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4. 22:45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4) 일심(一心)으로 귀의 : 진속불이<1>
[본문]
종도 아니고 휭도 아니고 원이(圓伊, ∵)의 도가 현묘하게 모인다.
[해설]
원만한 이(伊)는 <∵>로 표시되는 범어의 이(伊)자를 말한다.
위의 두 점이 횡으로 있으므로 종으로 일렬이 아니어서 종도 아니라고 하고,
아래 한점이 내려와 있어서 횡으로 일렬로 모여 있는 것도 아니어서 횡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는 종도 횡도 다 있어 단일한 하나의 규칙으로 묶어서 말할 수 없는 현묘함을 문자를 들어
비유한 것이다.
행정은 이렇게 설명한다. "범어 이자(伊字, ∵)는 두 점이 위에 있어서 떨어지는 물의 종(縱)과 같지 않고,
한 점이 아래 있어서 타는 불의 횡(橫)과 같지 않다.
3덕(德)이 상생(相生)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상합(相合)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타고난 참됨의 진리가 자연(自然)히 이와 같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함허는 종을 하나로, 횡을 셋으로 보아, 비종과 비횡을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님으로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이 아니다'라는 것은 하나가 아님을 말하고, '횡이 아니다'라는 것은 셋이 아님을 말한다.
'셋도 아니고 하나도 아님'을 '함께 사라진다'라고 말한다.
'셋인즉 하나'이므로 셋이 아니고, '하나인즉 셋'이므로 하나가 아니다.
'하나이고 셋'임을 '함께 원만하다'고 이름한다.
함께 원만함을 또한 '함께 비춤' 이라고도 부르고, 함께 사라짐을 또한 '함께 버림'이라고도 부른다.
버림과 비춤이 둘이 없음이 '원이지도 (圓伊之道)'이다.
함허는 원이지도가 '현묘하게 모인다(玄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그것을 하나라고 규정하면 그것이 셋임을 어찌하겠는가?
만약 그것을 셋이라고 규정하면 그것을 하나임을 어찌하겟는가?
소위 셋이란 것은 셋이 아니며, 소위 하나란 것은 하나가 아니다.
셋과 하나가 함께 원만하고 함께 사라져서 이 '원이'를 이루니,
이것을 현묘하게 모인다(玄會)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하나와 셋의 관계는 곧 반야에서 일심(一心)과 3지(智)의 관계이며,
법신에서 일경(一境)과 3제(諦)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함허는 하나와 셋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위에서 말한 경계와 지혜의 뜻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님'이다.
셋이면서 종이 아니고, 하나이므로 횡이 아니다.
종이 아니므로 3제와 3지이고, 휭이 아니므로 1경과 1심이다.
셋이 곧 하나이고 하나가 곧 셋이므로 셋과 하나가 원융하며,
셋이 셋이 아니고 하나가 하나가 아니므로 셋과 하나가
'함께 사라지고(俱泯)' '함께 원만하다 (俱圓)'
함께 사라지고 함께 원만함은 법이(法爾)로서 그와 같은 것이지
인간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원이지도가 현명하게 모인다'라고 한다.
함허는 이상의 논리를 반야의 3지(智)인 여리지, 여량지, 일체지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① 여리지로서 진제를 비추면 눈앞에 법이 없고 귓가에 소리가 없어 정(情)에 상응하는 어떤 법도 없으니,
나아가 부처를 꾸짓고 조사를 욕하면서 눈은 은하수를 바라본다.
②여량지로써 속제를 비추면 파도가 수행의 바다를 타고 구름이 자비의 문에 퍼지니,
나아가 얼굴에 흙칠하고 머리에 재를 쓰고 표주박을 들고 시장에 들어 간다.
③ 동체(同體)의 지혜로써 중도를 비추면 법의 해탈을 기뻐하지도 않고 법의 속박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고 열반을 구하지도 않는다. 치워 없애는 것도 내게 있고, 건립하는 것도 내게 있어, 내가 법의 왕이 되어 법에 자재하므로 모름지기 도를 믿어 한나라 땅도 챙기지 않고 진나라 땅도 상관않고 나귀를 타고 양주를 지나간다.
여기서 '입을 벽 위에 걸어두고 눈은 은하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진(眞)만을 추구하면서 속(俗)을 폄하함을 말한다. '표주박들고 시장으로 들어간다'함은 자비를 발휘하여 범부가 살고 있는 속(俗)의 세상 한 가운데로 나아감을 말한다. 이둘이 각각 여리지와 여량지, 진제와 속제 둘 중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라면, 그다음 세번째는 그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를 말한다.
진제를 비추되 속제를 폄하하지 않고 속제에 뛰어들되 진제를 잃지 않는 태도이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 열반과 생사, 그 둘 사이에서 자유자재함을 중도를 비추는 동체(同體)의 지혜라고 말한다.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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