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 실제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67)

2022. 7. 8. 22:27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어떤 사람들은 불평한다. 

"잠에서 에고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워낙 은밀해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그것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잠 속에서는 마음 자체가 아예 없어 주시하는 마음의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있음"에 대한 앎에는 친숙하지 않고, "함"에 대한 앎(즉, 자신이 노력한다는 앎)에만 친숙하므로, 그런 사람들이 잠에서 에고가 일어나는 것을 잠을 통해 알기는 불가능하다. 

그들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노력이 잠 속에는 없으므로, 그들이 잠 그 자체에서는 탐구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생시상태 전체가 에고의 유희에 지나지 않고, 이 상태에서는 마음의 노력을 누구나 경험하므로, 최소한 생시상태에서는 '나는 아무개다'라는 형태의 빛나는 사이비 '나'를 향해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내면으로 돌아서서 안으로 향한 시선으로 매일 그대 자신을 보면 그것을(실재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당신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오, 아루나찰라! "

                                                   <아루나찰라에 바치는 문자혼인화만, 제44연>

 

탐구는 생시상태에 우리가 앉아서 수행하는 여가 시간에만 시작된다. 

사물은 우리가 그 이름을 생각할 때 기억에 떠오르듯이, 

1인칭 느낌도 '나'라는 그 이름(대명사)을 생각하자마자 모두의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가? 

이 1인칭 느낌은 에고, 곧 사이비 '나'-의식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2인칭과 3인칭들에서 우리의 주의를 거두어 들여 1인칭을 붙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수행이다. 

주의가 1인칭 느낌으로 향하자마자 다른 생각들이 사라질 뿐 아니라 

첫 번째 생각, 곧 일어나고 확장되는 사이비 '나'-의식 자체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다른 대상들(2인칭과 3인칭들)만 알고 밖으로 헤메는 마음, 

곧 에고가 그 자신의 성품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대상들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가 그것의 참된 성품(진아)을 체험하면서 사이비 '나' 또한 죽을 것이네.

                                                               <진아화만 제193연> 

 

(- - -) 변덕스러운 마음이 1인칭 쪽으로 향하면, 

그 1인칭(에고)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빛을 발할 것이네.     <자기탐구 11연시, 제 6연> 

 

(- - -) 1인칭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자살을 하는 것과 같네 - - -

                                                      <자기탐구 11연시, 제7연>

 

이것은 베단타를 실제 수행으로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바가반 스리 라마나가 드러낸 가르침이자, 

그가 구도자들의 세계에 하사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은택(恩澤)이다. 

 

고무공이 계단을 뛰어 내려 올 때는 뛸 때마다 힘이 커지듯이, 

1인칭 의식을 붙드는 집중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첫번째 생각의 줄어듦도 빨라지다가 마침내 그것이 자신의 근원에 합일된다. 지금 이와 같이 합일되는 것은 부가물, 곧 '아무개'라는 느낌일 뿐인데,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타나서 잠 속에서 '내가 있다'로서 빛나고 있던 순수한 존재의식과 혼합되어 에고의 형상, 곧 '나는 아무개다', '나는 이것이다.' 혹은 '나는 저것이다'를 구성한 것이다. 

즉 나타나서 혼합된 것이 이제 빠져나간다.

 

수행의 초기에 구도자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에고의 이 빠져나감(가라앉음) 뿐이다. 

구도자는 에고가 가장 활발한 생시 상태에서 에고를 추적하므로, 

처음에는 그것이 제거되는 것만 인식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그것이 잠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서 '내가 있다'를 붙드는지를) 인식하기는 한결 어려울 것이다. 

 

자기주시가 생시의 의식인 '나는 아무개다'에서 시작 될 때는 빠져나가는 것이 하나의 부가물인 '아무개'라는 느낌에 지나지 않음므로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비실재적 사물에 불과하므로 [비실재는 죽고 실재만이 살아 남는다]), 구도자는 지금도 ['아무개'가 떨어져 나갔을 때도] 자신이 생시의 상태에서 경험한 '내가 있다'는 의식에 아무런 상실이 없다고 느낀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매일 경험해 온 잠과 비슷한, 

그리고 일체기 없는 (왜냐하면 '에고는 진실로 일체이고' 생각에 지나지 않는 전 우주는 에고의 한 확장이므로) 어떤 상태를 성취한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완전히 피로한 탓에 이제까지 그가 모르는 사이에 찾아와서 그를 엄습해 온 잠과, 지금 생시상태의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임의로 유발하여 경험하는 이 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그는 이제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   

 

의식이 있으므로 이것은 잠이 아니고, 생각이 없으므로 생시도 아니네.

따라서 그것은 존재-의식, 곧 시바의 단절없는 성품이라네. 

그것을 떠남이 없이, 큰 사랑으로써 그 안에 안주하라.

                                            -수행의 핵심- 

 

구도자가 수행도중 임의로 야기한 이 잠과 같은 상태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언제나 '나는 잠자지 않았고, 내내 나 자신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실히 느낀다. 

그러나 매일 그가 잠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나는 잠을 잤다, 잘 때는 나 지신을 몰랐다'고 밖에 말하지 못한다. 

그의 진정한 측면(존재-의식)은 잠 속에서도 그 자신의 존재성이 '내가 있다'임을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늘 알고 있지만, '내가 있다'를 생시상태부터 계속 아는 경험은 그가 (마음이) 단 한번도 가졌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이러하다. 즉, 생시상태에서부터 계속되는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임의로 야기한 잠 속에서 '아무개'라는 부가물이 없는 그의 자기 존재상태를 추적하고 그것을 꽉 붙들기 때문에, 그 순수한 존재-의식이 그 자신을 '내가 있다'로서 알고 있다는 것을 이 잠의 상태에서는 또렷이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도자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내 존재했다. 잠자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하기 전에는 그가 생시상태 내내 '아무개'라는 부가물의 형상인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고 있었으므로, 

일상적으로 매일 자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이 마음(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잠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다.  

 

                                                                   -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