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2. 22:14ㆍ성인들 가르침/슈리 푼자
질문자 : 우리가 '닫혀있다', '열려있지 않다'를 알아 차릴 때 - - -.
슈리 푼자 : 그대가 이 '닫혀있음'이란 개념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차리면, 그대는 그대의 의식 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질문자 : 그것이 그렇게 간단합니까?
슈리 푼자 : 그것이 헨리 씨에게도 그렇게 간단하게 보입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본래의 그대입니다. 이와 같이 되기 위해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와 같이 되기 위해 그대가 무슨 노력을 해야 합니까?
질문자 :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슈리 푼자 : 만약 그대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누구입니까?
질문자 : (웃음) 그 다음 질문이 나옵니다. 다른 무엇을 제가 알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슈리 푼자 : 분명히 그런 줄 아십시오. 거기, 그 자리에서, 모든 질문이 답변될 것입니다.
질문자 : '나'라는 개념은 알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고, 노력하고 싶어합니다. 제가 기분이 언짢을 때는 제가 중심에서 벗어난 줄 압니다.
슈리 푼자 : 만약 그대의 질문들이 에고에서 일어나면, 그것은 혼동(무지)를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는 '나'가 일어나지 않는 저 다른 자리에 도달했습니다. 바로 지금 그대는 그 자리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질문자 : 그 자리에서 질문들이 여전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무 문제는 없습니다.
슈리 푼자 : 질문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고, 똑같은 어려움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질문자 : 저는 그것들과 다른 어떤 관계를 갖게 됩니까?
슈리 푼자 : 그대는 그 모든 문제들과 관계되겠지요. 이 우위성으로부터 문제에 접근하면 그대는 그것들을 훨씬 쉽게 풀어낼 것입니다.
질문자 : 에고가 무엇입니까?
슈리푼자 : 에고는 자기(진아)가 아닙니다. 그대의 행위들이 진아에 근거하지 않았을 때, 온갖 비행(非行)이 일어납니다. 자만(自慢), 위선 , 책략 같은 것이지요. 그대가 에고를 통해 살아갈 때, 그대는 이웃으로부터, 즉 친구들, 사제들, 교사들로부터 지식과 자기 정체성을 얻습니다. 이것들은 그대의 진정한 성품이 아닙니다. 그대는 그것이 본래의 자기인 줄로 믿게끔 조건지워져 온 것입니다. 그대의 교사들, 사제들, 부모, 사회 - 이들이 모두 그대에게 그렇게 해 온 것입니다.
질문자 : 그것이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저의 정상적인 사고과정, 저의 정상적인 지각은 그러한 조건화를 통해 매개되고 있습니다.
슈리 푼자 : 그러한 조건화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질문자 : 아침에 일어나면 저는 시계를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8시로군, 이것을 해야겠다. 저것을 하고 싶다.'모든 행위들은 그러한 조건화를 통해 길러지고 있습니다.
슈리 푼자 : 만약 그대가 이러한 생각들이 그대를 조건지운다고 말하면, 그대는 조건 지워집니다. 그러지 않고 만약 그대가 그런 생각들이 조건지워지지 않는 근원에서 일어난다고 인정하면, 그것들이 그대를 조건지우지 않습니다. 똑같은 행위가 조건지워질 수도 있고, 조건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행위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 : 결국 우리는 똑같은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그것과 다른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겠습니다.
슈리 푼자 : 그 다른 관계속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겠지요. 그것과 대면하십시오.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 나가십시오. 손에 리벌버(권총)를 들고 하지는 마십시오.(마치 해치워야 할 어떤 적을 상대하듯이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이기 때문이다)
질문자 : 제가 보기에 위빠사나의 정점은, 생각들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과 (자기를) 동일시하는지, 그리고 '나'라는 생각 역시 어째서 하나의 개념인지를 우리는 배웁니다.
내관(內觀)의 길인 위빠사나에서는 우리가 생각을 놓아버리는 법을 배웁니다. 그것을 놓아버리는 법을 배우면 우리는 자아, 즉 '나'의 개념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게 됩니다. 위빠사나는 유용한 방편이라고 생각됩니다.
슈리 푼자 : 그것을 하면 삼원성(三元性)이 만들어집니다. 즉, 명상하는 자, 명상 그리고 명상하는 대상입니다.
(위빠사나에서는) 이 삼원성이 유지됩니다. 저는 그대가 단일성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 즉 명상자 명상 그리고 명상하는 대상으로 나뉘지 않는 일체가 됩시다.
질문자 :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에서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길에서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지요. 저는 저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설사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저는 그 방법이 우리에게, '나는 생각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나는 자아 즉,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를 만들어 내고 있다'라고 끊임없이 일깨워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들은 사라집니다. 위빠사나는 우리에게 생각들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아(無我), 즉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당신의 방법을 좋아합니다.
슈리 푼자 : 위빠사나라고 하는, 이 관찰하고 행위하는 과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대가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 이렇게 자문하십시오. '누가 위빠사나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고 있을 동안 그대는, 그 수행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발견하려면,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대는 대상들을 관하고 있지만, 저는 그대에게 대상들을 제거하라고 요구합니다. 대상들을 제거하면 일체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의식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 이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슈리 푼자 : 아무 것도 하지 마십시오. 기억하기는 과거에 속합니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과거를 파고들어 가서 뭔가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질문자 : 그것은 이해됩니다. 모든 것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당신께서 거리로 나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거리에서 어떻게 자발적으로 행위 하실수 있습니까?
슈리 푼자 : 거리로 나갈 수 있지요. 거기서 모든 것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空)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대는 이 공(空)이 없는 곳이라고는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그대가 사물들을 보는 것은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공(空)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空)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공(空)이 없는 곳이라고는 어디에도 그대가 갈 수 없다면, 왜 그대는 지금 그 공(空)이 바로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질문자 : 공(空)은 모든 것의 이면에 있는 텅 빈 공간입니다.
슈리 푼자 : 제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에) 포함시키거나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 건물을 보십시오.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저 밖에는 공(空)이 있지만, 안에는 공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 집이니까'라고 공(空) 없이 '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질문자 : 그럼 공(空)은 본래적 상태입니까?
슈리 푼자 : 공(空), 자각, 지혜, 깨달음, 공(空)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집도 없겠지요. 안과 밖은 둘 다 공(空)입니다. 우리는 내벽을 세우고 그것을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벽들의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空) 안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지식은 알 수 없는 그것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알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이것(깨달음)을 위해 애쓰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데이비드 가드먼 편집, 대성 옮김 <빠빠지 면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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