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59)

2021. 8. 6. 20:51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치유 --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치유란 뭔가요? 

 

라메쉬: 치유요? 그 단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지요. 의사는 치유를 상처를 치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심리 치유사는 치유를 에고 안에 생긴 분열을 치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질문자: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라메쉬: 근원은 언제나 참의식입니다. 

 

질문자: 어떻게 하면 그런 식으로 쓸모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나요? 

 

라메쉬: 쓸모 있고 싶다면, 당신이 생각하기에 쓸모 있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하는 일이 쓸모 있을지 아닐지, 그리고 누구에게 쓸모가 있을지는 영향 받는 사람이 생각해야 할 것이죠. 이 몸-마음 유기체는 특정한 행동이 이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도록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잉태되고 창조됩니다.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이 몸-마음이 잉태되면서 함께 타고난 특징들에 제한됩니다. 그리고 그런 특징들은 잉태되는 순간 심어지지요. 

 

질문자: 그럼 그 생각은 별로 방해가 안 되는군요? 

 

라메쉬: 아무도 방해할 수가 없어요. 

 

질문자: 그럼 어떻게 치유가 작용하나요? 

 

라메쉬: 치유는 성공하든지 못 하든지 간에 하나의 행동입니다. 참전체성 기능의 일부죠. 치유하는 이가 성심껏,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능력껏 최선을 다해 치유합니다. 하지만 그 치유가 어느 특정한 순간에 어떤 종류의 결과를 가져올지는 치유자의 손에 달려있지 않지요. 

 

-- 죽음의 순간에 집중하기 -- 

 

질문자: 몸을 떠날 때 아메바처럼 되지 않고 사마디에 확실하게 들어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요? (웃음) 

 

라메쉬: "누구"를 보고 하는 말입니까? 

 

질문자: 그럼, 집중의 문제인가요? 

 

라메쉬: 아니죠, 잠깐만요. 누구를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까? 보통사람들 말입니까? 

 

질문자: 제 자신을 말하는 겁니다. 

 

라메쉬: 그 말은, 당신이 자기가 언제 죽을지 정확한 순간을 알고 그 순간에 "이것을 해야 합니까? 저것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을 거라고 추측하는 거죠. 무슨 까닭으로 언제 죽을지 알게 되는 특권이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질문자: 그렇지만 죽음의 순간에 집중해서 자신의 나침반을 정확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일이 중대하다고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라메쉬: 저는 그런 일에 신경 안 씁니다.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아요. 당신은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보장하건 데, 당신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별적 행위자란 없어요. 집중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일어날 일이라면 일어날 겁니다. "당신"은 그 일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어요. 

 

-- 죽음 -- 

 

질문자: 제가 어렸을 때 저희 마을에서 사람들은 80, 90세에 돌아들 가셨는데, 그죽을지를 일주일 전 즈음에 아셨어요. 갈 준비를 하셨죠. 땅에 묻힐 때 입을 옷을 세탁해서 침대 옆에 두셨어요. 관이랑 여러 가지 것들을 사셨죠. 그분들은 그때를 정확히 아셨는데, 아주 건강하셨죠. 단순한 분들이셨어요. 정신적으로 수준 높은 분들이 아니셨습니다. 사실, 고등학교까지 마친 사람은 제가 유일하거든요. 

 

라메쉬: 그러니 보시면, 그런 기본적인 생활 속에서 직관의 수준이 높지요. 

 

질문자: 그분들은 정확히 아셨어요. 

 

라메쉬: 언제 죽을지를 아는 것보다 죽음에 대한 태도가 훨씬 중요할 겁니다. 

 

질문자: 죽으면 몸은 썩게 되죠. 아침에 깨면 하루 더 나이 먹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라메쉬: "나"란 죽은 뒤에도 자신이 몸-마음에 계속해서 남아있을 거라고 믿지요. 어떤 사람들은 죽은 뒤에 몸을 얼려놓기까지 해요. 그렇게 하는 건 "나"라는 이 정체성이 몸과 함께 계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죠! 

 

질문자: 서양에서는 죽음에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어요. 동양 사람들은 죽음을 좀 더 잘 받아들이죠. 여기 서양에서는 우리는 죽기로 되어있지 않아요. 

 

라메쉬: 아니죠. 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다면, 더 하죠! 죽음이라는 공포를 없애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둘이 아님'을 이해하고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모든 현시의 진정한 본성을 보는 겁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동양 보다는 확실히 서양에서 '둘이 아님'을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힌두인으로 아니면 무슬림인으로 죽어서 자기들만의 독립된 천국으로 가는데 관심있어요. 동양은 여전히 조직적인 종교가 아주 강합니다. 

 

질문자: 저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죽고 싶지는 않고 죽지 않는 것이 더 좋지만, 비행기 사고라든지 어떤 사고 같은 것으로 죽게 될까봐 두려워요. 

 

라메쉬: 그 말은, 마음 속 깊이 죽음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죽음의 현상에는 두려움이 없지만 죽어가는 과정은 두렵다는 거죠. 아시겠어요? 고통스럽게 아니면 그 비슷하게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르죠. 고통에 아주 민감한 사람은 죽음의 과정을 좀 더 걱정합니다. 죽음의 과정을 두려워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 마하리쉬의 깨달은 소 -- 

 

질문자: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가끔 동물도 완전히 깨닫게 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라메쉬: 무슨 말인지 압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소 이야기죠.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무슨 생각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질문자: 그렇군요. 문맥의 전후 관계를 무시한 말이군요. 

 

라메쉬: 티뷰론에서 제가 대담을 할 때 그 곳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고양이 이름이 '비씨'였어요. 그런데 매일 제가 대담을 시작할 때면 그 녀석이 들어와서 제 무릎에 뛰어 올라 앉아 한 참을 머물렀죠.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서 누가 깨닫게 된다면, '비씨', 저 고양이여야 합니다."라고 농담하곤 했죠. 

 

 

-- 영적인 아이로 키우기 -- 

 

질문자: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관해서 일반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가 영적으로 발달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종류의 환경이 좋은가요? 

 

라메쉬: 아주 진심으로, 아이를 영적으로 키우는데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군요. 아주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요. 사실, 아이를 영적으로 키우고 싶은 바람 때문에 아이는 엄청난 죄책감과 아주 큰 고통을 짊어지고 자라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신이 보시기에 알맞도록 신에게 아이를 키우게 놔두고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지 않으면 당신과 아이들 모두 좀 더 행복할 겁니다. 물론 옳고 그르다는 느낌, 규율과 자유의 조합은 알아야겠죠.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아이가 의무감으로 느끼는 정도까지 아이에게 옳고 그른 것에 관해서 이야기해주거나,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제 의견으로는, 아이에게 엄청난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세요. 영적인 것의 기초는 죄의식과 부담이 없는 겁니다. 영적인 것의 기초는 편안한 자유입니다. 보통은 이 점을 이해 못하고 영적인 것을 엄청난 노력으로 집중을 해서 뭔가를 찾아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죠. 제가 보장하건 데, 그렇지 않습니다. 괜히 그런 식으로 큰 일을 만들지 마세요. 찾음이 알아서 자기 길을 가도록 놔둬요! 

 

-- 조직적 종교에서 희석시키는 진리 -- 

 

질문자: 워싱턴에 대법원 건물이 지어질 때, 누가 위대한 종교 창시자들의 초상을 걸어 두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초상화들을 주문했고 벽에 걸었죠. 무슬림 사람들이 거기에 무함마드의 초상화가 걸린 것을 보고는 난리를 치며 항의해서 그 초상화를 내려서 지하실에 넣어뒀는데, 아직까지... 

 

라메쉬: 그 사람들이 예언자를 지하실에 넣어두는데 반대를 안 했다고요?! 

 

질문자: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생각난 것은 무함마드가 처음부터 자신의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부탁 했을 때는 형상화한 자신 보다 형상 없는 참자아에, 지바 보다 아트만에 사람들이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 무함마드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이 모두를 별 큰 일로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르죠. 

 

라메쉬: 그렇죠. 언제나 정말 보는 관점의 문제죠. 시각을 좁히면 늘 어려움에 직면할 겁니다. 넓은 시각에서 보면 이 초월적 철학, 이 아드바이타 철학은 모든 조직적 종교의 기반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중에 오는 해석하는 사람들이, 매개자들이 끼어들어서 시각을 좁혀버리는 거죠. 모든 종교에서 나중에 오는 해석들이 원래의 철학과 그 철학의 해석들 사이에 엄청난 틈을 야기시킵니다.(33cho)

 

                                  -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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