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체험 (1)

2023. 7. 15. 12:05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1.직접지(直接知)

 

[본문]

진아만이 실재하는 눈이므로, 그 자체에 의해 알려지는 진아만이 진정한 직접지(直接知)라네. 그러나 진아의 소견이 없고 지각력 없는 사람들은 낯선 감각대상들에 대한 지(知)가 직접지라고 주장한다네.

[해설]

사두 옴 : 스리 바가반은 여기서 진아의 눈을 통해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각력 없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각력 없는 신체적 눈을 통해서만 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의 대상들에 대한 지(知)가 직접지(直接知)라고 말한다.

그러나 목전(目前)에 보이는 세계는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과 오관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진아, 곧 자기자신의 존재에 대한 지(知)가 어떤 낯선 대상에 대한 지(知)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직접적인 지(知)이다.

"내가 있다"는 최초의 지(知)가 있고 난 뒤에야 "세계와 기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지(知)가 생겨날 수 있고, 따라서 "내가 있다"를 제외한 어떤 지(知)도 직접지일 수 없다.

진아 만이 항상 직접적인 지(知)이다.

 

[본문]

(단 하나의) 한계 없는 눈으로 존재하며 빛나는 진아에게 3요소의 출현이 있을 수 있는가? 강력한 '지(知)의 불'이라는 눈이 바라봄으로써 목전에 나타나는 다른 모든 것들이 불태워지면, 일체가 진아일 뿐이라네.

 

[본문]

선과 악의 이원적 소견과 시간, 공간, 원인, 결과, 행위 이런 것들이 없고,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며, 분리가 없는 실재인 '의식'이야말로 무한한 눈이라네.

 

2. 항상 직접적인 체험

 

[본문]

내적 탐구로 얻게 되는 이익은 기만적인 '나'라는 관념(에고)의 소멸이 전부라네.

그것을 두고, 분명하게 늘 성취되어 있는 진아라는 실재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잘못이네.

[해설]

사두 옴 : <마하리쉬 복음> 제1권 제 6장에서 스리 바가반은 이렇게 말한다.

"공간을 만들려면 거추장스러운 물건들을 치우기만 하면 됩니다. 공간을 다른 데서 듫여 오지 않습니다." 또한 <대담> 의 대담 245 (두번째 답변)를 보라.

에고가 소멸되면 그것만으로 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아를 성취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본문]

순수하고 직접적인 명료함인 자신의 참된 성품은 열번 째 사람 자신의 경우처럼 (진아에 대한) 거짓된 망각이 제거되면 성취되며, 이때 경험하는 이익은 새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해설]

사두 옴 : 열 명의 바보가 강을 건넌 뒤 모두 무사이 건너왔는지 알려고 자신들을 세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면서 각자 자신을 세는 것을 잊어버렸고, 그래서 각기 아홉명 밖에 세지 못했다. 그들은 한 명이 강에 빠져 익사했다고 믿고 슬퍼했다. 그것을 본 한 나그네가,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그들 자신을 세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사람을 한 번씩 때릴 테니까 각자 맞을 때마다 큰 소리로 숫자를 세시오."

열 번째 사람이 맞고 "열"이라고 세자마자, 그들은 모두 외쳤다.

"그래, 어쨌거나 우리는 열 명이군. 잃어버렸던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실은 열 번째 사람이 새로 얻어진 것은 아니고, 그를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진아의 체험도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열매는 진아에 대한 외관상의 망각을 제거하는 것일 뿐이다.

 

[본문]

장신구의 형태가 (녹임에 의해) 사라질 때만 금 장신구가 금이 되고, 장신구 형태로 나타날 때는 금이 아닌가? 장신구처럼 마음이 만들어 내는 세 가지 개체(세계 ,영혼, 신)도 존재-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라.

[해설]

사두 옴 : 세계, 영혼, 신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로 보일 때조차도 실은 단 하나의 진아일 뿐이다.

그것들의 다양한 형상들이 사라진 뒤에야 진아가 된다는 것은 잘못이다. 실은 그 다양한 형상들의 바탕 혹은 실체인 진아만이 실재하며, 그 형상들 자체는 항상 실재하지 않는다.

 

[본문]

목걸이가 자기 목에 걸려 있는데도 그것을 (어디선가) 흘렸다고 착각한 여자가 자기 목을 더듬어서 목걸이를 되찾듯이, 심장 안에서 진아를 탐구하고 성취하는 것도 그와 같다네.

[해설]

그 여자가 실은 자기 목걸이를 잃어버린 적이 없듯이, 진아도 실은 결코 알려지지 않은 적이 없다. 따라서 진아지를 새롭게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여자가 자기 목을 더듬어 보고서야 목걸이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본문]

불가사의한 느낌('나'라는 느낌)을 탐구하는 길 외에는 행위 등 다른 길을 통한 어던 노력으로도 심장 안에서 빛나는 진아라는 보물을 얻고 즐길 수가 없다네.

[해설]

사두 옴 : 이 연에서 스리 바가반은 우리가 행위,요가, 헌신 혹은 지(知)와 같은 다른 어떤 길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다른 길들에서 노력하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참구하기 전까지는 진아의 지복을 성취할 수 없다는 당신의 판정을 분명하게 힘주어 내린다.

 

[본문]

평온등의 형태를 띤 따빠스를 통해서 우리가 훗날 체험하게 될 그 비할 바 없는 상태가 실재하는 상태라면, 그것은 그때 (미래에 그것을 체험할 때) 나 마찬가지로 바로 지금도 존재해야 한다네.

[해설]

사두 옴 : 만일 우리가 지금 진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고, 미래의 어느 때에 그것을 체험할 거리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아가 어느 때에는 존재하지 않고 다른 때에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것이 어느 때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다른 때에 생겨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아시 한 번 상실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것은 세 가지 시간(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아지는 실재하므로,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항상 성취되어 있고, 직접 체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같은 관념이 다음 연에서도 표현된다.

 

[본문]

그 상태가 지금은 없고 다른 때에야 얻어질 상태라면, 그 상태는 우리 자신에게 존대하는 본래적 성품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는)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이네.

[해설]

스리 무루가나르 : 앞 연에서 언급된 마지막 논지를 보라.

한 때는 오고 다른 때에는 사라지는 상태는 최종상태가 아니므로, 그것이 아무리 찬란하고 지복스럽다 해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의 본래적 성품 자체가 최종적 상태라면, 그것에게는 어떤 소멸도 없을 것이다. 구리 자신의 본래적 성품이 아닌 어떤 상태도 어느 때인가는 우리를 떠날 거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본문]

저것(브라만)도 전체일 뿐이고 이것(세계라는 겉모습)도 전체일 뿐이네. (이) 전체가 (저) 전체에 다시 합일 할 때에도 전체이고, (이) 전체가 (저) 전체에서 나올 때에도 전체만이 남아 있다네.

[해설]

이 연은 (이샤 우파니샤드의) 유명한 베다적 시구 "뿌라나마다하 뿌르나미담 - -" 을 각색한 것인데,

그 시구는 스리 바가반이 가끔 인용한 것이다.

스리 바가반의 가르침에 대한 어떤 주석서에서는 이 베다적 시구가 "브라만만 실재하고 (이름과 형상들의)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확언하는 것은 거짓이기도 하고 부질 없기도 하다"는 견해를 뒷바침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구에서 "저것도 전체이고 이것도 전체이다"라고 할 때, 그것을 브라만은 실재하고 세계 그 자체도 실재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스리 바가반의 가르침은, '(밧줄상의) 뱀이 뱀으로서는 실재하지 않지만, 빗줄로서는 실재하듯이,

전체 세계는 세계로서는 실재하지 않지만 브라만, 곧 전체로서는 실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은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저것(밧줄)은 밧줄이고, 이것(외관상의 뱀)도 밧줄이다. 이 뱀이 저 밧줄 속으로 합일될(사라질) 때에도 그것은 밧줄이다. 이 뱀이 저 밧줄에서 나올 때에도 (밧줄이 뱀으로 착각되어보일 때에도)

밧줄만 남아 있다. " 바꾸어 말해서 실은 (뱀은 없고) 밧줄만 존재하듯이 실은 전체인 브라만만 존재하며, 외관상의 뱀이 겉모습이듯이 외관상의 세계도 하나의 겉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라는 겉모습이 나오는 것(현상계의 출현)도, 그것이 다시 브라만 속으로 합일되는 것도 모드 실재하지 않는다. 브라만은 불변의 전체로서 항상 안아 있다.

 

[본문]

그것(브라만)은 지고의 허공이고, 그대도 지고한 허공이며, "그대가 그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그것(큰 말씀)도 지고한 허공이네.(요가 곧 합일에 의해서) 새로운 그 무엇도 거기에 보태지지 않고, 그 무엇도 거기서 제거되지 않는 그것이, 보편적 허공으로서 존재하고 빛나는 저 실재하는 전체라네.

[해설]

스리 무르가나르 : 우리는 실은 어떤 해탈의 성취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속박이 하나의 거짓된 심적 관념이므로, 해탈도 하나의 거짓된 관념에 불과하다.

진아와 별개로 어떤 진인도 없고 어떤 무지인도 없다.

절대적 진리의 상태에서는 어떤 지(知)의 가르침이나 큰 말씀도 없다.

(자신이) 진아의 본래적 상태를 상실했다는 생각조차도 거짓이고,

그 생각에 의해 야기되는 불행들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따빠스도 거짓이며,

그 안에서는 누구도 (따빠스를 통해) 안주를 다시 성취한 적이 없는 진지의 상태조차도 거짓이다 !

이 가르침은 진아만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본문]

비이원적 전체(진아) 외에는 '이것'이나 '저것'으로 덧붙여진 세간적 다수성 전체가 실재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 전체 위에 덧씌어진 하나의 완전한 환(幻)이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진인들의) 최종적 판정이라네.

 

[본문]

하나(진아)가 (외관상) 다수(세계의 대상들)로 되기는 하나 (실은) 그것은 어떤 것도 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고, 누구나 처음부터 그 하나로 존재하므로, (우리의 본래적 상태는 늘 직접 체험된다고 하는) 참된 지(知)와 합일되는 것이 해탈임을 알라.

 

[본문]

진아의 참된 성품은 둘이 없음을 탐색하여 그 진리를 이해한 뒤 그 진아의 실제 체험을 얻으려 애쓰면서 거듭거듭 비틀거리다가 (결국 낙담하여) 모든 노력이 가라앉을 때, 그럴 때 심장 안에서 빛나는 의식이 (우리가 얻으려고 한) 그 참된 성품이라네.

[해설]

사두 옴 : 이 연은 구도자의 실제 체험을 분명하게 묘사한다. 진지한 많은 구도자들이 청문과 성찰을 통해 진아의 참된 성품에 대해 알고 난 뒤에, 자기주시의 수행(일여내관)을 열심히 하지만,

거듭거듭 실패하다가, 결국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 지치고 낙담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이 연은 그런 구도자들에게, 모든 노력의 근본 원인인 마음이 이처럼 극도로 지쳐서 완전히 정지하는 바로 그 순간, 진아가 아무 장애 없이 명료하게 빛날 거라고 하면서 그들을 격려한다.

"꼰잠 뽀루(Konjam Poru)라는 타밀노래(이것은 "잠깐 기다려"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어 <스리 라마나 기땀 노레선집> 에 '노래 제15번'으로 수록되어 있다)가 이 상태에 도달하는 구도자의 마음 상태로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격려해 준다.

 

- 스리 무루가나르 지음, 대성 옮김 <진어화만> 탐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