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3. 23:02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마하리쉬 : 그대가 도난 당한 재물을 회수하듯이, 지성은 그대의 재산이고, 향상할 수 있고, 변화를 겪으며, 파괴될 수 있고, 소유자인 그대에게 다시 회복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방문자 :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그렇다면 지성은 그대의 재산일 뿐, 그거이 그대는 아닙니다.
방문자 : 정말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그러면 그대는 무엇입니까?
방문자 : 저는 제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하겠습니까?
마하리쉬 : 그 말은, 그대의 지성이 그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방문자 : 예, 그게 바로 제가 말하려는 뜻입니다.
마하리쉬 : 그대는 지성 외에는 아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가졌는지 왜 보지 않습니까?
방문자 : 어디서, 혹은 무엇을 봐야 합니까?
마하리쉬 : 그대 자신의 내면을 보십시오. 그대 자신을 보십시오.
방문자 : 보이지 않는 것을 제가 어떻게 봅니까?
마하리쉬 : 그 육안을 가지고는 볼 수 없지요.
방문자 : 다른 어떤 눈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까?
마하리쉬 : 그대는 그대의 '나'를 가졌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보고,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십시오.
방문자 : 제가 저의 '나'를 어떻게 봅니까?
마하리쉬 : 그대가 '나'를 이야기 할때, 뭔가를 의식하지 않습니까?
방문자 : 합니다.
마하리쉬 : 그 의식은 대상들에 대한 의식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의식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방문자 : 그것은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마하리쉬 : 그대가 어떤 대상을 생각할 때, 그대는 그 대상 속에 흡수되고 그것으로 변형됩니다. 그럴 때 그대는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방문자 : 정말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지금 만약 그대가 그 대상을 놓아버리면 무엇이 남습니까?
방문자 :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마하리쉬 : 그러나 그대가 그 대상을 지각했을 때는 그 지각대상과 지각자인 그대 자신 둘다 있었지요.
방문자 :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만일 이 두 가지 중에서 그대가 앞의 것, 즉 대상을 제거하면 무엇이 남게 됩니까?
방문자 :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말하면, 주체인 '나'가 남겠지요. 그러나 사실의 면에서 저는 그것이 남는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대상들을 생각하기를 멈추면 모든 생각이 그칩니다. '나'만 남지는 않습니다.
마하리쉬 : 그것은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지성과, 그 상대적 개념인 주체로서의 '나'는 다른 비슷한 개념 대상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은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집니다. 1인칭, 2인칭, 3인칭은 모두 함께 의식 속으로 뛰어들고 의식에서 뛰쳐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지성적 개념들과 별개로는 어떤 의식도 없습니까?
방문자 : 저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하리지 : 깊은 잠 속에서 그대에게 지성이 있었습니까? 즉, 그때 그대는 사물이나 대상들을 지각하고, 비교,대조하고, 기억하고 판단했습니까?
방문자 : 이니요, 그때는 생각할 어떤 대상도 없었고, 어떤 지성도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마하리쉬 : 하지만 그대는 행복을 느꼈다고 이미 시인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방문자 :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이 일반적인 느낌. 어떤 대상이나 생각과도 관계가 없는 이 행복, 거기서 지성이 어떤 역활도 하지 않는 이 느낌이나 의식이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미 '나', 곧 진아의 성품이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여기서 그대는 지성을 초월할 때 행복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그대는 '나', 곧 '진아'와 '행복'이 똑같은 하나이고, 하나로서 느껴졌다고 결론지울 수 있습니다. 다만 지적으로는 하나로 지각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방문자 : 이제 저는 그것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납득합니다만, 아직 그것을 분명하게 느끼지는 못합니다. 저는 지성을 초월하는 이 무관계적인 혹은 절대적인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하리쉬 : 그것은 그대가 자신을 다른 대상들과 함께 생각하고 그것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오랜 습이었고,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그대의 '나'와 한 번도 대면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늘 그대의 지성을 사용해왔지만 그대의 직관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대의 노선을 뒤집어서 내면적 시선을 취하여, 모든 외적인 이미지를 차단하고 직관적 느낌에 의지하면, 그대의 마음이라는 어두운 방안에서 그대 자신의 참된 모습을 포착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실재이고, 깨달음이고, 깨닫는 자, 곧 진아- 말로 묘사할 수 없고 마음이 도달할 수 없는 일자(一者)인데,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용어, 즉 사뜨-찌뜨-아난다(존재,의식,지복)는 그것을 암시할 뿐입니다.
방문자 : 스와마님, 이제 당신께서 이것을 저에게 밝혀주셨으니,제가 진지(眞知)를 성취하게 됩니까?
마하리쉬 : 아닙니다. 단지 그대가 지적인 토대를 준비하고, 그대의 의지를 필요한 방향으로 돌릴 수 있게 될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은 깨닫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불사의 감로 한 병이 주어졌지만, 그대가 그것을 실제로 맛보아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의해서만 그것이 확고해지고 습관적으로 됩니다. 즉, 실재하지 않는 것들, 곧 진아 아닌 것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그대를 끌고 가는 저 오랜 습(習)이 소멸되고, 그대가 실제로 자유로워져서 비(非) 진아에 의해 방해받지 않게 됩니다. 이 지속적인 자유, 혹은 영구적 깨달음을 해탈 혹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방문자 : 이 구원 혹은 깨달음은 순간적입니까, 아니면 점진적입니까?
마하리쉬 : 지적 토대를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그에 힘입어 직관이 형성됩니다. 그런 시간의 길이는 경우에 따라서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관, 곧 깨달음은 시간을 논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진아에 대한 깨달음과 시간에 대한 의식은 밀랍과 물과 같습니다.[註: 밀랍은 물처럼 보이지만 물이 아니다. 또한 밀랍과 물은 한데 섞이지 않는다. 즉, 이것들은 완전히 별개라는 의미이다]
삼매 속에서는 시간에 대한 느낌이 없습니다. 빠른 혹은 지연된 깨달음으로 여겨지는 것은 실은 깨달음에 이르는 준비과정에서의 빠름이나 지연이지, 깨달음 그 자체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방문자 : 확고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베다나 최소한 3전범(바가바드 기타, 주요 우파니샤드, 브라마경과 그 주석서들)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아닙니다. 그대 자신을 보는 데 그런 모든 것이 필요합니까? 그 모든 것은, 만일 남들이 의문이나 어려움을 제기하거나 그대 자신이 사고 과정에서 그런 문제들을 만난다면 그것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지적 재산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 모든 것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대는 신선한 물을 마시고 싶을 뿐이고, 그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갠지스 강의 모든 물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방문자 : 해탈자(깨달음을 얻은 자)의 정확한 태도는 어떤 것입니까? 그는 자신이 깨달았고, 완전한 진인이라는 것, 자신이 무지의 속박, 곧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것, 자신이 신 혹은 진아 혹은 3요소(보는자, 보이는 것, 봅의 세 요소) 모두 라는 것, 자신이 실재하는 단 하나의 것이고 이 모든 현상들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합니까?
마하리쉬 : 그런 것들은 모두 지적인 개념입니다. 어떤 개념도 깨달음이 아닙니다. 지성을 뒤로 하고 진아에 대한 직관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면, 이 모든 개념들 중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고, 확고함을 보장하는 보조수단으로서조차도 필요치 않습니다. 사람은 계속 "나는 사람이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의식하고 있다"는 식으로 중얼거리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단순한 의식이고, 그와 같은 생각들로 복잡해지지 않습니다.
방문자 : 그때는 비이원론만이 진리입니까?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원론과 한정비이원론은 그릇된 것입니까? 그 관점에서 보자면, 진인은 존재의 단일성을 깨닫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그는 단일성을 깨닫기도 하고 깨닫지 않기도 합니다. 비이원론,이원론,한정비이원론은 깨닫기 전의 그 개인의 태도를 표현합니다. 그런 것들도 지적인 개념들입니다. 깨달음 속에는 체험한 횟수같은 그런 어떤 것도 없습니다. 즉, 단일성과 다수성의 어떤대비도 없습니다. 하나와 다수의 이런 다툼들은 깨달음 밖에 있습니다.
방문자 : 실재는 오직 하나 아닙니까?
마하리쉬 : 경전에서는 그것을 두고 "말이 마음과 함께 도리없이 돌아 나오는 곳"<따이따리아 우파니샤드,2,9,1,> 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왜 그대가 그것에 심적인 개념들을 부과해야 합니까?
-마하리쉬의 복된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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