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 실제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83)

2023. 8. 9. 21:58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 침묵의 맹세는 쓸모가 있습니까?

(마하리쉬) : 내적인 침묵이 자기 순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에고의식 없이 사는 것입니다.

 

 : 출가자에게는 홀로있음이 필요합니까?

 : 홀로 있음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간의 번잡한 곳에 있으면서도 완전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홀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숲 속에 있어도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홀로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홀로 있음은 마음의 한 태도 입니다. 세간사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홀로 있음을 얻지 못합니다.

집착없는 사람은 늘 홀로 있습니다.

 

 : 어떤 것이 침묵입니까?

 : 말과 생각을 초월한 그 상태가 침묵입니다. 그것은 마음 활동이 없는 명상입니다.

마음을 조복(調伏)받는 것이 명상이고, 깊은 명상은 영원한 말(침묵)입니다.

침묵은 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연속적인 흐름입니다.

그 흐름이 말하기에 의해 중단되는데, 왜냐하면 말이 이 '무언의 언어'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강설(講說)은 개인들을 몇 시간 동안 즐겁게 해 줄지 모르지만, 그들을 향상시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침묵은 영구적이며 전 인류에게 이익을 줍니다. - - - 침묵이라는 것은 웅변을 의미합니다. - - - 그것은 최상의 언어입니다. 말이 그치고 침묵이 지배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 그럴 때 우리는 생각을 서로 어떻게 소통할 수 있습니까?

 : 이원성의 느낌이 존재한다면 그것(의사소통)이 필요해지지요.

 

 : 왜 바가반께서는 돌아다니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하지 않으십니끼?

 : 그대가 제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설법이란 것이, 연단에 올라가서 주위 사람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입니까?

설법은 지(知)의 단순한 소통이며, 그것은 침묵 속에서만 실재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가르침을 듣고도 자기 삶을 바꿀 만큼 감명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사람과, (스승의) 성스러운 친존에 앉아 있다가 얼마 후에 자신의 삶에 대한 안목이 완전히 바뀌어서 돌아가는 사람을 비교해 보십시오.

효과 없이 큰 소리로 설법하는 것과, 말없이 앉아서 내적인 힘을 방출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또 말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추상적인 지(知)가 있는데, 여기서 에고가 일어나고, 그것이 다시 생각을 일으키며, 생각이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말은 원래 근원의 증손자입니다. 그 말이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침묵을 통한 설법은 얼마나 더 강력하겠는지 !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단순하고 적나라한 진리, 그들의 일상적이고 항상 존재하며 영원한 체험이기도 한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진리는 자기(진아)의 진리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이 진리를 듣는 것조차도 좋아하지 않고, 저 너머에 있는 것, 찬당, 지옥, 환생같은 것을 알려고 열심입니다.

그들은 신비를 사랑할 뿐 진리를 사랑하지 않게 때문에 종교들은 그들의 구미를 맞춰주지만,

이는 그들에게 진아를 납득시키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대가 어떤 수단(수행법)을 사용하든, 마침내 진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왜 지금 여기에서 진아에 안주하지 않습니까?

디른 세계를 구경하거나 추측해 보려면 자기(진아)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 세계들은 진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조차도 대상들을 볼 때는 진아를 볼 뿐입니다.

 

                                                                       - 대성 옮김 <마하리쉬의 복된 가르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