 통해서, 자신으로서, 홀로, 자기 자신을 압니다.
* * *
이것이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자신에게 다시 물어보십시오.
"나는 존재하는가?"
"예"라고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생각을 참고합니까?
"오늘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까?"와 같은 생각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에게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주는 것은 그런 생각입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말을 읽거나 듣는 동안에 이전의 생각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경험을 하는 내내 '나'는 늘 현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확실성은 생각처럼 덧없고 순간적인 어떤 것에서 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의 감각들도 언제나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확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나가는 감각을 참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 세계에 대한 지각(보이는 모습, 소리, 맛, 감촉, 냄새)을 참고하지도 않습니다. 이 '내가 있다'(우리의 존재에 대한 단순한 '앎')는 스스로, 자신을 통해,
홀로 자기 자신을 압니다.
* * *
마치 해가 모든 대상을 비추며 보이게 해 주듯이,
모든 경험을 비추며 모든 경험을 알게 해주는 것은 당신, 나, 앎입니다.
지금 무엇이 보이든 그것을 보고,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든 그것을 듣고, 지금 일어나는 생각과 느김을 아는 그것은 당신, 나, 앎입니다.
'몸'이라고 불리는 지금 일어나는 감각을 아는 것도 당신, 나, 앎입니다.
당신, 나, 앎은 이 모든 것을 알지만,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당신, 나, 앎은 생각, 감각, 지각이 아니지만, 그런데도 당신은 부정할 수 없이 현존하며 압니다.
우리가 참된 자기에 관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우리는 철학이나 비이원론의 이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친밀한 직접 경험만을 참고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아는 이 단순한 앎을,
우리가 현존하며 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는 그 경험을 참고합니다.
그것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앎을 당신의 경험에서 찾아보십시오.
우리는 자신이 앎임을 친밀하게 압니다.
마음, 몸, 세계를 살펴보면서 거기에서 앎을 찾을 수 있는지 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뿐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아는 것이 무엇이든, 몸, 마음, 세계의 이런 대상들을 비추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 자체를 대상으로서 찾을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십시오.
먼저, 주의를 지금 일어나는 생각이나 이미지로 향하십시오.
이제 지금 일어나는 느낌으로 향하십시오.
이제 얼굴, 손, 발의 따끔거리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향하십시오.
이제는 보이는 글자나 들리는 소리, 바닥이나 의자의 감촉, 또는 방 안의 모습 같은 지각으로 향해 보십시오.
이제,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에 주의를 향해 보십시오.
이렇게 알려지는 대상에서 당신이 참된 자기, 앎을 찾을 수 있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의 영역에서는 우리의 참된 자기를 찾을 수 없디는 것을 자신의 친밀한 직접 경험으로 분명히 보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생각, 이미지, 기억, 느낌, 감각, 지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상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있습니다.
나는 존재합니다.
이제 우리의 참된 자기를 대상에서는 찾을 수 없음을 얼게 되었으니,
한 걸음 더 니아가서 우리의 참된 자기를 대상에서 찾는 일은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십시오. 이를 이해하면 우리의 참된 자기를 대상에서 찾는 일이 끝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찾고 있는 참된 자기입니다.
그리고 이 참자기, 즉 대상이 아닌 앎을 아는 유일한 길은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앎이 자기를 아는 방법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아는 현존'으로 존재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것을 허거나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늘 그것입니다. 그저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알면서, 그것으로 존재하십시오.
* * *
이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앎에 대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성질이 없다면, 그것이 몸, 마음과 같은지 내가 어떻게 알지?"
대답은 "모른다 ! " 입니다.
우리의 참된 자기 즉 앎이 몸, 개인, 남자, 여자, 생각, 느낌 등과 같다는 어떤 경험적인 증거나 지식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질(대상이 아닌 순수한 앎)이 이런 것들과 같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직 생각뿐입니다.
다시, 이는 실제 경험이며 비이원적 찰학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의 몸'이라고 불리는 경험으로 가 봅니다.
눈을 감고 있다면, 몸에 관해 우리가 경험하거나 아는 것은 단지 따끔거리는,
일정한 모양이 없는 감각의 무리입니다.
모든 경험을 알게 해주는 앎을 이 감각 중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 감각을 스캔해 보십시오.
생각을 아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감각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듣거나 보는 것, 우리의 생각을 아는 것이 감각입니까?
감각이 듣거나 보거나 알 수 있습니까?
아주 구체적으로, 당신이 경험으로 보십시오.
'내 손'이라 불리는 따끔거리는 감각으로 가서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런 말을 듣거나 보는 것이 이 감각인가?"
'내 머리'라 불리는 따끔거리는 감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이나 지금 일어나는 경험을 듣거나 보거나 아는 것이 이 감각입니까?
내가 친밀하게 나 자신이라고 아는 '아는 현존'이 '머리'라 불리는 이 감각 안에 있습니까?
거기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감각만을 발견합니까?
다시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을까?"라는 생각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그 생각이 이런 말을 듣거나 봅니까?
생각이 듣거나 볼 수 있습니까?
경험을 아는 것은 마음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모릅니다.
이른바 마음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지금 일어나는 생각이나 이미지 뿐입니다.
나의 본질이 몸이나 마음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마음을 알고 몸을 알아차리는 '아는 현존'이지만,
나 지신을 찾아보면 어떤 대상에서도, 어떤 생각, 느낌. 감각, 지각에서도 나 지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나'를 순수한 감성이나 앎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나 관찰될 수 있는 성질이 없으며, 그러므로 무한하다고
(공간으로 끝없이 확장된다는 뜻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차원도 없고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는 뜻으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시 자신을 경험하는 데 앎은 무한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경험(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경험)을 단순하게 가까이 들여다 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부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부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부재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존하며 아는 '어떤 것'은 우리가 '앎'이라고 부르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의 본질이 늘 현존한다는( 시간 안에서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늘 지금 현존한다는 뜻에서) 것은 우리의 단순하고 치밀한 직접 경험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자신의 경험 안에서 앎은 영원합니다.
'무한한'과 '영원한'이라는 말은 특별해 보여서, 우리는 이 '아는 현존'이 분명 특별하고, 멀리 있고, 알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인 순수한 앎은 사실 우리에게 가장 분명하고 친밀하며 평범하고 익숙한 경험입니다.
그저 자신이 이 '아는 현존'임을 알면서 지금 있는 그대로 여기에 있으십시오.
-루퍼드 스파이라 지음, 김인숙,김윤 옮김 <순수한 앎의 빛> 침묵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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