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61)

2022. 4. 4. 23:16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깨진 거울 조각 하나가 열린 공간의 땅바닥에 놓여 햇빛을 온통 받고 있다. 

그 거울 조각에 비치는 햇빛이 반사되고, 그 반사광이 근처의 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안쪽 벽위에 비친다. 

거울에서 그 어두운 방의 안쪽 벽으로 들어오는 그 빛은 햇빛의 반사광이다. 

이 반사광으로 인해 어두운 방안에 있는 사람이 그 방안의 사물들을 볼 수 있다. 

벽 위에 보이는 그 반사광은 거울 조각과 같은 형상(삼각형, 사각형 혹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열린 공간에 직접 내리쬐는 햇빛(반사광의 근본인 원광)은 나눌 수 없이 단일하고 도처에 편재하며, 

어떤 특수한 형상이나 모양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비친다. 

 

진아, 곧 우리의 존재-의식도 열린 공간에 직접 내리쬐는 햇빛과 비슷하다. 

에고 -느낌 혹은 심식(心識)인 '나는 몸이다'라는 의식은 거울에서 반사되어 그 방의 안쪽 벽까지 뻣어간 빛살과 비슷하다. 진아의식은 광대하고 도처에 편재한 직접적인 햇빛처럼 무한하므로, 그것은 어떤 형상 부가물도 없다. 

그 반사광이 거울조각의 한계와 크기를 그대로 갖듯이, 

에고 -느낌은 한 몸의 크기와 형상을 '나'로서 경험하기 때문에 부가물들을 갖는다. 

어두운 방안의 사물들이 반사광에 의해 인식되듯이, 

몸과 세계는 심식에 의해 인식된다. 

 

세계와 몸은 함께 일어나고 지지만, 

세계는 마음에 의해서만 빛나네. -<실제사십송 제 7연>-

 

어두운 방안에 있는 사람이 그 반사광에 의해 보이는 방안의 사물들을 관찰하기를 그만두고, 

대신 '이 빛이 어디서 오는가?' 하고, 그 빛의 근원을 보기를 갈망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는 반사된 빛이 벽에 닿는 바로 그 자리에 가서, 

거기에 눈을 두고 그 광선이 나오는 곳을 되돌아(내면) 보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보게 되는가? 

해이다 ! 

 

그러나 그가 지금 보는 것은 진짜 해가 아니라 해의 반사된 모습일 뿐이다. 

더욱이 그에게는 마치 방 바깥에 있는 방바닥의 특정한 지점에 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바깥에 해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특정 지점은 방의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몇 자 거리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마치 " 가슴 중앙에서 손가락 두개 폭의 오른 쪽에 심장이 있다"고 하듯이) 

그러나 해가 실제로 땅바닥의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는가? 

아니, 그것은 그 반사광이 일어나는 곳에 불과하다!

진짜 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이 그 반사광이 나오는 일직선상에 두고, 

눈을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은 채 이때 보이는 반사되는 해 쪽으로 따라 가야 한다. 

어두운 방안에 있는 사람이 방안에 들어온 반사광의 근원을 보기로 작정하면,

그 반사광의 도움으로 사물들을 즐기거나 그것들에 대해 탐색하려는 욕망을 포기하듯이,

진정한 빛(진아)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오관을 통해 작용하는 마음-빛에만 의지하여 빛나는 다양한 세계를 즐기거나 그에 대해 알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세속인들처럼) 외부적인 대상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욕망하는데에 미혹되거나, 

(우리의 현대 과학자들처럼) 그것들을 탐색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면 진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감각대상들에 주의 기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무욕, 곧 내적인 포기이다. 

그 반사광이 어디를 통해 방안으로 들어오는지 알려는 열의는 

에고인 '나', 곧 마음-빛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알려는 열의에 상응한다. 

이 열의가 진아에 대한 사랑이다. 

 

눈을 광선이 나오는 일직선상에 두고 어느 쪽으로도 시선이 벗어나지 않는 것은

'나'-의식에 흔들림없이 고정된 일념집중의 주시에 상응한다. 

이제 그 사람은 그 반사광의 일직선을 따라 어두운 방에서 바깥에 놓여있는 거울 조각 쪽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 움직임은 심장을 향해 내면으로 뛰어드는 것에 상응한다.  

 

마치 물에 빠진 물건을 찾기 위해 잠수하듯이, 

예리한 마음으로 호흡과 말을 제어하면서 내면으로 뛰어들어,

에고가 일어나는 곳을 알아야 한다네, 이렇게 알라! - <실재사십송 제28연>-

 

어떤 사람들은 '호흡과 말을 제어하면서 내면으로 뛰어든다'는 말만 취하여,

조식(調息)수련을 닦기 시작한다. 

탐구과정에서 호흡이 멎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멎게 하기 위한 조식이라는 우회로는 필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빛을 주는 근원을 발견하려는 

엄청난 열망을 가진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 호흡은 자동적으로 멎는다. 

 

탐구자의 마음이 이처럼 외부의 감각대상들을 알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본래적인 빛의 형상, 곧 진아(내면)에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할 때 그가 숨을 내쉬면,

그것은 다시 들아쉬지 않은 채 자동적으로 바깥에 머무른다. 

마찬가지로, 그럴 때 숨을 들이쉬면 그것은 다시 내쉬어지지 않은 채 자동적으로 안에 머무른다 ! 

이것을 각기 '외적 지식(止息)'과 '내적 지식(止息)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주시를 놓침(망각)으로 인해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까지는 

탐구자 안에서 이 지식(止息)이 아주 수월하게 계속 될 것이다.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어떤 놀라운 소식이 갑자기 우리에게 전해지거나 

우리가 잊어버린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온 정신을 집중할 때도, 

그 때 일어나는 마음의 예리함(집중의 강렬함)으로 인해 숨이 자동적으로 멎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겠는가 ?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자신의 본래적인 빛의 형상을 보려는 강렬한 욕망과 진지한 일념집중으로 

예리하게 내면을 향하여 그곳에 머무르기 시작하면, 이내 호흡이 자동적으로 멎을 것이다. 

이 지식(止息)의 상태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계속되어도 탐구자는 숨 막힘을 경험하지 않는다. 

즉,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려는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조식을 닦을 때는 지식의 시간 단위가 늘어나면 숨 막힘을 경험한다. 

만약 탐구자의 주의가 진아에 워낙 강렬하게 고정되어 있어 

숨이 멎어는지 어떤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그의 지식상태는 자발적이며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때 숨이 멎었는지 여부를 알려고 하는 구도자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주의가 호흡에 고정되므로 자기 주시를 놓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온갖 생각들이 솟아올라 수행의 흐름이 중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리 바가반은 "예리한(내면을 향한) 마음으로 호흡과 말을 제어하라." 고 조언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연은 세 곳 모두에 '예리한 마음으로'를 덧붙여, 

'예리한 마음으로 호흡을 제어하고, 예리한 마음으로 내면으로 뛰어들어, 

예리한 마음으로 그 일어나는 곳을 알라'고 이해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 반사광에 시선을 둔 사람이 그 빛살을 따라 움직이면 그 길이가 줄어들지 않는가? 

그가 나아감에 따라 빛살의 길이가 줄어들듯이, 

구도자가 꾸준한 자세로 마음의 근원을 진지하게 구축해 가면, 

확장되려는 마음의 습도 더욱 더 줄어든다.

 

주시가 (반사된) 빛살 '나'를 따라 내면으로 점점 더 깊히 들어갈 때 그 길이는 점점 더 줄어들고,

그 빛살 '나'가 죽을 때, '나'로서 빛나는 것이 진지(Jnana)라네. - <자아탐구 11연시, 제9연>-

 

그 사람이 마침내 거울조각에 아주 가까이 당도할 때,

그는 반사광의 바로 근원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구도자가 내면으로 뛰어들어 자신이 일어난 근원(심장)에 도달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 사람은 이제 그 반사광의 길이가 없어져 버린 상태, 

곧 그가 거울에 너무 가까이 있어 어떤 반사도 일어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구도자가 강렬한 자기 주시의 노력에 의해 내면으로 점점 더 깊히 뛰어듧으로 인해 

자신의 근원에 너무 가까워져서 털끝만큼의 에고도 일어날 수 없게 되면, 

그는 이제까지 주시의 목표였던 '나는 몸이다'라는 느낌의 큰 해체 속에 흡수되어 머무른다.

이 해체가 바로 스리 바가반이 <우빠데샤 운디야르> 제 19연에서 "'나'가 죽을 것이네"라고 한 것이다.  

 

                                                                   - 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