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 21:57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ㅇ. 심장에 대한 이 집중이 요가와의 접점(接點)을 확립하듯이, 바가반은 가끔 헌신의 길인 박티(bhakti) 와의 친화성도 이야기 했으며, 두 길이 같은 목적에 이른다고 말했다.
완전한 헌신은 자기 자신과 별개라고 생각되는 신 또는 스승에 대한 에고의 완전한 순복을 뜻하며,
한편 자아탐구는 에고의 해소에 이르게 된다.
다음의 설명은 두 길이 어떻게 수렴되는지를 보여준다.
헌신자 : 만약 '나'가 하나의 환(幻)이라면, 환을 벗어던지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가반 : '나'가 '나'라는 환을 벗어 던지지만, 그러면서도 '나'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진아 깨달음의 역설(paradox)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거기서 어떤 역설도 보지 않습니다.
숭배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신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흡수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과 집중으로 자기 자신을 내맡깁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원래의 '나' 대신에 자기순복이 남긴 신의 자취가 있으며, 거기에 '나'는 소멸되고 없습니다.
그것은 헌신 혹은 순복의 최상의 형태이며 무욕의 극치입니다.
그대는 '나의' 소유물 중에서 이런 저런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나'와 '내 것' (이라는 생각)을 포기하면 일거에 모든 것이 포기되며,
소유의 씨앗 자체가 소멸됩니다.
그리하여 악은 그 싹이 잘리거나 배(胚,싹이 트는 부분)가 뭉개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무착심(無着心,무욕)이 아주 강해야 합니다.
그 간절함은 물밑에 붙들려 있던 사람이 수면으로 올라가서 숨을 쉬려고 발버둥칠 때와 같아야 합니다.
ㅇ. 한편 산란한 생각들이 하나의 위험이라면, 다른 한 편으로 잠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위험이다.
사실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명상을 하려고 할 때마다 졸음이 엄청난 힘으로 덮쳐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때 명상을 그만두면 그것이 사라지고 전혀혀 졸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에고의 한 저항 형태일 뿐이며, 분쇄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르가바씨는 잠에 대해서도 무언가 이야기했는데,
그로 인해 바가반은 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가반 :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아 안에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장애들은 한편으로는 (감각대상, 욕망의 습을 포함한) 세간의 사물들에 마음이 끄달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잠입니다.
잠은 여러 책에서 항상 삼매에 첫째가는 장애라고 이야기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들이 그 사람의 진보 단계에 따라 제시됩니다.
먼저 모든 세간적 마음아시(distraction)를 포기하고 잠을 제한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예컨대 <기타>에서는 잠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낮 동안에는 잠을 자서는 안되지만, 밤이라 해도 약 오후 10시부터 2시까지 중야(中夜)에만 자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잠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잠이 덮쳐 오면 그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생시 일상 속에서 매 순간 진아 안이나 명상 안에 고정되어 있을 것이며,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명상을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면 잠을 자고 있는 중에도 그 생각이나 명상의 흐름이 작동할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어떤 강한 생각을 마음에 품은 채 잠이 들면,
잠에서 깨어날 때 같은 생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서도 분명합니다.
잠도 삼매라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명상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ㅇ. 이것을 기억해 두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하리쉬는 잠을 에고 없는 상태의 한 예로 곧잘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그는 신체적 잠을 권장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
잠은 진정한 '에고 없는 상태' - 즉, 순수의식 - 의 어둡고 의식없는 반대면(反對面)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명상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질문의 또 하나의 원천은 그들이 때때로 어떤 공백상태나 공(空), 혹은 두려운 느낌과 마주 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 공(空)이나 두려움을 체험하는 자를 확고히 착파하면서 계속 수행해 나가라는 조언을 들었다. 일종의 지복상태를 체험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답변이 돌아갔다.
그것을 체험하는 자가 없이는 어떤 두려움이나 즐거움, 어떤 환영(幻影)이나 공(空)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헌신자 : 저는 수행 도중에 무념의 단계에 도달하면 어떤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때로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바가반 : 무엇을 체험하든, 그대는 결코 거기에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즐거움을 느끼든 두려움을 느끼든, 그것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지 스스로 물으면서, 즐거움과 두려움이 다 초월되고 모든 이원성이
사라져서 실재만 남을 때까지 수행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것을 체험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지만, 결코 거기에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예컨대 생각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았을 때 체험되는 의식침전(意識沈澱)의 즐거움에 절대 빠져서는 안되며, 이원성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밀고 나가야 합니다.
-아서 오즈번 엮음, 대성 번역 <바가반이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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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 도봉산 원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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