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8. 22:54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늘상 오는 몇 사람만이 있었던 월요일쯤 되는 날이었다.
마하리지는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다.
잠시후 마하리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갑자기 뭔가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도 낮은 소리였기에 죄중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는 말을 한다기 보다는 뭔가 혼자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사람들은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도처에서 나를 만나러 와요. 카나다, 호주, 뉴질란드, 영국 심지어 일본에서 까지 옵니다."
마하리지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아이 엠 뎃(I am that)>을 읽고서 나를 만나러 옵니다.
어렵사리 더럽고 좁은 골목에 자리한 나의 작고 낡은 집을 찾아 내어 계단을 올라와서는 허름한 옷을 입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작고 거무티티한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깨달은 사람 같아 보이지가 않아. 옷도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같은 사람이면 입고 있음직한 멋있는 옷도 입고 있지 않고 - - -저 사람이 정말 그일까?'
이런 사람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나는 그저 글을 겨우 읽을 정도의 교육 밖에 받지 못했노라고 말합니다.
어떤 위대한 경전도 읽은 적이 없고 내가 아는 말이라곤 내 고향 토속어인 마리디어 밖에 없노라고 말입니다.
또 내가 한 일이라고 하는 것도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냥꾼이 사냥감을 뒤쫏 듯 그저 끊임없이 하나의 의문만을 추구한 것 밖에는 없어요.
나는 사실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 나는 내가 존재하는 사실을 알고,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알지도 못한 채, 또한 이렇게 되고자 한 바도 없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가 존재한다는 이 느낌은, 이 인식은 도데체 뭘까?"
이것이 내 일생동안의 추구였고, 나는 지금 내가 도달한 결론에 만족할 뿐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결론이 나의 유일한 깨달음인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깨달은 이"라고 합니다.
스승께서는 나에게 "너는 브라만이다. 네가 전체이며 너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 말씀을 진리로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40년 동안 바로 이 방에서 이야기한 것은 오로지 그것 뿐입니다.
어찌해서 사람들이 그 멀리서 나를 보러 올까요?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논리적 결론에 대해 추구해 나가면서
나는 어디에 도달했을까요? 그것은 명백히 볼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정말 간단한 것입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나(me)란 무엇일까요?
대답은 당연히 이 "나", 이 "몸" 입니다.
그러나 몸이란 정신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이 기관에서 지각있는 존재로 느껴지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뭘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의식일 겁니다.
의식이 없다면 설사 몸이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기능면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으니 말입니다.
반면에 이 의식은 자신을 나타내 보일 물리적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의식이 몸에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몸이 존재할까요?
몸이란 약 10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여성의 자궁에서 임신되어 성장한,
남자와 여자의 성분비액의 결합입니다.
이 액은 부모가 섭취한 자양분의 정수입니다.
따라서 의식과 몸은 기본적으로 자양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한 자양분으로 유지됩니다.
정말 몸 자체는 자양분이어서 하나의 몸은 다른 몸의 자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 자양분의 정수, 즉 즉 생명력 있는 성분비액이 수태되어 점점 자라 작은 몸을 이루어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오게 되면 "탄생'이라고 불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양분의 정수가 나이가 들거나 병으로 인해 시들어 이 정신적 기관이 부서지게 될 때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과 "나"와의 상관관계는 어떨까요?
"나'란 이러한 모든 사건을 지켜보는 "지켜봄"일 뿐입니다.
어떠한 일이 발생하든 영향을 받는 것은 정신적 기관일 뿐이지 존재 자체로서의 "나"는 아닙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시현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나'를 물들이지 못하는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다른 모든 의문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생각해 봅시다.
나는 어느 단계에서 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었을까요?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의 "나'는 진정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존재한다"는 인식은 아마도 이 몸이 태어난 후 몇 달쯤 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되어 욌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요?
대답은 "나는 모른다"입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기쁨, 낮과 밤, 깨어 있음과 잠 등, 다른 하나가 없으면 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는 상대성과 이원성의 모든 범주 내에서 내가 어떠한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그 의식 속에 시발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의식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마도 틀림없이 무(無)의 세계, 전체성에 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그 대답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전체성, 동일성, 단일성으로서의)은 그 자신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보고 인식하고 아는 과정에 필수적인 객체로부터 분리된 어떤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단일성이나 전체성의 본래상태에서는 "인식함"이 일어나는 어떤 매개체나 수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마음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눈은 눈을 보지 못하고, 맛은 맛 자체를 맛 볼 수 없고, 소리는 소리 자체를 들을 수 없듯이, 실재는 실재 그 자신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현상이란 이 실재 없이는 현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추상적인 개념화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의 무한성이 바로 실재입니다.
이것이 개념화의 한계입니다.
실재, 즉 유일의 주체는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 외관상으로는 바깥으로이지만 그 자신 안으로 현상적 명백함으로서 우주를 지각합니다.
실재가 자신을 현상적 우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도입됩니다.
왜냐하면 대상이 인식되어질 수 있으려면 공간에 일정한 크기로 나타나져야 되고, 시간상으로 일정기간동안 나타나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전반적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지각하는 존재란 실재가 현상화 된 우주로 투영되는 과정에서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상화된 모든 것들 중의 단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우리"라고 하는 것에는 본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없다는 말은 허환이라는 말이고요,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만,
현상이란 별개의 것으로 창조되거나 투사된 무엇이 아니라 사실은 개념화되고 대상화된 실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차이점은 단순히 개념일 뿐입니다.
개념이 없다면 그것들은 결코 분리될 수도 없고 실재와 현상 사이에 어떠한 이중성도 없는 것입니다.
이 동일성- 분리될 수 없음 - 이 우리의 참다운 본성에 대한 이해 또는 지각에 있어 중요한 열쇄입니다.
만일 실재와 현상 간의 일체를 보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객관화와 개념의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 실재란 우리의 존재 그 모든 것 자체이다" 라는 것이 이해되면,
그리고 현상이란 우리가 분리된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해되면,
우리의 존재 그 자체에 따로이 실재라는 그 어떠한 것을 끌어다 넣을 까닭도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재가 "해탈"을 필요로 한다는 개념은 터무니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설사 "해탈"이라는 것이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얽매임과 해탈이라는 것으로부터의 "해탈"일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나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는 존재한다"라는 개념이 거기에는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의식이 없으면 개념화 작용도 없습니다.
본다는 것을 말하자면, 그 어떠한 봄일지라도 그것은 누군가 (개별적 실체)가 주체,객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모든 보는 것의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깨어 있음"을 통하여,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절대의 전체성은 한 점의 결점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그래서 상대적으로 주어진 삶 동안 살다가 마침내 그 끝에 이르면, 이 상대적 인식은 인식조차도 없는 절대적 상태로 융합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인식한다"와 "내가 인식함을 인식한다"는 이 순간적인 상태는 그때 "나는 인식하지 않는다"와 "나는 내가 인식하지 않음을 인식하지 않는다"의 영원한 상태로 융합되는 것입니다.
- 라메쉬 발세카 지음, 이명규 번역 <담배가계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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