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6. 22:41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질문 : 깨달은 사람도 꿈을 꿉니까?
마하리쉬 : 그렇다. 깨달은 사람도 꿈을 꾼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며, 깨어 있는 상태 역시 꿈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대가 알고 있는 꿈을 첫번째 꿈이라고 하면, 깨어 있는 상태는 두번째 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깨달은 사람은 궁극적인 실체인 네 번째 상태(뚜리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는 네 번째 상태 위에 나타나는 영상으로 여기며 집착하지 않고 바라본다.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깊히 잠든 상태를 넘어선 네번째 상태를 뚜리아라고 한다. 뚜리아는 깊히 잠든 상태에서의 깨어있음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뚜리아 뿐이고, 나머지 세 상태는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뚜리아는 세 가지 상태와 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또 다른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뚜리아띠따(네번째 상태를 넘어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질문 :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에게는 마음의 세 가지 상태가 서로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까?
마하리쉬 : 마음 자체가 순수의식의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마음의 세 가지 상태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깨달은 사람은 마음의 세 가지 상태를 모두 실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의식의 첫번째 단계인 깨어 있는 상태가 실재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는 실재 그 자체가 기준이다. 순수의식이라는 이 실재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깨어 있든 꿈을 꾸든 깊히 잠자든, 실재는 영원히 지속된다. 실재와 하나된 사람에게는 마음도 마음의 세 가지 상태도 없으며, 따라서 내향성도 외향성도 없다.
자신의 영원한 참자아를 깨달은 사람은 항상 깨어 있는 상태에 있다. 그것은 항상 꿈꾸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란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의 상태는 또한 깊히 잠든 상태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육체가 나'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질문 : 깨달은 사람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벌례에 물려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마하리쉬 : 감각도 있고 '나'라는 생각도 있다. 그런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도 있고 깨달은 사람에게도 있지만, 차이가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육체만을 '나'라고 생각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이 참자아, 즉 브라만임을 안다. 그러므로 고통이 있어도 그냥 내버려 둔다. 고통 또한 참자아의 일부이며, 참자아는 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넘어서야 참자아를 깨닫는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서라지면 행위나 행위자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카르마가 없다.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체험이다. 이런 체험이 없으면 깨달은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육체를 그 사람이라고 보고, 그대와 같은 질문을 한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질문 : 제가 보기에, 선생님께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라디오는 노래도 하고 말도 한다. 그러나 뜯어 보면 그 안에 아무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는 마치 빈 공간과 같다. 육체가 라디오처럼 말을 하지만, 이 육체 속에는 행위자가 없다.
질문 :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하리쉬 : 움직이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한데,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마음없이 살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여러 책에 나와 있다.
도자기 만드는 물레는 도공이 그릇을 다 만든 다음 더 이상 바퀴를 돌리지 않아도 얼마 동안은 계속 돌아간다.
선풍기 날개 역시 스위치를 꺼도 얼마동안 계속 돈다.
마찬가지로, 깨달은 이후에도 육체를 형성하도록 만든 과거의 카르마가 육체로 하여금 이런 저런 행위를 하도록 만든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가 행위자라는 생각이 없이, 카르마의 힘이 나타나는 대로 행위를 해 나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보통은 이렇게 설명한다. 잠자는 아이를 깨워 음식을 먹이면 비몽사몽간에 받아 먹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밤에 무엇을 먹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깨달은 사람 역시 이런 저런 행위를 하지만, 자기가 행위자라는 생각도 없고, 무슨 행위를 했다는 기억도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점은, 이런 설명들이 깨달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는 육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육체가 행위를 하더라도 자신은 아무런 행위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런 설명은 깨달은 사람을 그의 육체와 동일시하여 바라보는, 또 그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질문 : 깨달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육체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된다는 말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하리쉬 : 깨달은 이후에도 계속 육체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육체는 공기처럼 순수해져야 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 즉시 죽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얘기 말고 우스꽝스러운 이론들이 많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는 즉시 육체를 떠나야 한다면, 참자아나 깨달음의 상태에 관한 가르침이 어떻게 뒷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의 깨달음의 열매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깨달은 사람이라면 깨달음을 얻자마자 죽었을 것인데,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의 체험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음이 없이는 행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행위를 계속하는 한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면,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한 위대한 성인들도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이슈와라(힌두교 최고의 인격신) 역시 깨닫지 못한 무지한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이슈와라는 쉬지 않고 세상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이러하다. 깨달은 사람도 무슨 일이든 하며, 또 매우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행위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결코 자신을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힘이 육체를 통해서 작용하도록 자신의 육체를 내맡기며, 육체를 통해 저절로 행위가 일어나도록 할 뿐이다.
질문 : 깨달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육체적인 겉모습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본다.
그는 참자아를 모르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를 육체와 동일시하며, 그와 같은 잘못을 깨달은 사람에게까지 적용한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도 자기처럼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육체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또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행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행위자라고 생각하고 육체의 행위를 자신의 행위로 생각하면서, 깨달은 사람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행위를 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상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없다.
그대의 질문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문제가 될 뿐,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런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행위자라면 선악 간에 자신의 행위의 성격을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참자아는 결코 행위자가 아니다,(따라서 참자아의 행위에는 선악이 없다)누가 행위자인지 탐구해 보라. 그러면 (행위자는 없고) 참자아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 질 것이다.
질문 : 선생님의 말씀은 이런 뜻이 맞습니까? 즉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육체를 보는 것이지, 깨달음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을 보아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하리쉬 :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으로 보인다. 무지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행위자라고 오해하지만 깨달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참자아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참자아는 항상 빛을 발하는, 주객을 초월한 순수한 앎(즈나나)이다. 따라서 참자아를 깨달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깨닫지 못함'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친구가 나란히 누워 잠이 들었다고 하자. 한 친구는 둘이 함께 여행을 떠나서 여러가지 신기한 경험을 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다음 자신의 꿈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너도 그렇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그건 자네의 꿈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은가? '고 말했다.
자신의 무지한 상태를 깨달은 사람에게 적용시키려는 사람은, 자기의 꿈을 친구에게 적용시키려고 한 어리석은 친구와 똑같다.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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