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조법사의 조론 공부3] 서장 -종본의

2023. 3. 27. 22:42성인들 가르침/기타 불교관련글

 

[원문]

實相自無, 非推之使無, 故名本無,

[본문]

제법자성인 진여성공의 실상은 원래 없는 본무(本無)이지,

인식으로 추리하여 없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본무(本無)라고 부른다.

[주해]

실상은 진여의 진실한 자체이다.

진여의 진실한 자체인 실상이 지금 연생의 인연을 따라서 일체의 만법을 이루었다면 만법 모두가 진여의 실체인 실상인 것이다.

만법 전체가 진여의 실상이라고 관찰한다면 끝내 한 법도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망정(妄情)에 일치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인식의 추측을 의지해서 제법을 없게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연회의 제법은 본래 없는 본무이며, 제법의 본무라면 또 무슨 한 털끝만큼의 법이 있어 차별적인 모습으로 전변하면서 움직이겠는가?

이러한 이치로써 모든 법을 관찰한다면 현상의 사물은천류하지 않는다고 한 <물불천론(物不遷論)>의 종지가 심목(心目)에 소소(昭昭)하리라.

이상은 <물불천론>의 종본의(宗本義)인 본무를 환멸문(還滅門)의 관점에서 밝혔다.

 

[원문]

言不有不無者, 不如有見之有, 邪見斷見之無耳,

[본문]

모든 법은 진실하게 존재해 있지도 않고 (不有), 단멸(斷滅)로서 없지도 않다(不無)라고 말하는 것은 {이는 <부진공론>의 종본의를 표한 것이다.} 범부와 외도들이 제법은 진실하게 존재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有見)인 상견(常見)의 유(有)와, 그들의 빗나간 견해(邪見)인 제법은 단멸하여 없다는 단견(斷見)의 무(無)와는 나란히 비교되지 않는다.

[주해]

여기서는 논리를 세워 타파해야 할 집착을 표시하였다.

불여(不如)는 나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불비(不比)와 같은 의미다.

범부와 외도(外道)는 모든 법은 진실하게 존재해 있다(有見,常見)고 단정적으로 집착하며,

모든 법은 단멸하여 없다(邪見, 斷見)고 확고하게 고집한다.

이는 타파할 대상인데, 이를 타파하는데 있어서 불자(不字)만으로 부정하였다.

그 때문에 불유불무(不有不無)하고 말하였다.

 

[원문]

若以有爲有, 則以無爲有

[본문]

모든 법이 존재해 있다 하여 이를 진실하게 존재해 있다라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모든 법의 인연이 분리하여 없는 것은 확실히 없다 하리라.

[주해]

여기서는 범부와 외도가 변계소집의 허망한 마음으로 헤아리는 견해를 드러냈다.

모든 법을 진실하게 있다고 한다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반대로 모든 법은 정말로 없다고 한다면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원문]

夫不存無以觀法者, 可謂識法實相矣

[본문]

제법은 실유(實有)라 하는 상견과 제법은 실무(實無)라 하는 단견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고 제법을 관찰하는 자라면, 제법의 실제모습인 실상(實相)을 식별했다 말할 만하리라.

[주해]

여기서는 제법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제시했다.

본문의 존무(存無)라는 존(存) 자(字) 아래 유(有) 자(字)를 첨가해야만 한다.

실유(實有)다, 실무(實無)다 하는 상대적인 견해는 전도(顚倒)된 견해이기 때문이다.

 

[원문]

雖觀有而無所取相, 然則法相爲無相之相, 聖人之心, 爲住無所住矣,

[본문]

실유,실무의 전도된 견해를 간직하지 않고 제법을 관찰한다면

제법의 유(有)를 관찰한다 해도 제법의 차별적인 모습을 취할 객관은 없다.

그렇다면 제법의 차별적인 모습은 무상(無相)의 성공에서 나타난 모습이며,

본무인 성인의 마음은 제법의 모습에 안주해도 안주할 제법의 객관이 없게 된다.

[주해]

여기서는 올바른 관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익을 드러냈다.

즉, 유, 무의 두 견해를 떠나서 모든 법을 관찰한다면 제법마다 고요한 진여성공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법이 의타기(依他起)의 연생으로써 존재해 있다 하여도 차별적인 제법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며, 제법의 차별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면 제법의 자체는 성공의 진제, 연생의 속제 어느 쪽에도 여여(如如)하게 평등하다. 때문에 속제로서의 차별적인 제법의 모습이 바로 모습없는 성공의 진제 모습이 되는 것이다. 모든 법의 모습마다 모습이 없어 고요히 번뇌가 사라진 성공이다.

이는 관찰할 객관의 세계가 성공인 것이며, 세계(六境)가 성공이라면 이를 관찰하는 주관적인 마음은 스스로 번뇌가 고요해진다.

그러므로 성인의 마음은 체법의 세계에 안주한다는 집착이 없이 안주한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문다)

이 마음이 공하여, 주관적인 나의 마음과 관찰할 객관인 세계가 함께 공한데 어디에 간들 고요하지 않겠는가?

 

                                                                                      -승조법사 지음,감산덕청 약주, 송찬우 번역 <肇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