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46)

2021. 8. 31. 21:57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자기 탐구'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아트만인) 진아를 탐구하거나 진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누가 진아를 탐구하며, 누가 진아에 대해 탐구하는가? 

탐구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가? 

 

자기(진아) 탐구나 브라만 탐구라는 용어를 듣는 순간, 

우리들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몸 안에 (진아라는) 모종의 광휘나 어떤 무형의 힘이 있으며,

(탐구를 하면) 그것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고, 어떻게 있는지를 우리가 알아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은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진아는 그것을 알려고 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진아는 그것을 알려는 그 사람의 성품으로서 빛나기 때문에, 

자기 탐구는 어떤 2인칭이나 3인칭 대상을 탐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바가반 라마나는 처음부터 자기탐구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름을 붙여서 

우리의 주의를 1인칭으로 직접 이끌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 물음에서 '나'는 자기를 의미하고, '누구'는 탐구를 나타낸다. 

 

자기를 탐구하는 것은 누구인가? 

누구에게 이 탐구가 필요한가? 

진아에게? 아니다. 

진아는 늘 성취되고, 늘 순수하며, 늘 자유롭고, 늘 지복스러운 전체이므로, 

그것은 어떤 탐구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좋다, 그렇다면 그 탐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에고일 뿐이다. 

 

이 에고가 진아를 알 수 있는가? 

앞장들에서 말했듯이, 이 에고는 하나의 거짓된 겉모습이어서 그 자신의 존재성이 없다. 

그것은 잠 속에서는 가라앉아 형상을 잃는 하나의 사소하고 극미한 '나'의 느낌이다. 

그러면 진아는 에고가 알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아니, 에고는 진아를 알수 없다 !

 

따라서 진아에게는 자기탐구가 불필요하고, 

에고에게는 진아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날 때, 이런 의문들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자기 탐구를 하는 실제적 방법은 무엇인가? 

왜 경전에는 이 '자아탐구'라는 용어가 나오는가?"

우리는 이렇게 조사하여 답을 알아 낼 수 있는가? 그렇게 해보자. 

 

스리 바가반이 '탐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와, 

경전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경전들은 다섯 껍질, 즉 몸, 생기,마음, 지성, 

그리고 무지의 어둠을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하고 부정하는 것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누구이며, 어떻게 부정하는가? 

 

만약 마음(혹은 지성)이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자신이 보는 대상인 지각력없는 육신과 생기를 부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상으로 마음이 어떻게 그 자신, 곧 자신의 형상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의 지각 범위를 넘어서 있는 다른 두 껍질, 

즉 지성과 무지의 어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아로서 머무르기 위해 탐구를 할 때 

마음은 '나는 이 몸이 아니다, 나는 이 생기가 아니다'라고 마음 속으로 염하는 것 외에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볼 때, '탐구'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는 

자기주시(즉, 1인칭인 '나'라는 느낌에 대한 주의)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마음의 본질은 늘 그 자신 아닌 사물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즉 2인칭과 3인칭만을 아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이 어떤 사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마음이 그 사물에 고정된다(집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자체가 집착이다 !

 

마음이 몸과 생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므로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를 판정할 의도로 그러는 것이기는 하나 -

그 같은 주의는 그것들에 집착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것들을 부정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참된 구도자라면 누구나 수행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지금 우리가 모른다고 잘못 알고 있는 진아는 진실로 우리의 실체이므로, 

우리(지고한 진아)의 주의의 성품 자체가 은총(진아의 힘)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주시하고, 관찰하거나 바라보는 것이 무엇이든, 

그 사물은 은총의 축복을 받아 길러지고 변형된 것을 의미한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자신을 하나의 개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주의력은 진아의 '아는 힘'에 의한 반영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주의력이 미치는 혹은 고정되는 대상은 은총에 의해 길러지고 더욱 더 번성한다!

따라서 마음의 주의력이 2인칭과 3인칭 쪽으로 더욱 더 향할 때, 

그 대상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힘과 무지 

- 그것들에 대한 생각의 형태를 한 다섯 감각지식 - 둘 다 더욱 더 자라날 것이고,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우린는 이미 우리의 모든 생각은 2인칭과 3인칭 대상에 대한 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우리가 마음, 곧 세계의 형상들(2인칭과 3인칭 대상들)인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것들은 몇 배로 늘어나며 번성할 것이다. 

이것은 실로 하나의 장애이다. 

우리의 주의 - 은총의 시선 -를 그 위에 두면 들수록, 

마음의 동요하는 성질과 들뜸이 증가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는 셍각으로 무엇을 부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반면에 만약 우리의(진아의) 주의가 우리 자신에게만 항하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앎만이 길러지고 

마음에는 주의가 가지 않으므로, 마음은 우리의 은총의 뒷바침이라는 힘을 빼앗긴다. 

"쇠와 짖굳은 장난은 쓰지 않고 내버려 두면 녹이 슨다."는 타밀 속담처럼,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은밀하고 짓굳게 일어나는 성품을 지닌 모든 원습의 씨앗들이 조용히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것들은 물기를 빼앗긴 씨앗처럼 말라버리고 약해져서 생각이라는 식믈로 싹이 트지 못한다.

그럴 때 진아지의 불길이 솟구쳐 나오면 이 원습들은 잘 마른 땔나무처럼 다 불타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원습의 완전한 소멸을 가져오는 방법이다. 

누가 우리에게"동쪽을 버려라"고 할 때, 

그렇게 하는 실제적인 방법은 "서쪽으로 가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아 아닌 다섯껍질을 버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그 비진아를 버리는 실제적인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하여 ' 이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소극적 방법이다. 

스리 바가반은 이 소극적 방법이 '원숭이를 생각하지 말고 약을 마시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비실제적임을 알고,

우리에게 '코끼리를 생각하면서 약을 마시라'는 단서를 줌으로써, 이제 원숭이를 생각하지 않고 약을 마시는 실제적인 방법을 보여준 것이다. 즉, 당신은 고대의 소극적 방법을 개혁하여 '나는 누구인가'라는 적극적 방법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었다. 

[역주 :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한 의사가 어떤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면서 원숭이를 생각하지 않을 때만 약을 먹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러나 환자는 그 조건 하에서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약을 마시려고 할 때마다 어김없이 원숭이에 대한 생각이 솟아 올라왔기 때문이다.]

 

( - - -) 진실로 에고가 모든 것이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즉 이 에고인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가 모든 것을 참으로 포기하는 것이네. 이와 같이 알아야 하네 !              - <실재사십송, 제26연> 

 

 

                                            -스리 사두 옴 지음,대성 옮김<스리 라마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