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법사의 조론 공부6] 물불천론(物不遷論)- 1

2023. 7. 18. 23:21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제 1장 물불천론(物不遷論)(1)

- 현상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감산덕청의 [약주]

여기서는 속제(俗諦)가 진체(眞諦)와 상즉한 점을 논변하여 이를 관찰할 대상의 세계로 삼았다.

'물(物)'이란 관찰할 객관인 현상의 만법을 지적하였고,

'불천(不遷)'은 만법의 자체는 성공실상인데도 일상적인 범부의 허망한 마음으로 만법을 보면 흡사 천류함이 있는 듯도 하다는 말이다.

만일 반야로써 이를 관찰한다면 모든 법의 실상은 당체가 적멸(寂滅)한 진상(眞常)이어서 끝내 천류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없다.

이른바 본문에서 '움직이면서 구를 만한 법은 하나도 없다' 한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의타기로 연생하는 제법은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만법마다의 당체가 본래 스스로 천류하지 않는 것이지 현상의 차별적인 모습은 천류하나 그 자성은 천류하지 않는다 함은 아니다.

이처럼 사물마다 천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물에 나아가 바로 진여의 성공인 것이다.

사물자체가 진여의 성공이라면 허망한 마음에 해당할 만한 법은 끝내 하나도 없다.

이러한 이치로써 현상의 사물을 이루었으므로 사물마다 모두가 진여이다.

모든 법의 성공실상이 여기에서 나타났다 하리라.

논주(論主)의 승조는 <유마경>, <법화경>을 으뜸으로 삼고 제법의 성공실상을 심오하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물불천론>은 속제에 해당시키고, 천류하지 않는 속제에 나아가서 바로 진여성공이라 하였으니 <물불천론>의 종지가 마음에 환하다 하리라.

 

[본문]

중생에겐 생사가 교대로 뒤바뀌고 대지에는 한서가 번갈아 천류하며,

사물은 움직이면서 유전함이 있다함은 일반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주해]

천류하지 않음을 밝히려 하면서 우선 천류하는 모습인 생사와 춥고 더움의 논리를 수립하여 관찰할 세계로 하였다.

논리의 요점은 천류하는 사물에 나아가서 천류하지 않는 실상을 보면,

차별적인 사물의 모습은 천류하나 그 자성은 천류하지 않음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번뇌의 미혹함 때문에 사물은 천류한다 말하나

깨달은 사람에겐 천류가 바로 천류가 아닌 성공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한 것은 논주가 제법의 실상을 오묘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일상적인 감정을 총괄해서 배척하였다.

<법화경>에서는 말하기를, '삼계(三界)가 있는 그대로 삼계로 보는 것만 못하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태우는 겁화(劫火)의 큰불이 활활 타오른다 해도 이 국토는 안온하다. 이를 비유하면 황하의 물이 사람에겐 물로 보이고 귀신에게는 불로 보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미혹과 깨달음의 분야도 이와 같다.

 

[본문]

왜냐하면 (미혹과 깨달음의 이유를 묻고 풀이하였다).

<방광반야경>에서는 말하기를,

'제법에는 현재가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가거나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흘러 옴도 없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면서 전변함도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주해]

<방광반야경>의 말을 인용하여 <물불천론>의 근본주체를 단정하고, 그 논리를 수립하였다.

이 의미는 <방광반야경> 제7권에서 말한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제법은 현재가 과거로 흘러가지도, 과거가 현재로 흘러오지도 않는다' 한 것을 인용하였다.

이는 바로 <법화경>에서 '제법이 제 법의 제 위치에 안주하여 세간의 모습이 변치 않고 영원히 안주한다' 한 것에 해당한다.

이는 모든 법의 실상은 당체가 여여(如如)하여 본래 흘러가거나 흘러 오면서 움직이고 구르는 모습이 없음을 말하였다.

불안(佛眼)으로 이를 관찰하면 진공(眞空)인 제법은 고요하나,

법부는 무명(無明에 미혹한 허망한 견해로 보기 때문에 사물에 찬류함이 있는 듯한 것이다.

이것으로써 <물불천론>의 근본 종지를 삼았다.

 

[본문]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서 '움직이면서 구름이 없다' 했던 것을 연구해 보자.

어찌 움직이면서 구르는 것을 버리고 고요함을 찾았겠는가?

반드시 움직이는 모든 현상의 모습에서 고요한 진공을 구해야만 한다.

[주해]

이는 윗 문장에서 말했던 종지에 의거하여 <물불천론>의 자체를 드러낸다.

<방광반야>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 종지를 연구해 보자.

이는 움직이는 사물에 나아가서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상(眞常)을 본 것이지,

움직이는 현상을 버리고 본질의 고요한 이치를 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본질의 이치로써 이루어진 현상의 사물이기 때문에

법마다 모두 진상이어서 제법의 당체는 상주불변(常住不變)이다.

이는 사물을 떠난 밖에서 진상의 이치를 찾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논문에서는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고만 말했을 뿐,

따로 본질의 이치가 천류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물에 나아가서 천류하지 않는 본질의 이치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든 법의 움직임 속에서 본질의 고요함을 구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물불천론>의 논문에서 수립한 의미에는 네 단계가 있다.

여기에서는 처음인 동정(動靜)의 편에서 세계가 천류하지 않음을 밝혔고,

다음으로 세계(境)의 편에서 사물이 천류하지 않음을 밝혔으며,

세 번째는 고금(古今)의 편에서 시간이 천류하지 않음을 밝혔고,

네 번째는 시간의 편에서 인과(因果)가 천류하지 않음을 밝혔다.

여기서는 동정의 편에서 세계가 천류하지 않음을 밝혔다.

 

[본문]

반드시 제법이 움직이는 데서 고요함을 구하기 때문에

제법은 움직이지만 항상 고요하고, 움직임을 버리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기 때문에

고요하나 움직임을 더나지 않는다.

[주해]

여기서는 종지의 자체에 의지하여 그 의미를 풀이하였다.

반드시 제법의 움직임 가운데서 본질의 고요함을 구하면

현상의 모든 움직임이 목전에 나타난다 해도 마음과 세계가 담연(湛然)하다.

그 때문에 '움직이지만 항상 고요하다'라고 말하였다.

굳이 움직임을 버리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기 때문에

마음과 세계가 둘이 아닌 하나의 중도는 텅비고 한가하여,

마음에 감응하는 세계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해도 중도에 화합함을 잃지 않는다.

이는 <화엄경>에서 '보리의 도량을 떠나지 않고, 일체의 세계에 보편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른바 '부처님이 법신(法身)은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중생 앞에 보편하게 나타나네.

빠짐없이 인연따라 감응하시나 항상 보리좌(菩提座)에 계시네'라고 한 경우와 같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동(動)과 정(靜)이 둘이 아닌 종지를 밝히기 어려우리라.

 

                                                                         - 송찬우 옮김 <肇論(조론)> 경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