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3. 21:57ㆍ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본문]
또 묻는다.
"어떻게 비도(非道)를 행하면 불도(佛道)를 통달합니까?"
답한다.
"(선악 등 일체법에) 평등하여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
[해설]
비도(非道)를 행하여 불도(佛道)에 통달한다는 법문은 <유마경 불도품>에 나온다.
이때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이 어떻게 해서 불도에 통달합니까?"
유마힐이 대답하였다.
"만약 보살이 비도(非道)를 행한다면 이것이 불도를 통달하는 길이 됩니다."
또 물었다.
"어떻게 보살이 비도(非道)를 행합니까?"
답하였다.
"만약 보살이 오무간죄(五無間죄)를 행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성냄이 없고, 지옥에 가더라도 모든 죄의 더러움이 없으며, 축생계에 가더라도 무명(無明), 교만 등의 잘못이 없고, ----어리석은 행을 보이면서도 지혜로써 그 마음을 조복(調伏)하며, 인색하고 탐착하는 행을 보이면서도 내외의 소유(所有)를 버리고 신명(身命)을 아까워하지 않고,
금계(禁戒)를 범하는 행을 하면서도 청정한 계율에 안주하여 조그마한 죄에도 오히려 크게 두려운 마음을 품으며,
- - - 여러 번뇌를 보이면서도 마음은 항상 청정하고, - - - 열반을 현시(現示)하더라도 생사를 끊지 않습니다.
문수사리여 ! 보살은 능히 이와 같이 비도(非道)를 행하나니 이것이 불도를 통달함이 되는 것입니다."
비도(非道)란 행해서는 안될 행이다.
그런데 보살이 오히려 비도를 행하여 불도(佛道)를 통달한다는 것은,
비도를 통해서 비도가 아닌 자리를 구현할 수 있고, 불이(不二)의 진리를 시현(示現)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도를 처음부터 배제하고자 한다면 불이의 이법(理法)에 어긋나고, 무생(無生)의 진리에 어긋난다.
비도의 자리에서 분별을 떠나 있으면 이미 비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비도에서 비도가 비도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봄이 된다.
<금강경>에 "만약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면 곧 여래를 봄이다."고 하였다.
비도를 통해서 비도에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머무름 없는 도(道)의 자리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도를 피하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도에 뛰어들어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 곧 보살의 불도 통달의 행이다. 비도에서 정도의 뜻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비도와 정도가 서로를 함용하는 까닭이다.
'번뇌가 곧 보리(覺)'인 까닭에 비도에서 보리(菩提)를 요지(了知)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만약 비도를 버리고 정도를 취한다면 이는 정도의 뜻, 불이(不二)의 뜻에 어긋난다.
[본문]
또 묻는다.
"어떻게 함이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한다.
"(일체)법에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해설]
분별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 또한 분별과 분별하지 않음의 분별이 있게 되어버린다.
마음이 일어나거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 있다면 이미 분별이 일어난 것이 된다.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도록 붙들어 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바로 당념(當念)에 즉(即)하여 있는 것이다.
마음이 대상이 되어버리면 이미 어긋난 것이다.
<반주삼매경>에 "마음이 마음을 모른다",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보지 못한다." 고 하였다.
본래 마음이 마음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고,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함을 뚜렷이 안다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승의 선지(禪旨)는 '불기심(不起心 : 마음을 일어나지 않게 함)'이 아니라,
'심불기(心不起: 마음이 본래 일어나지 않음)'를 뚜렷이 아는 것(了知)이다.
그래야 진실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박건주 역주<절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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