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것을 거짓으로 알고나면, 마지막 남는 것이 참나이다.

2022. 7. 27. 23:09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보통 마하리지는 하나의 특정한 주제를 적절한 예화와 비유를 들어서 매우 끈기있게 깊히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하여 질문하도록 배려하는데, 

이때 질문들은 종종 그가 그,렇게도 애써 설명하고자 했던 그 요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단지 논의 중인 그 주제의 특별한 면을 예시하기 위해 제시한 예화에 기반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질문들은 질문자가 핵심을 놓쳐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리지는 이렇게 말한다. 

"질문을 할 때는 당신 스스로를 당신 몸과 동일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질문하십시오." 

많은 방문객들은 자기의 몸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마하리지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가? 

그 직접적인 대답은 이럴 것이다. 

객관화 된 대상으로서는 그 주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자신을 만든 실체를 이해할 수는 없다.

 

자신을 자동 로보트인 몸으로 그릇 동일시하고 있는 개념적 개체가 있는 한, 

그가 객관적 대상으로서는 전혀 손 댈수 없는 절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동 로보트로서 생각하고 말하는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한다면, 

결국 지독히 우매한 질문이 되지 않을까? 

물론 자아실현을 성취한 사람만이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를 성취한 사람, 냐니(Jnani)는 아무런 질문도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마하리지가 방문객들에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극단의 중간 정도일 것이다. 

그가 자주 말하듯이 그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이 단순히 이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주제에 관해 상당한 과제를 해놓은 수행자들이라는 사실에 걱정한다. 

그들이 이미 쌓아놓은 것들이 그들의 본질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마하리지는 방문객들 스스로가 의식이 발현된 몸이 아니라, 비인격적 의식(인격 이전의 의식)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요구한다. 

 

마하리지는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직접적인 통각(統覺)의 기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개념적 개체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야 하고, 말하고 듣는 과정 동안에 일어나고 있는 기능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점에서 마하리지는 이렇게 충고한다.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나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화살을 꿰뚫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나는 의식에게 말하는 것이지 어떤 개체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문객들에게 주는 마하리지의 충고는 "즉각적으로 직관하고 즉시 잊어 버려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방문객 자신들의 개념을 쌓아놓는 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개념은 생각으로부터 일어나고 이 모든 것들이 무더기를 형상하여 정신을 형성하는데,

"사고"는 "개념화", 즉 정신 속에 대상을 지어내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굴레"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상대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는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일시적 목적으로 사용 될 수 있을 뿐이지만,그 이후에는 굴레가 되고 만다. 

개념적 사고를 없애는 것이 바로 깨달음, 깨어남이며 그외의 다른 방법으로서는 도달하거나 얻어질 수 없다. 

깨달음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어느 누구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하리지의 말이 화살처럼 꿰뚫고 들어오는 것만이 이러한 직관을 가져오며 이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마하리지의 방식에 대한 방문객들의 즉각적 반응은 이렇다. 

"만일 어는 '것'을 얻을 만한 '아무'도 없다면 도데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한 질문에 대한 마하리지의 말, 

"우리란 누구입니까?"

그때 누군가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 느리고 주저하듯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우리라는 것이 개념적 사고의 일부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전적인 환상에 불과한 ?"

이 단계에 이르면 마하리지는 그가 항상 말해왔던 것을 재차 강조한다. 

"모든 지식은 개념적이며 따라서 진실되지 않습니다. 즉각적으로 직관하고, 지식을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들 중 몇몇분이나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내 의도를 이해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려 애쓰는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말의 진정한 뜻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지의 이같은 의도는 참된 본성을 이해하고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먼저 제거하여야 할 방해요소가 있다. 

아니, 본래 면목을 보고 그 본모습이 되기 이전에 사라져야 할 장애물이 있다. 

모든 "사고", "개념화" "객관화"가 그렇다. 

이것들이 사라져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 면목은 객관화된 대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객관적 대상의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므로 결코 관찰되어질 수 없다.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같은 질문이 나온다. 

"개념화를 멈추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노력을 들여야 합니까?" 

대답은 이렇다.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어떤 수고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 수고를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당신이 자궁 안에서 미세한 정자로부터 다 자란 아이가 되기 위하여 수고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몇 달동안 무기력한 간난 아이로부터 소년으로 자라나기 까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기 위한 무슨 노력을 기울렸습니까? 지금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수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환상에 불과한 개념적인 "나"가 어떻게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그림자(대상)가 자신이 나온 주체를 알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참된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어떠한 현상적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얻어지거나 강요할 수 없으며 단지 그러한 사건이 발생할 뿐입니다. 개념에 의한 방해가 사라지고 그렇게 될 만한 요건이 되었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나타날 빈자리가 주어질 때에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떠한 사람이 이 집을 차지하고 있다면 나는 먼저 그 집을 비워야 합니다. 만일 개념적 '나'가 그 집을 차지하고 있다면 어떻게 깨달음이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개념적 '나'를 비우고 깨달음이 들어 올 기회를 주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개념화를 없애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조차 쓸데없는 일이며 그 밖의 다른 모든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효과적인 유일한 방법은 진리를 찰나에 즉각적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을 거짓으로 알아 버리고 나서 남는 것이 참입니다. 지금 있는 것이 사라지고 나면 지금 없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단순한 것,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부정만이 유일한 답입니다."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역<담배가계의 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