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4. 23:37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2. 선정과 지혜의 중도
[본문]
종(宗)이 같으므로 무연(無緣)의 자비이고,
선정과 지혜이므로 고요하여 항상 비춘다.
[해설]
선정과 지혜가 같은 종지라는 것은 둘이 함께하여 중도관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마타의 선정은 마음을 비운 고요함 속에서 아공을 깨달아 중생의 번뇌를 더는 '중생을 연한 자비'인 중생연자(衆生緣慈)에 해당하고, 비파사나의 지혜는 일체의 연기를 관하여 법공을 깨달아 무명을 벗어나는 '법을 연한 자비'인
'법연자(法緣慈)'에 해당한다.
그리고 선정과 지혜를 별개의 둘이 아닌 하나의 종지로 통합하는 우필차 중도는 중생에도 법에도 치우침이 없이 일어나는 자비이며, 이것을 '무연의 자비인 무연자(無緣慈)라고 한다.
무연자비는 아무런 인연없이 무심(無心)으로 베푸는 자비이다.
행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석론>에서 '자(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연이니 무심으로 일체 중생을 반연하되 중생에게 자연스럽게 이익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는 법연이니 무심으로 법을 관하되 제법을 자연히 널리 비추는 것이다.
셋째는 무연이니 무심으로 진리를 관하되 평등한 제일의 의미에 자연히 안주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무연은 곧 앞의 둘을 포함한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자비가 '중생연자비(衆生緣慈)이고,
법을 널리 비추는 자비가 '법연자비(法緣慈)이다.
중생과 법, 공관과 가관, 둘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무연으로 남으면서 중도관을 이루기에 '무연자비'라고 한다.
[본문]
고요하되 항상 비추므로 함께 주는 것이고,
무언의 자비이므로 함께 뺏는 것이다.
함께 뺏으므로 우필차이고,
함께 주므로 비파사나와 사마타이다.
[해설]
일체 번뇌가 사라져 고요한 적(寂)은 사마타를 닦아 얻어지는 고요한 선정을 말하고,
일체 법을 비추는 조(照)는 비파사나를 닦아 얻어지는 밝은 지혜를 말한다.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적이상조(寂而常照)'는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함께 행하는 '쌍여(雙與)'이다.
이처럼 둘을 함께 행하는 것이 중도이다.
그런데 둘을 함께 갖춘다는 것은 결국 둘을 다 넘어선다는 것이다.
결국 중도에서는 둘을 다 주는 '쌍여'뿐 아니라, 둘을 다 빼앗는 '쌍탈(雙奪)'이 일어나야 한다.
이처럼 중도인 우필차는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차원을 달리하여 종합하는 것이다.
행정은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함께 하는 쌍여의 우필차와 그 둘을 함께 넘어서는 쌍탈의 우필차가 서로 다르기에
이 둘의 작용(用)과 본체(體)의 관계로 설명한다.
"본장에 즉한 작용이므로 명확하게 두 문(門)이고, 작용에 즉한 본체이므로 쓸어서 일상(一相)이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는 하나의 본체에 근거한 두 작용으로서 '두 문'이 되고,
우필차는 그 두 작용의 공통의 근거가 되므로 하나의 본체로서 '일상'이다.
[본문]
사마타이기에 비록 고요하지만 항상 비춘다.
비파사나이기에 비록 비추지만 항상 고요하다.
우필차이기에 비추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다.
[해설]
사마타는 적적성성이다.
즉 고요하면서 깨어있기에 '적이상조(寂而常照)'라고 한다.
비파사나는 관하여 지혜롭되 고요해야 한다.
즉 비추면서 고요하므로 '조이상적(照而常寂)'이라고 한다.
우필차는 이 둘을 모두 지나면서 또 동시에 둘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조비적(非照非寂)이라고 한다.
행정은 사마타에 대해 "일이 곧 일체이므로 인과가 분명하다"고 하고,
비파사나에 대해 "일체가 곧 일이므로 모두 본성이 없음과 같다"고 하며,
우필차에 대해 "고요함과 비춤이 둘이 아닌 일심(一心)으로 공(空)과 유(有)가 함께 융합한 중도에 계합한다"고 말한다. 사마타의 공관을 통해 일체가 인연화합임을 깨닫게 되므로 이를 '일즉일체(一即一切' 내지 '무자성(無性)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동시에 포섭하여 넘어가는 우필차를 공(空)과 유(假)를 융합하는 중도로 설명하였다.
함허는 사마타와 비파사나와 우필차에 대해 각각 이렇게 설명한다.
"우필차로써 사마타를 하므로 비추되 항상 고요하다.
우필차로 비파사나를 하므로 고요하되 항상 비춘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로써 우필차를 하므로 적(寂)도 아니고 조(照)도 아니다.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우필차 안으로 융합하므로, 그렇게 융합된 우필차 내에서의 사마타를 '우필차로써 사마타를 한다'고 하고, 또 그렇게 융합된 우필차 내에서의 비파사나를 '우필차로써 비파사나를 한다'고 한다. 함허는 사마타를 고요한 적(寂)을 강조하여 '적이상조'대신 '조이상적'으로 규정하고, 비파사나를 성성한 비춤을 강조하여 '조이상적' 대신 '적이상조'로 규정한다.
[본문]
비추되 항상 고요하므로 속(俗)을 말해도 진(眞)에 즉해서이다.
고요해도 항상 비추므로 진(眞)을 말해도 속(俗)에 즉해서이다.
고요한 것도 아니고 비추는 것도 아니므로 비야(毘耶)에서 입을 다문다.
[해설]
사마타의 고요는 전체에서 나오는 고요이고, 비파사나의 비춤은 세속에 대한 비춤이다.
그래서 사마타는 전체를 말하고, 비파사나는 속제를 말한다.
그러나 진은 속에 대해 성립하므로 사마타가 전체를 말해도 속을 즉해서 진을 말하는 것이고,
속은 진에 대해 성립하므로 비파사나가 속제를 말해도 진을 즉해서 속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진과 속, 사마타와 비파사나가 서로 연결되기에 그 둘을 융합하는 중도로 나아가게 된다.
중도인 우필차는 그 둘을 넘어서기에 고요도 아니고 비춤도 아니며 진제를 말하지도 않고 속제를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침묵한다고 말한다.
비야(毘耶)는 유마거사가 살았던 비야리성(毘耶離城)을 뜻한다.
행정은 사마타의 '설진즉속(說眞即俗)'과 비파사나의 '설속즉진(說俗即眞)'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환으로 있는 속(俗)에 즉하여 무성의 진(眞)이 성립하고,
무성의 진을 요달하여야 환으로 있는 속이 된다.
경에서 '2제(諦)가 함께 둘이 아니므로 항상 어긋나면서도 아직 각각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어 우필차의 '비진비속'에 대해 말한다.
"경에서 '유마가 침묵하며 말이 없자 문수가 '문자와 언어가 없는 상태에 이르니 이는 진실로 불이법문에 들어간 것이다' 라고 찬탄하여 말하였다.
그러므로 실상(實相)은 언설상(言說相)과 심연상(心緣相) 등을 떠났음을 알기에,
말을 막아 진실의 근원을 보인 것이다.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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