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면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십시오.

2023. 1. 11. 20:53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 싯따르 메쉬와르 마하리지의 <다스보드 제 12講> -

 

[제 12강 주제 :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순수지식에 대하여 어린 아이도 이해할 정도로 아주 단순하게 이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 속에 담겨 있습니다.]

                                                                                                            - 다스보드 8장 1절, 1문단 -

 

평생동안 경전을 열심히 탐구한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인과 깨달은 스승들이 어떻게 설명했든간에,

나는 내 나름대로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요.

 

가장 위대한 신이 누구인지 탐색하고 싶다면 그 신을 직접 만나보아야 합니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만 가지고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온갖 경전을 다 읽고 나서 결론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어느 성소(聖所)가 가장 성스러울까, 이런 식으로 조사하려고 한다면 더욱 의심만 키울 뿐입니다.

자가나트 신의 추도사에서, 만약 다르샨을 위해서 자가나트에 직접 가보지 않으면,그의 노력은 완전히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성지를 다 가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이 모든 다양한 성소, 속죄, 보시행 등은 오직 유일신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들이 유일신을 알기 위한 대단한 노력들입니다.

이에 대한 온갖 사상과 다양한 철학들이 존재합니다.

이 유일신이신 하나님은 누구이며. 어떻게 찾습니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에 대한 숭배방식이 널려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선호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통해서 의지합니다.

수많은 신들이 있으며, 신앙인들은 그들의 신에게만 집착합니다. .

그들 각종 신앙인들의 의향에 따라 이 모든 의견들을 감안해 본다면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는 절대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바가반 스리 크리슈나는 바가바트 기타 제 10장에서 이 모든 상황에 대해 검토해 보지 않는 자는 모두가 짐승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경전과 신학자들은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전수되는 것들에는 그 속에 지극히 모순된 진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그 어떤 전통이든,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무조건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신의 위대함이란 신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결코 신을 찾을 수 없다고 결정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은 초연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노력,요가,희생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일까요?

 

을 찾을 수 있다면 신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적어도 누구를 신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은 먼저 대상을 식별하고 그 대상에 대한 세부사항을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신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이제 우리가 누구를 하나님(신)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안의 우상이 아니라 온 세상의 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온 세상의 활동을 지탱하는 분, 만유를 행하시는 분, 전지전능하신 분을 하나님(신)이라고 합니다.

그는 눈꺼풀을 움직이거나 눈을 통해 보는 등 모든 행동을 다 합니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누구(무엇)를 통해 움직이는지를 의미합니다.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그가 잠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덕분에 달은 시원하고, 태양은 빛납니다.

이 모든 장엄함을 즐기는 사람은 신입니다.

이 몸은 썪을 수가 있어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은 몸 안에 거(居) 하십니다.

그러나 신은 육체 안에 거하시므로 이 몸에 신이 거주하는 한엔 신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신)가 잠을 잘 때 그것은 그가 쉬는 것이며, 온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식이 흔들릴 때 바람(Vayu)이 생성됩니다.

공기가 마찰을 일으키면 빛과 불이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요소는 그 분을 통해 생겨나고,

나중에야 태양, 공기 등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에 다양한 이름을 부여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은 동쪽도 없고,서쪽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편의를 위해 고안한 이름(개념)들입니다.

그는 거친 육체, 미묘체(정신), 원인체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비슈누 신의 배꼽에서 나무가 나오자 신 비슈누가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슈누가 내면의 의식(안타카라나)이고, 자아가 싹트고, 브라흐마(지성을 의미)가 태어났음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도 그는 팔다리나 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팔다리가 없지만 이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꿈에서 당신은 수백 마일을 계속 걸어갑니다.

이 발로 (꿈에서) 걷습니까?

 

브라마데바 등도 이 신을 모릅니다.

이것은 의식, 지성 또는 무지가 이 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이 결코 그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에게 피난하면 그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명 의식(Chaitanya)이 있습니다.

그것이 흐르면 공기가 생성됩니다.

Vayu 또는 바람은 의식입니다.

이 모든 것은 존재, 의식, 지복의 형태,즉 브라흐만에서 태어났습니다.

Vayu(바람)의 어떤 에너지는 태양, 즉 불이 되었고,

Vayu(바람)의 차가움은 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의식입니다.

이 흙은 불과 물의 도움으로 생겨났고,

이 흙에서 생명체가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우상을 세움으로써 그 우상에 어떤 권능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신에게 절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몸의 형체로 된 성전에 거하십니다.

몸에 존재하는 생명의식은 신입니다.

 

바가바트 기타에서 스리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나는 모든 존재의 마음 속에 살고 있으며,

각 존재는 'I'라고 부르는 'I Am'이 나 자신이다. 다른 모든 의무를 포기하고 모든 것의 심장에 거하는 나에게 피난해라.나는 이 거친 몸이 아니다." 말합니다

그는 또한 아르주나에게 "만약 그대가 나를 아는 사람들이나 나의 성품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가면 나를 만날 것이다. 채타나 - 생명 의식은 신이다.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에게는 신을 쉽게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의 창조물은 이 땅입니다.

그러나 사드구루로부터 어떤 가르침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땅의 자궁에서 만들어진 나무, 돌 등의 것들을 숭배합니다.

신은 썪지 않는데, 사람들은 썪는 것을 신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무지에 빠져 있지만, 절을 할 때는 자기 자신에게만 절을 합니다.

창조주는 창조된 것과 다릅니다.

 

성 투카람은, 신화적인 서적 등을 설명하는 학식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에 대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게 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내면 성찰을 하면 자신과 만물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탐구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들이 없습니다. .

 

사람은 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Avidya'는 문자 그대로 '지식이 없음', 즉 '무지'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진찌라고 인정하고, 신을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무지 때문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보는 지와 보여진 대상은 두 개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베다는 보이는 것을 마야(Maya), 보는 자는 자아,

그리고 신은 실재와 비실재 너머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파라마트만(Paramatman), 즉 파라메슈와라(Parameshwara)이며,

소멸할 신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세상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는 내면의 참나입니다.

자아(아트만)와 마야 보다 먼저 있는 것이 파라마트만입니다.

그 분만이 하나님(참나)으로 불려야 합니다.

땅, 물, 불 공기, 하늘 등은 신이 아닙니다.

"신은 왔다 가고, 신은 태어나고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미혹된 것이며,

그들의 미혹은 한계가 없습니다.

 

출생도 죽음도 없고 그것을 알지도 못하며,

출생과 죽음을 초월한 하나님이 어떻게 태어나고 죽으실 수 있겠습니까?

탄생과 죽음은 육체의 속성이고,

배고픔과 목마름은 생명기운의 속성이고,

고통과 쾌락은 마음의 속성입니다.

당신은 시바(신)이며 이 여섯 가지 특성을 초월래 있습니다.

 

거친 세상은 소멸되어야 합니다.

몸도 부패하기 쉽습니다.

세상은 모두가 상상된 것입니다.

그대와 신 사이에 조금도 분리된 느낌이 없을 때 그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상상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신이다'와 같은 감각도 없고, '나는 시바다'와 같은 느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위자가 행동 속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참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원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 세계는 브라만에게서 나왔고,

그 덕으로 인해 오직 브라만 안에서만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브라만과 마야의 이원론이 남게 된 이유입니다.

 

브라만도 마야도 어떤 시작이 없습니다.

마야(환상)는 브라만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야가 브라만에게 접근하자마자 마야는 사라집니다.

세상이 브라만 안으로 들어가거나 사라진다고 말한다면,

브라만은 거기에 구멍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며, 브라만에게는 (세상의) 부담도 없습니다.

 

이 마야(환상)는 브라만에서 나타나지만 브라만에는 없습니다.

거울에 대상이 비친 모습과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옷이 태양에 의해 건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당신을 위해 그것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테라스에 물이 가득 찬 100개의 항아리가 있고, 태양의 100개 반사가 있는데,

100개의 태양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따라서 수백 개의 광선의 형태로 태양이 당신의 옷을 말려도 결코 옷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진아가 몸 안에 있고, 모든 행위를 하고 있지만 행위 속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대의 내면 속 자아를 들여다 본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를 발견할 것입니다.

히시케샤는 마음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를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가장 높은 신께 도달할 것입니다.

신을 아는 것이 해방의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브라만도, 마야도 어떤 시작도 없습니다.

 

- <Amrut Laya (The Stateless stat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