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47)

2021. 9. 9. 22:27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마음의 관심은 사람들, 소유물들, 생각들에 쏠려 있다.  

그 관심은 대상들에게 집중될 뿐, 그것들이 관련된 존재인 주체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체성의 진실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질문은 주체-대상의 관계들의 미로 속에 빠져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을 찾는 이 탐구가 왜 필요한가? 

그것을 이해하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상태의 기쁨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탐구를 하면서 곁길로 벗어나지 않도록, 

진리를 찾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착수한 일은 마음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임을 라마나는 종종 상기시킨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편으로는 방해하는 생각들을 물리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해에 의문을 품게하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 

그 결과 관심이 '나'에 두어지면, 그것은 마음이 그 근원으로 몰입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문제로 변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라는 질문이 효과적인 도움이 된다. 

 

이 탐구를 할 때는 어떤 명상 자세라도 좋다. 

관심이 내면을 향하기만 하면 된다. 

라마나가 말하듯이, 우리가 창문 밖을 바라보지 않을 때는 창문이 열려 있건 닫혀 있건 무슨 문제가 되겟는가? 

이 질문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탐구의 도구인 이 질문을 만트라로, 혹은 암송을 위한 신성한 싱징으로 바꾸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 충만한 의식 혹은 참나라는 식으로 자기 암시를 할 필요는 없다. 

이 방법의 이점은 우리의 관심이 내면에 고정되면 개인이 할일은 끝난다는 것이다. 

그 뒤의 일은 신성한 힘이 떠맡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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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서 '나'가 가리키는 것은 자아입니까, 아니면 참나(Atman)입니까? 

 

마하리쉬 : 이 질문에서 '나'는 자아를 가리킨다. 

 

질문자 : 탐구를 하는 동안 '나는 누구인가?(Koham)"와 같은 질문들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자파나 만트라처럼 계속 반복해야 합니까? 아니면 처음에만 한 두번 묻고서 그 후에는 마음을 자아의 근원인 심장에, 세속적인 생각들과 의심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에 집중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 코함(Koham)을 자파로 활용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한 번만 질문을 던지고 그 뒤에는 자아의 근원을 찾는데,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데 집중하라. 

 

질문자 : 탐구를 하는 동안 숨을 깊고 고르게 들이쉬고 내뱉도록 노력하면서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호흡과 결합시켜야 합니까?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반복하면서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마하리쉬 : 만일 그대가 호흡과 상관없이 탐구에 집중할 수 있다면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그런 도움없이 탐구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은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탐구를 하는 동안 케발라 쿰바카를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규칙적인 프라나야마가 마음을 안정시키고 생각들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방편들의 도움 없이도 마음이 탐구를 지속할 만큼 충분히 강해지면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프라나야마는 일상적인 주의로 행해야 한다. 그것은 쿰바카(호흡의 유지)의 힘과 지속기간을 점차 증가시킨다. 

결국 그것은 마음을 한 점에 모이게 할 것이다. 프라나야마 없이 집중하기가 어려우면 그것의 도움을 받아라. 

프라나야마는 마음이라는 야생마를 제어하는 고삐와 같고, 생각이라는 바퀴를 제어하는 브레이크와 같다. 

"나는 누구인가? "와 "나는 어디서 나오는가?"라는 질문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것이다. 

진정한 참나의 경우에는 그런 질문이 일어날 수 없다. 

 

질문자 :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 한 뒤에는 "나는 마음도, 지성도, 자아도, 기억도 아니다"와 같은 슈리 상카라의 가르침으로 대답하며 번갈아 묻고 답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 할 때마다 "나는 쉬바다(Sivoham)"같은 공식으로 반복하여 대답해야 할까요? 

 

마하리쉬 : 명상을 하는 동안 그 질문에 대해 "쉬보 함(나는 쉬바다)" 과 같은 대답을 마음에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대답은 스스로 나올 것이다. 자아가 제시하는 어떤 대답도 올바를 수가 없다. 

이런 확언들과 자동 암시들은 다른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탐구라는 이 방법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계속하여 질문하면 대답이 나올 것이다. 탐구의 방법은 디야나(명상)이 아니다. 노력없는 상태는 갸나(Jnana)다. 

 

질문자 : 몸 안에서 근원을 찾아야 하까요? 

 

마하리쉬 : 자아는 몸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아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몸을 들여다 보아도 괜찮다. 그러나 근원에 도달하면 안과 밖이 없을 것이다. 근원 혹은 참나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참나 안에 있을 것이다. 

 

질문자 : 명상할 때 척추를 똑바로 세우고 앉는 사다사나 자세, 혹은 사슴 가죽 위에 있는 쿠샤사나 등이 탐구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탐구를 촉진할까요? 

 

마하리쉬 : 진정한 아사나(자세)는 참나-실재 혹은 근원 안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이다. 그대의 참나 안에 앉아라. 참나가 어디로 가서 앉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참나 안에 앉는다. '나'의 근원을 찾아서 그곳에 앉아라. 

아사나와 같은 것들의 도움 없이는 참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관념을 갖지 말라. 그것들은 전혀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탐구를 하여 자아의 근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세 등과 같은 것들은 마음을 흩뜨려 그것들이나 몸을 향하게 할 수 있다. 

 

질문자 : 한가한 시간에 어떤 책들을 읽으면 스와디야야( 탐구를 위해 마음을 빨리 훈련시키는 것)에 가장 도움이 될까요? 

 

마하리쉬 : 어떤 책을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진정한 책은 참나다. 그대는 언제라도 그 책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아무도 그 책을 빼앗을 수 없다. 그 책은 늘 곁에 있어서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 한가한 시간에도 그대의 참나를 붙잡아라. 그러면 그대는 어떤 책이든 읽을 수 있다.   

 

질문자 : 명상을 하는 동안 의심과 두려움, 걱정들이 계속 괴롭히면,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없앨 수 있을까요? 

 

마하리쉬 : "이런 의심과 두려움, 걱정들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라고 그대 자신에게 물어라. 그러면 이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에게 관심을 주지 마라. 내면의 참나에게 관심을 쏟아라. 두려움과 같은 것들은 오로지 둘이 있을 때에만, 또는 다른 사람이 그대와 별개로, 그대와 분리되어, 그대 바깥에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참나를 향해 내면으로 마음을 돌린다면, 두려움과 같은 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의심이나 두려움을 없애려 하면 다른 의심이나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것들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나뭇잎을 하나씩 뜯어서 나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대가 몇개의 이파리를 뜯는 사이에 다른 나뭇잎들이 자랄 것이다. 나무(자아)의 뿌리를 없애라. 그러면 나무 전체가 잎들, 가지들과 함께 없어질 것이다. 예방이 치료보다 낫다. 

 

질문자 : 명상을 하다가 가끔 스승님의 눈이나 얼굴을 응시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눈을 감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어떤 헌신의 대상에 눈길을 고정시켜야 할까요? 

 

마하리쉬 :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그대의 참나 혹은 아트만을 바라보라. 눈은 뜨고 있건 감고 있건 상관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나'뿐이다. 그것을 '나'라고 말하건 '눈'이라고 말하건 상관없다. 

눈을 감거나 뜨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면의 '나'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대는 뜨거나 감을 수 있는 '나'가 아니다. 그대는 원하는 대로 눈을 감을 수도 있고 뜰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참나를 생각할 때는 세상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실내에 있고 바깥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창문을 닫아 놓건 열어 놓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질문자 : 바가반이시여, 저는 스승님의 자아 탐구의 길에 관해 들었지만, 그것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용한 장소에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묻는 것입니까?  이니면 만트라에 대해 명상하듯이 그 질문에 대해 명상하는 것입니까? 

 

마하리쉬 : 아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하고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이 질문에 대해 명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속으로 깊히 들어가 그대 안에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는 것이며, 다른 생각들을 배제하고 그 생각만 굳게 붙잡는 것이다. 꾸준하고 끈질기게 노력하면 결국 참나에 이를 것이다. 

 

질문자 : 제가 알기로는 일어나는 생각들을 막는데 완전히 성공하기 까지는 참나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마하리쉬 :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생각들을 막을 필요는 없다. 깊은 잠을 잘 때는 생각들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깨어나면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자연히 다른 모든 생각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일은 이 주된 생각인 '니'라는 생각을 붙잡고 그것이 무엇인지 조사함으로써 다른 생각들이 관심을 흩뜨릴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자기 탐구의 진정한 가치와 마음을 제어하는 효과가 여기에 있다.  

 

                                                       -김병채 번역 <그대 자신을 알라>-  

 

 

                                                -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